본명 김봉남, 생년월일 1935년 8월 24일, 출생지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 22번지(현재 서울 은평구 구파발), 구파발에서 농사를 짓던 김진산(金辰山)씨의 5남매 중 넷째, 고양군 신도초등학교를 나와 고양중학교에 다니던 중 6·25가 나자 온가족이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 그곳에서 한영고등학교를 졸업. 키는 178cm, 혈액형은 A형, 좋아하는 음식은 김치찌개와 된장찌개, 종교는 불교.
12일 저녁 타계한 앙드레 김(75) 선생의 기본적인 약력사항이다. 향년 75세. 지난 7월 21일 폐렴증세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지 20여일만의 일이다. 유족으로는 1982년 입양한 아들 중도씨(30)와 며느리 유은숙씨 그리고 세 명의 손자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1호실 특실에 마련됐다. 유족측은 당초 발인을 16일로 발표했으나 15일 오전 6시로 하루 앞당겼다.
김 선생은 누가 뭐래도 지난 50년 동안 한국을 대표해온 패션디자이너다. 그러나 기자도 그를 '제대로' 알기 시작한 것은 11년 전부터였다. 1999년 당시 <동아일보> 신동아팀에서 일할 때, 이른바 고급옷 로비 청문회를 계기로 후배기자가 만나 쓴 그와의 탁월한 인터뷰(김현미, 앙드레 김과의 5시간 격정 인터뷰 - "김봉남, 자랑스러운 내 이름". <신동아>)와 취재 후일담을 듣고서였다.
그때부터 기자는 앙드레 김을 달리 보게 되었다. 그리고 2006년 9월에는 그의 '판타스틱한' 패션쇼 무대를 가까이서 볼 기회도 가졌다. 물론 패션에 문외한이 내게는 단순한 볼거리였을 뿐이지만.
환상에서 현실로...옷로비 청문회 증언대에 선 '앙드레 김'대중의 환상 속에서 존재하던 그가 일상 현실 속의 국민 대중에게 처음 다가온 것은, 그의 패션 인생에서 최대의 고비였던, 김대중 정부 시절인 지난 99년 8월 국회에서 열린 이른바 '고급옷 로비' 의혹사건 진상조사 청문회 (이하 옷 로비 청문회) 때였다.
다수당인 한나라당은 15대 국회 마지막 해에 ▲옷 로비 의혹사건 ▲조폐공사 파업유도 의혹 사건 ▲김강용 고관집 절도 사건 ▲3·30 재보선 당시 50억원 살포 의혹 사건을 4대 의혹 사건으로 규정하고 국정조사와 특검제 도입을 강력히 주장했다.
당시 여야 3당 총무의 '정치적 합의'에 따라 옷로비 청문회가 이틀째 열린 8월 24일 오전 10시 국회 법사위 회의실에서 가장 주목을 끈 증인은 세계적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 김씨는 김태정 전 법무장관 부인 연정희씨가 앙드레 김 의상실에서 구입한 옷과 관련, '대납요구'를 한 적이 있는지를 신문받기 위해 증언대에 섰다.
먼저 앙드레 김 등 6명의 증인에 대해 인적사항을 확인하는 자리에서 엉뚱한 해프닝이 발생했다. 앙드레 김이 "앙드레 킴입니다"라고 답변하자 목요상 법사위원장이 본명을 얘기하라고 말했고, 김씨가 "김봉남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순간 방청석에서는 폭소가 터졌다.
오전 10시에 증인선서를 한 증인 김봉남씨는 여야의 실랑이 때문에 이날 밤 9시에 속개된 회의시간이 되어서야 신문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위원들은 여전히 김씨의 예명 사용 여부를 놓고 설왕설래했다.
정형근 "어떻게 해서 앙드레 김이란 이름을 갖게 되셨습니까"목요상 위원장 : 그러면 먼저 김학원 위원님 신문하시지요. 신문시간은 5분입니다. 김학원 위원 : 먼저 앙드레 김…. 목요상 : 참고로 말씀드립니다마는 예명이나 가명을 부르지 마시고 본명을 불러 주시기 바랍니다. 한영애 위원 : 의사진행입니다. 위원장님의 본명을 사용해야 된다는 법적 논리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대한민국 국민 4500만이 앙드레 김이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데 국민이 알고 있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실제적이지….목요상 : 존경하는 한영애 위원님 잘 아시다시피 공식행사에서 성명을 밝혔기 때문에 본명을 밝히는 것입니다. 양해하시기 바랍니다.이어 청문회 '주공격수'로서 청문회 전부터 연정희씨가 구입하거나 선물받은 고가 옷이 최하 수천만원부터 1억원이 넘는다는 의혹을 제기해온 한나라당 정형근 위원의 신문 차례가 왔다.
정형근 위원:김봉남씨! 증인 김봉남:예. 정형근 어떻게 해서 앙드레 김이란 이름을 갖게 되셨습니까? 김봉남:제가 60년도부터 디자인 공부를 하고 있을 때 프랑스 대사관의 외교관께서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는 한국의 성은 간직해도 이름은 부르기 쉬운 이름으로 앙드레라고 하면 어떻겠느냐 해서 앙드레 김으로 되었습니다.정형근:잘 하셨네요. 12월16일 앙드레 김씨가 하고 있는 가게에 연정희씨가 왔지요?김봉남:예. …(중략)…정형근:같이 간 사람이 밝힌 바에 따르면 검정색 투피스와 브라우스 한 세트, 베이지색 투피스와 브라우스 한 세트, 총 두 세트를 연정희씨가 맞추었는데 한 세트에 200만원 이상 가는 세트라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김봉남:그런데 그것은 정말 전혀 아닙니다.정형근 : 전혀 아닙니까?김봉남 : 예. 그리고 저희 의상은 저희 지점의 대리점인 부산 롯데백화점에도 있습니다. 그쪽을 체크해 보셔도 아시지만 가격이 다 같습니다.정형근 : 연정희씨는 어느 정도 단골입니까?김봉남 : 95년도쯤 다녀가시고 그후에 처음 오신 것이고 저희가 뵙기로는 영동 세브란스병원에서 1년에 한번씩 하는 근육병 환자를 위한 자선의 밤 행사….'앙드레 김 제대로 알기'와 '앙드레 김 4행시'옷로비 청문회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그의 본명과 독특한 외모 말고도 과연 앙드레 김과 같은 톱 디자이너의 옷값이 얼마나 하느냐였다. 또 그것이 앙드레 김을 증인으로 선정한 본질적 이유이기도 했다.
위원들은 저마다 옷 가격은 빼놓지 않고 질문했다. 앙드레 김은 "평상시 입는 정장은 135만원, 155만원, 180만원, 190만원, 200만원까지 있고, 200만원 이상 되는 것으로 이브닝드레스나 음악회를 위한 의상, 웨딩드레스가 있다"면서 "그것은 보통 250만원, 290만원 정도다"고 대답했다. "800만원짜리 1000만원짜리는 없느냐"는 질문이 이어졌지만 그는 "그것은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라고 강하게 부인했다.
결국 로비의 대상이 된 김태정 장관의 부인 연정희씨의 옷값 2400만원 의혹은 연씨가 딸 혼수용으로 장만한 옷값 250만원이 10배쯤 부풀려진 것으로 사실상 밝혀졌다. 연씨는 당시 청문회에 나온 앙드레 김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제가 가서 옷을 여러 벌 맞춰서 선생님 사업에 도움이 되어드리지도 못했으면서 한번 옷 한 것 때문에 선생님이 이렇게 곤욕을 치르게 돼서 정말 죄송합니다."청문회 계기로 '국민 패션디자이너'로 거듭나
그래서 옷로비 의혹사건 진상조사 청문회에서 밝혀진 것은 앙드레 김의 본명이 '새 봉(鳳)자, 사내 남(男)자 김봉남'이라는 사실 밖에 없다고 비아냥거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니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앙드레 김 제대로 알기'가 그것이다. 앙드레 김이 국산천만 사용하고 모피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애국자'라는 점과 국세청이 선정한 모범성실납세자라는 점 그리고 그의 '엘레강스하면서도 우아하구, 판타스틱하면서도 환상적인' 의상이 예상 외로 고가의 사치품이 아니라는 점 등이 그것이다.
또 그가 청문회 때도 양복 대신에 변함없이 입고 나온 독특한 하얀색 옷도 국민의 눈을 즐겁게 했다. 그래서 옷로비 청문회 뒤에는 "해변가에 김들이 놀러왔는데 하얀 옷을 입은 김이 나오더니 '난 앙드레 김이야'라더라"는 우스갯소리와 "앙녕하세요-드자이너예요-래이름은요-김봉남이에요"라는 '앙드레 김 4행시'까지 등장했다.
야당의 정치 공세로 시작된 옷로비 청문회로 날벼락을 맞은 그에게 청문회는 위기였다. 그러나 그는 한결같이 독특한 말투와 외모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청문회에 나와서도 한결같은 그의 언행을 보고 더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먼저 천진난만한 그를 알아보고 사인을 요청할 만큼 스타가 되었다.
오히려 패션디자이너로서는 보기 드물게 그는 서민대중으로부터도 사랑을 받는 '국민 패션디자이너'로 거듭났다. 청문회에서 본명이 알려진 것이 오히려 대중과 교감하는 기회가 된 것이다. 이후 그는 연예인들의 단골 성대묘사 대상이 되고, 직접 예능프로에도 출연했다. 또 청문회 이후 속옷, 화장품, 아동복 브랜드 등에서 사업제안이 쏟아져 들어와 그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을 만큼 사업영역이 확장되었다.
한번 맺은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는 'NQ의 달인'그러나 돌이켜보면 그의 평생 동안 한결같은 노력과 꿈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20여년 전에 패션 담당 기자로 그를 처음 만난 후부터 그에 대한 경이로움과 존경심을 항상 간직하고 있다는 <경향신문> 유인경 선임기자는 그에 대한 첫인상을 이렇게 적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겨우 20대 초반의 신참 여기자에게 두 손을 모아 깍듯하게 인사를 했으며 패션 촬영을 나갈 때는 의상과 액세서리는 물론, 모델과 스태프들이 먹을 도시락까지 직접 준비해 나타났다. '밖에서 파는 음식을 잘못 먹어 모델이나 기자분들이 배탈 나면 안 되죠'라며 그는 집에서 말아 온 김밥을 꺼내 놓아 감동시켰다. 그토록 겸손한 태도와 완벽하게 주변을 챙기는 모습은 칠순이 된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칠순의 현역, 앙드레 김의 롱런 비결, 월간 <징기스칸> 2004년 5월호)유 선임기자에 따르면, 그는 한번 맺은 인간관계를 매우 잘 유지하며 타인들끼리도 서로 좋은 관계를 맺어 주려고 노력하는 'NQ(인간관계지수)의 달인'이다. 게다가 그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는 매일 오전 5시 30분에 일어난다. 스포츠, 경제, 영자(英字) 신문을 포함한 17개의 신문을 구독한다는 그는 1~2시간 동안 신문을 훑어본다. 관심 분야는 따로 스크랩도 하고 지인(知人)들의 동정도 챙긴다. 단골 고객, 친한 사람들과 관련된 기사가 나오면 직접 전화를 걸어 '축하해요'라거나 '속상하시겠어요' 등의 인사를 나눈다. 그래서 신문이 안 나오는 일요일이 너무 싫지만 '기자들도 쉬어야지' 하고 참는다고 한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그의 집에는 다섯 대의 TV수상기가 있어 늘 네 개 공중파와 한 개 케이블 방송을 모니터 한다. 드라마, 쇼 프로그램, 광고 등을 모니터 하면서 누가 현재 인기가 있으며 앞으로 가능성이 있을지 파악한다. 그의 패션쇼에는 항상 당대 최고 인기를 누리는 톱스타들과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있는 신인 스타들이 함께 등장하는데 부지런히 TV를 본 그의 안목 덕분이다. 나는 어떤 신문기자나 방송사 간부도 그이처럼 많은 신문을 꼼꼼하게 챙기고 여러 방송을 모니터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칠순의 현역, 앙드레 김의 롱런 비결)젊은 시절 영화 통해 눈뜨고 영어 통해 꿈 키워
패션 디자인계의 상당수 인사들조차도 앙드레 김이 활달한 성격에 영어도 잘해서 특히 외국인들과 교제가 많아서 누구보다도 빨리 해외무대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착각이다. 젊을 적 그는 영화를 통해 패션디자인의 영감을 얻었으며 영어를 통해 꿈을 키웠다.
"저는 부산 피란시절, 그 어려운 중에도 영화를 통해 패션디자인에 눈을 떴어요. 다른 인터뷰에서도 가끔 밝혔듯이 그때 제가 좋아했던 배우가 비비안 리, 오드리 헵번, 엘리자베스 테일러, 지나롤로 브리지다, 이런 배우들이에요....(중략)...많은 분들이 착각하고 계신데요, 저는 외국유학을 해본 적이 한번도 없어요. 오랜 시간 외국에 머물렀던 적도 없구요. 다만 제가 중학교 때 좋아하던 과목이 예술, 영어, 지리, 세계사였던 걸로 기억해요. 지금이야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 배우고 학원이나 교재도 풍부하지만 그때는 어디 그랬나요? 영어 교과서와 수업시간이 전부였지요. 그런데 시골학교여서 그런지 아이들은 영어시간을 제일 싫어했어요. 선생님이 리딩을 하고 다음에 '읽을 사람?'하고 교실을 둘러보면 아이들은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책 속에 얼굴을 파묻어버리곤 했죠(그는 이 장면을 설명하면서 스케치노트를 들고 직접 얼굴을 가리는 흉내를 내며 웃었다). 그때도 저는 필링을 살려서 시적으로 읽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언제나 제일 먼저 손을 들고 영어책을 읽곤 했지요. 이제 기억나는데요, 부산 피란시절에 저는 미군 통신부대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어요. 학생들이 3교대로 일을 했는데, 저는 밤 11시에 가서 아침 7시까지 일했지요. 그 시절에 영어실력이 많이 늘었던 것 같아요. 나중에 외국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도 불편함이 없었구요. 당시 같이 일했던 대학생 중에는 유학 떠난 이들도 많구요, 그 모습을 보면서 저도 너무 가고 싶었어요. 아버님께 유학을 말씀드리기도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어요. 그리고 서울 환도 후에는 의상디자인에 몰두하게 됐죠."(앙드레 김과의 5시간 격정 인터뷰 - "김봉남, 자랑스러운 내 이름"). 서울로 돌아와 1961년 국제복장학원이 개원하자 1기생으로 입학, 1년 과정을 마친 뒤 62년 소공동 양복점 사무실 한켠을 빌려 자신의 의상실 문을 열었고, 그후 파리 패션쇼를 갖는 등 디자이너 앙드레 김의 인생은 승승장구를 기록했다. 그는 특히 해외에 나가 패션쇼를 통해 우리 문화의 우수함을 전파했으며, 주한 외교사절들이 부임할 때는 축하 꽃다발을 보내고 이임할 때는 석별파티를 열어주는 등 민간 외교관 역할도 톡톡히 했다.
모범성실 납세자 표창받은 '문화인'그의 디자인의 예술성을 먼저 알아본 것도 외국이었다. 그는 패션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 대통령 문화공로훈장(82년)을 받을 것을 시작으로 해서 한국정부의 화관문화훈장(97년), 프랑스정부 예술문화훈장(2000년) 등을 수상하는 세계적인 패션디자이너가 되었다.
또 그가 맡아온 세계평화아동축제 아동평화대사(2002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친선대사(2003년), 국제백신연구소(IVI) 홍보대사(2006년), 한국관광공사 관광명예홍보대사(2006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홍보대사(2007년), 여수엑스포 홍보대사(2007년) 같은 경력에서 보듯, 그는 '자선'과 '자신'(얼굴)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기꺼이 달려갔다.
그는 2006년에는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사원 특설무대에서 열린 '앙코르 - 경주 세계문화엑스포 2006'의 특별행사로 '앙드레김 패션쇼 - 판타지아(Fantasia)'를 성대하게 개최해 전세계 관객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당시 앙드레김 패션쇼는 '신들의 정원'이라고 부르는 앙코르와트에서 펼쳐진 최초의 패션쇼로 기록되었다.
그는 경기도홍보대사로 그 해 파주 평화누리에서 열린 '2006세계평화축전'에서는 "5천년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의 역사와 평화를 위한 민족적 염원을 민족 고유의 흰색과 신라왕조의 찬란한 문명을 대비해 예술적으로 표현했다"(앙드레 김)는 '하얀 평화의 날개'라는 제목의 패션쇼를 선보여 갈채를 받았다.
그에게는 백남준이 '비디오아트'라는 예술장르를 처음 만든 것처럼 '패션오페라'라는 예술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가가 따른다. 그는 또한 패션디자인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을 가장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도 따른다. 그의 의상에는 항상 특정한 한국적 문양의 수가 놓인다. 기자가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처음부터 국산천만 사용했다는 것은 알고 계시죠? 옛날에는 수입옷감은 모두 금수품이었죠. 그래서 부유한 사람들은 해외여행지에서 옷감을 사와야 했고, 시중에 나도는 외산 옷감들은 모두 밀수품이라 말해도 지나치지 않았어요. 그때는 양장점에서 외국 옷감을 쓰는지 경찰이 수시로 조사를 했어요. 저는 처음부터 주한외교사절단을 대상으로 패션쇼를 했고, 그래서 한국적인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에 옷감도 국산만 썼어요. 그리고 밀수품을 취급한다는 것 자체가 전혀 싫고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모피를 하지 않아요. 모피는 밀수품인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리고 실루엣 디자인 뿐만 아니라 디테일하게 수를 놓아 옷감을 디자인하는 것도 저에게는 즐거운 일이지요."(앙드레 김과의 5시간 격정 인터뷰 - "김봉남, 자랑스러운 내 이름"). 묘비명을 미리 쓴다면 뭐라고 쓰겠냐? "오우, 너무 길죠, 묘비명이?"
그는 애국자였다. 그는 또한 지금도 절세와 탈세의 경계선을 줄타기하는 고관대작들보다 더 문화인의 삶을 살았다. 그는 2005년 제39회 납세의 날에 모범성실 납세자로 선정되어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국세청은 세무조사 결과 앙드레김 의상실이 최근 3년간 매출누락, 가공경비 계상, 위장-가공 세금 계산서 수수사실이 전혀 없고 장부를 성실히 기장했음을 높이 평가해 상을 주었는데, 그는 축하인사를 받고서도 아기처럼 기뻐했다.
"오우, 여러 가지 상을 많이 받았지만 참 기쁘고 뿌듯해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남보다 세금을 많이 낸 것도 아니어서 상을 받을 줄 몰랐거든요."(유인경이 만난 사람 "한국 이미지 드자인 해왔어요")그가 타계한 것을 계기로 그의 젊을 날의 사진이 화제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그래서인지 나이 40이 넘어 입양한 아들 중도씨를 끔찍히 아꼈다. 그는 아들이 외국어대(불어과)를 졸업한 인연으로 외국어대 부설 '용인외고' 교복을 무료로 디자인해 주기도 했다. 독신이었던 그에 대한 세간의 오해 중의 하나는 그가 동성애자일 거라는 것이다. <신동아> 김현미 기자가 에둘러 물었다.
- 젊은 시절 앙드레김 모습을 보면 178cm의 큰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여간 잘 생긴 모습이 아니더군요. 그쯤 되면 따르는 여자도 많았을 것이고 마음만 먹었다면 결혼해서 지금처럼 외로운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그런 질문을 하는 분들에게 제가 꼭 드리고 싶은 말은요, 여자의상을 만드는 남자디자이너로서, 이성을 너무너무 좋아하게 되면 성공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 이유가요, 항상 여성들을 대해야 하는데 손님 중에는 매력적인 손님도 있고 패션쇼, 화보촬영을 하면서 아름다운 모델, 아름다운 연예인을 가까이서 자주 보게 되는데, 이성을 너무 좋아하게 되면 일도 못하게 되고 디자이너로서 이미지도 나빠지는 것을 많이 보았어요.".(앙드레 김과의 5시간 격정 인터뷰 - "김봉남, 자랑스러운 내 이름"). 그는 해마다 수 차례씩 국내외에서 패션쇼를 했다. 한 번 패션쇼를 할 때 필요한 의상은 보통 150~175벌이라고 한다. 디테일을 중시하는 그는 작품마다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자수문장(刺繡紋章)을 꼼꼼히 수놓아 디자인한다. 그는 평생 한국의 이미지를 '드자~인'한 완벽주의자였다. 2004년 8월 그에게 만약 묘비명을 미리 쓴다면 뭐라고 쓰겠냐고 유인경 기자가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오우…. 글쎄요. 20세기에 태어난 21세기에 활동하던 디자이너 앙드레김은 유행에 급급하지 않고 독창적인 세계로 한국과 아시아의 이미이지를 세계에 알렸으며…. 오우, 너무 길죠, 묘비명이?"(유인경이 만난 사람 - "한국 이미지 드자인 해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