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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미의 아침
하미의 아침 ⓒ 이상기

아침에 일어나니 피곤이 좀 풀렸다. 오늘 이동거리도 만만치 않다. 중간에 선선을 거쳐 투르판까지 가야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중간 중간 문화유산이 많아 '가고 보고 가고 보고' 하는 식이다. 그래서 지루함이 훨씬 덜할 것 같다. 그리고 하미에서 투르판을 거쳐 우루무치까지 이어지는 312번 국도는 포장한지 오래되지 않아 도로상태가 아주 좋다.

차는 하미 시내를 벗어나 금새 312번 국도로 들어섰다. 선선까지는 5시간쯤 걸린다. 우리는 선선 근처의 쿠무타크 사막을 방문할 예정이다. 쿠무타크 사막에는 옛날 누란왕국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누란왕국이 있던 곳까지 갈 수는 없고, 초입의 사산공원(沙山公園)을 찾아 사막체험을 하려고 한다.

하미와 투르판 사이 312번 국도는 포장상태가 아주 좋으며 최고시속이 110㎞이고 최저시속이 80㎞이다. 우리의 고속도로 수준이다. 중간에 자연화장실에서 한 번 소변을 보기 위해 쉬었다. 밖에 나오니 이건 완전 지옥이다.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는데 그 풍속이나 열기를 견딜 수 없을 정도다. 더욱이 국도변으로 철조망이 쳐져 있어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그래도 차안이 훨씬 낫다.

 오아시스 도시 선선 주변의 도로
오아시스 도시 선선 주변의 도로 ⓒ 이상기

차가 선선에 가까워지면서 다시 오아시스가 나타났다. 그리고 중간중간 쇠로 만든 메뚜기들이 아래위로 움직인다. 그 붉은 메뚜기가 바로 원유를 채취하는 원유시추공이다. 이곳 유전 이름은 투하(吐哈)유전이다. 투(吐)는 투르판을 말하고 하(哈)는 하미를 말한다. 버려진 땅으로 여겨지던 이곳 쿠무타크(庫木塔格) 사막이 이제는 자원의 보고로 각광받고 있다. 더욱이 선선(鄯善)은 석유를 근간으로 하는 화학공업단지가 생겨 투르판 지역의 경제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누란왕국의 옛터에서 만난 쿠무타크 사막 이야기

 쿠무타크사막 사산공원 입구
쿠무타크사막 사산공원 입구 ⓒ 이상기

선선 시내에서 점심을 먹고 우리는 쿠무타크 사막으로 향한다. 쿠무타크란 위구르어로 모래산(沙山)을 의미한다. 쿠무타크 사막은 선선 시내에서 남쪽으로 10분 정도 가면 나온다. 물론 사막의 중심은 더 남쪽에 있고, 그곳에 옛날 누란(樓蘭)왕국이 있었다. 누란은 옛날 실크로드의 요충으로 서역 문명이 이곳을 지나 중국으로 들어갔다. 또 둔황의 옥문관을 출발한 사람들이 누란과 구차를 거쳐 서역으로 원정을 나가기도 했다.

쿠무타크 사막은 크게 보면 타클라마칸 사막에 속한다. 이곳 쿠무타크는 도시에서 멀지 않고 환경이 좋은 편이어서, 연구와 탐험, 운동과 보건, 관광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연구와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쿠무타크 사막 입구에 도착하니 커다란 낙타조형물이 우리를 반긴다. 조형물에 타령천하(駝鈴天下)라고 쓰여 있는데, 옛날 낙타방울을 울리면서 사막을 건너야 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모래산으로 이루어진 쿠무타크사막
모래산으로 이루어진 쿠무타크사막 ⓒ 이상기

우리는 낙타 대신 전동차를 타고 사막 안으로 들어간다. 그때 시간이 오후 1시40분으로 하루 중 가장 뜨거울 때였다. 그래도 전동차 안으로 스치는 바람이 견딜만했다. 차로 5분쯤 갔을까? 천막과 사막차, 약간의 구조물이 있는 곳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이곳이 바로 사막체험을 하는 곳으로 누란고성의 모양을 축소해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고성까지 가서 안을 살펴봤다. 최근에 만들어 놓은 것으로 역사성이나 예술성은 전혀 없다.

이곳에서는 사막차를 타고 모래산을 달리는 체험을 할 수도 있으나, 땡볕에 하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한 20~30분 사막을 체험하고 다시 전동차에 올랐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동차가 올 때와는 다른 길로 가면서 쿠무타크 사막을 좀 더 많이 구경시켜 준다. 오면서 보니 누란고성을 제대로 복원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모래조각 '봉명서행': 장건의 서역원정을 표현했다.
모래조각 '봉명서행': 장건의 서역원정을 표현했다. ⓒ 이상기

우리는 모래조각 예술성(沙雕藝術城) 앞에서 내렸다. 그곳에는 50기가 넘는 모래조각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작품들은 2004년 8월에 처음 만들어진 이래 매년 개최되는 국제 사조예술제의 결과물들이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장건의 서역원정을 표현한 '봉명서행(奉命西行)'이다. 실크로드를 개척한 장건에게 바치는 작품으로 보인다. 그리고 '잠자는 부처(睡佛)'도 보이고 '톰과 제리'도 보인다. 이들 작품은 해학성이 돋보인다.

작품에는 여성들도 눈에 띈다. 인어상도 보이고 가을에 과일을 수확하는 여성도 보인다. <서유기>의 내용을 담은 삼장법사 모습도 보인다. 제목이 '대당서역(大唐西域)'이다. 설명에 따르면, 삼장법사가 경전을 구하러 천축국에 가려했으나 조정에서 금해 갈 수 없었다. 627년 삼장은 몰래 창안을 떠나 하서주랑, 둔황, 이오(하미), 고창(투르판)을 거쳐 서역으로 들어갔다. 모래조각에는 손오공이 삼장법사를 앞에서 인도하고, 사오정과 저팔계는 뒤에서 호위한다.

 모래조각공원: 沙雕藝術城
모래조각공원: 沙雕藝術城 ⓒ 이상기

조각들을 보면서 사막을 한 30분 정도 다녔더니 더위가 밀려온다. 모래밭에서 열기가 올라와 잘못하면 일사병이 걸릴 지경이다. 나무판으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입구 쪽으로 나오니 나무와 식물로 휴게소를 만들어 놓았다. 이곳에서 잠시 손도 씻고 세수도 하면서 열을 식혔다. 그리고는 포도나무를 심어놓은 통로를 따라 버스로 돌아왔다.

누란왕국의 영화 되돌아보기

 누란고성의 폐허
누란고성의 폐허 ⓒ 이상기
누란왕국은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서 사라진 것일까? 발굴과 기록을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누란은 기원전·후인 진·한(秦漢)시대 롭노르호 주변에서 중개무역으로 번성했던 왕국이었다. 월지국과 흉노 그리고 진·한으로 이어지는 중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치며 살아남았으나, 장건의 서역 원정 이후 한나라에 편입되었다. 이후 왕국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한군의 주둔지(西域長史府) 역할만 하게 되었다.

동진의 고승인 법현(法顯)의 <불국기>(416)에 이미 누란은 '죽음의 땅'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누란의 역사는 한나라 때까지 이어졌던 것 같다. 누란고성과 그 유지에서 발견된 유물로는 석기와 도기, 직물류, 청동기와 철기, 한문과 카로슈티어로 된 목간과 문서 등이 있다. 그리고 1980년 공작하(孔雀河) 북쪽 철판하(鐵板河) 옛날 무덤에서 3800년 전 미라가 발굴되었는데, 이것이 누란의 미녀다.   

외지의 새가 '구이'가 돼 떨어진다는 화염산

 베제클릭천불동에서 바라 본 화염산과 목두구의 오아시스
베제클릭천불동에서 바라 본 화염산과 목두구의 오아시스 ⓒ 이상기

쿠무타크사막을 나온 우리는 312번 국도 좌우에 펼쳐진 화염산(火焰山: 훠옌산)을 따라 베제클릭천불동(柏孜克里克千佛洞)으로 간다. 화염산은 말 그대로 불꽃처럼 붉게 타오르는 산이라는 뜻이고, 베제클릭은 산허리라는 뜻이다. 화염산을 따라 서쪽 투르판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길 주변을 보니 포도농장과 포도건조장이 끝없이 나타난다. 그것은 투르판이 포도주산지이기 때문이다.

베제클릭천불동은 투르판 동북쪽 40㎞ 지점에 있기 때문에, 중간에 국도를 빠져나온 다음 목두구(木斗溝: 무터우커우)를 따라 상류로 올라가야 한다. 하천이 화염산 협곡을 따라 흘러내리고, 개울가에는 풀과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그렇지만 화염산은 붉은 황토나 암반으로 풀 한포기 없다. 외지의 새가 아무 것도 모르고 뜨거운 화염산 위를 날아가다 구이가 되어 떨어질 정도라고 가이드가 농담을 한다.

 베제클릭천불동 벽화: 고창회골국의 왕자
베제클릭천불동 벽화: 고창회골국의 왕자 ⓒ 이상기

하천 옆으로 난 길을 따라 10분쯤 올라갔을까? 화염산이라는 표지판이 있는 주차장에 이른다. 이곳에 차를 세우고 안으로 들어가니 베제클릭천불동 입구가 나온다. 표를 끊는데 보니 모든 동굴을 다 볼 수 있는 게 아니고 7~8군데 정해진 곳만 개방을 하고 있다. 베제클릭천불동는 남북조시대 후기인 6세기에 시작되어 고창회골국의 전성기인 9~11세기에 대부분 만들어진 고창국 불교예술의 진수다.

12세기 이후 고창회골국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천불동은 버려졌고, 20세기 들어 고고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이들은 천불동뿐 아니라 고창회골국에 대한 연구를 해 문화와 예술, 건축, 언어와 문자, 사회생활 등에 대한 전모를 밝히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일부 이기적인 고고학자들이 벽화 등 문화유산 상당수를 훼손시키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현재 이곳 천불동에는 83개의 동굴이 남아있고, 그 중 40개에 벽화가 남아 있다.

 훼손된 벽화
훼손된 벽화 ⓒ 이상기

천불동 벽화가 하천에서 산으로 연결되는 절벽에 굴을 파고 그려졌기 때문에, 이들을 보려면 산중턱 입구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가야 한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 하천변에는 옛날 고창회골국 왕궁터가 보인다. 나무 사이로 벽과 지붕 등 남아있는 건축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흙벽돌 집에 둥근 천장을 가진 독특한 형태이다. 우리는 먼저 가까운 동굴로 들어갔다. 불화인 것은 틀림없는데 훼손의 정도가 심하다. 긁히고 뜯기고 파괴되고, 여기서 종교성과 예술성을 찾기는 어렵다.

그나마 훼손된 모습이라도 사진에 담아보려고 하지만 사진을 못 찍게 제재를 한다. 그래도 눈치를 보아가며 몇 장 기록을 남겼지만 아쉬움이 많다. 더욱이 연구와 조사라는 이름으로 벽화를 뜯고 훼손시킨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 이들 벽화 중 일부는 영국과 독일 그리고 일본의 박물관에 가 있고, 일부는 옮기는 중 사막에서 바람과 함께 공중으로 사라지기도 했다고 한다. 또 일본으로 가다 잠깐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보관되던 것이 해방과 함께 그대로 남아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베제클릭천불동 벽화가 몇 점 남아있기도 하다.

 베제클릭천불동
베제클릭천불동 ⓒ 이상기


이곳 베제클릭천불동은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내부를 천천히 여유있게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 굴 안은 시원해 더위를 피하는 효과도 있다. 그러고 보니 옛날 사람들이 이처럼 석굴사원을 만든 이유가 몇 가지 있는 것 같다. 첫째가 스님들이 좀 더 좋은 조건에서 수행을 하고 참선을 하려는 것이다. 둘째가 이곳을 찾는 사부대중이 좀 더 편안하게 예불을 드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셋째가 스님과 대중들이 편안히 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서유기> 세트장에서 삼장법사 일행을 만나다

베제클릭천불동을 보고 나오는 길에 우리는 영화 <서유기> 세트장에 잠깐 들렀다. 영화를 찍기 위해 만든 것으로 조금은 현대적이고 임시방편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옛날 불경을 구하러 가는 삼장법사의 모습을 현장에서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곳에는 7세기 고창회골국의 모습이 사원과 왕궁의 형태로 재현되어 있다.

 <서유기> 세트장
<서유기> 세트장 ⓒ 이상기

여기서 중심이 되는 건축물은 역시 베제클릭천불동이다. 벽에 얕게 굴을 파고 그 안에 부처님을 한 분씩 안치했으며, 벽화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굴의 끝에는 결가부좌하고 앉아 있는 삼장법사가 보인다. 까불이 손오공은 화염 위에 올라가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 삼장법사가 주문을 외워 까불지 못하도록 한 모양이다. 법사 앞에는 저팔계와 사오정이 호위하고, 그 옆에는 법사가 타고 다니는 말이 서 있다.

<서유기>에 따르면, 삼장법사 일행은 서역으로 가기 위해 이곳 화염산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화염산 주변이 불길에 싸여 지나갈 수가 없다. 이웃 농가에 들러 지나갈 수 있는 방법을 묻자 나찰녀(羅刹女)가 가지고 있는 파초선(芭蕉扇)으로 불을 꺼야한다는 것이다. 손오공은 파초선을 구하기 위해 나찰녀를 찾아가며, 재주겨루기 끝에 파초선을 빼앗는다.

 삼장법사 일행과 화염산
삼장법사 일행과 화염산 ⓒ 이상기

그러나 나찰녀는 그녀의 남편인 우마왕(牛魔王)에게 도움을 청하고, 우마왕의 술수에 손오공은 파초선을 다시 빼앗긴다. 이후 손오공과 우마왕의 한바탕 힘겨루기가 이어진다. 둘의 싸움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온 천지가 흔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이천왕이 나타나 손오공을 도와 우마왕의 목을 벤다. 이에 나찰녀는 파초선을 손오공에게 넘겨주고, 손오공은 그것으로 화염산의 불을 끈다. 그리고 삼장법사 일행은 서쪽으로 다시 발길을 옮긴다.

우리도 손오공을 따라 서남쪽으로 향한다. 그곳에 삼장법사가 들른 고창고성이 있기 때문이다. 고창고성은 화염산 주변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목도구 하천변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다. 투르판에서 동남쪽으로 40㎞ 떨어져 있다. 고창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인 기록은 기원전 104년 한나라 무제 때 나온다. 그러나 고창성에 대한 기록은 기원후 443년 북양(北凉)시대에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1500년 역사를 거슬러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쿠무타크사막#누란왕국#화염산#베제클릭천불동#삼장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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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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