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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책 겉그림.
 사진책 겉그림.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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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ilippe Halsman, <Portraits>(McGraw-Hill Book Company,1983)

한국 남자축구를 이끌던 이들 가운데 네덜란드사람이 여럿 있습니다. 이들 네덜란드사람은 네덜란드말을 하는 사람들이요, 한국에는 네덜란드말을 가르치는 대학교가 있습니다. 아시아에 꼭 하나만 있다는 '네덜란드말 학과'가 우리 나라에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남자축구 대표를 맡는 이들 이름을 한글로 적을 때에는 '네덜란드말 소리값'에 따라 적지 않았습니다. '관행'이라는 핑계를 대며 엉터리로 가리키는 '영어 소리값'에 따라 적었습니다. 이를테면, '베어벡(Verbeek)'이라고 하는 축구감독 이름은 처음에는 '페르베이크'라고 제대로 읽었으나(좀더 제대로 읽으면 '페르베이끄'임), 외려 나중에 '베어벡'이라는 엉터리 소리값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네덜란드 축구선수였던 '레이카르트(Rijkaard)'를 두고 처음에는 '리카르도'라고 잘못 말했습니다만, 나중에 '레이카르트'로 바로잡습니다. 네덜란드말에서 'ij'는 'ei'로 읽는데, 네덜란드에서는 네덜란드말을 쓰는 줄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알려고조차 하지 않던 예전 사람들은 'ij'를 그냥 'i'로 읽고 'j'는 슬쩍 흘려넘겼습니다.

좀더 살피면, 아직도 '반 고흐(Van Gogh)'로 잘못 읽는 그림쟁이 이름은 '판 호흐'로 적어야 올바릅니다. 이분 이름 또한 관행이라는 말마디로 그대로 적바림해 놓고 있습니다. '북경'을 '베이징'으로 고쳐쓰도록 하고, '이등박문'을 '이토 히로부미'로 고쳐쓰도록 하며, '동경' 아닌 '도쿄'로 고쳐쓰라 하면서, 우리가 자주 듣고 읽고 말하고 써야 하는 이름들을 옳게 가다듬지 않습니다.

뜻있는 몇몇 분들은 이원수 님 시에 가락을 붙인 <고향의 봄>을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고쳐서 부릅니다. 이원수 님은 사람들이 워낙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에 익숙해 있어 바로잡을 수 없어 안타깝다고 말씀했지만, 미처 깨닫지 못하여 잘못 쓴 말마디는 꼭 바로잡아야 합니다.

나이든 사람한테는 '잘못 써 오던 말마디가 말버릇으로 굳어' 있다 하지만, 나어린 사람이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한테는 '잘못 쓰는 말마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부터 옳고 바르게 말하고 생각해야 할 노릇이요, 이 땅에서 새롭게 살아갈 우리 뒷사람한테 옳고 바른 넋과 말과 삶을 물려줄 노릇입니다.

지난 2008년에 <덴 하흐>란 이름을 단 책이 하나 나왔습니다. 저는 이 책을 보며 아주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들이 '관행'이라는 핑계를 대며 엉터리로 쓰는 이름을 스스럼없이 털어내고 책이름을 붙였기 때문입니다. 설마 싶어 인터넷 찾기창에 '덴 하흐'를 넣어 보는데, 뜻밖에 꽤 많은 자료가 뜹니다. 아무래도 '덴 하흐(Den Haag)'보다는 '헤이그(The Hague)'라는 이름이 훨씬 널려 알려져 있습니다만, 네덜란드 마을이름은 '헤이그'가 아닌 '덴 하흐'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서울'이 있지 '셰울'이 있지 않듯, 네덜란드에는 '헤이그'가 아닌 '덴 하흐'가 있어요.

필립 할스만 님 사진과 비평글.
 필립 할스만 님 사진과 비평글.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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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잖은 사람들은, 아니 거의 모든 사람들은 '김치'보다 '기무치'라는 말이 온누리에 아주 널리 퍼져 있는 모습을 몹시 싫어합니다. 우리 먹을거리 이름이 엉터리로 알려지는 모습을 바로잡으려고 무던히 애씁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나라밖 마을이름이든 사람이름이든 무슨무슨 이름이든 옳고 바르며 알맞게 쓰는 데에는 애를 쓰지 않습니다. 으레 '관행'을 들이밉니다. 우리들은 이웃나라 사람들 이름 하나조차 알뜰살뜰 추스르지 않는 가운데, 우리 이름만 알뜰살뜰 추스르라고 이웃나라 사람을 다그치는 꼴입니다.

이본 할스만(Yvonne Halsman), 또는 이본느 할스만이라 할 분이 엮은 사진책 <Portraits>를 보면서 책에 담은 사진을 읽는 일보다, 이이와 이이 옆지기 이름을 한글로 어떻게 적어야 좋을까 하고 생각하는 일에 더 마음을 쓰고야 맙니다. 사진쟁이 'Philippe Halsman' 님은 '필립 할스먼'일까요, '필립 할스만'일까요, '필리페 할스만'일까요? 라트비아사람인 이이 이름을 어떻게 적어야 올바르고 알맞게 적었다 할 만할까요? 라트비아사람이지만 미국에서 살아가며 사진을 찍었으니 미국사람 말투에 따라 이름을 일컬어야 될는지요?

속 사진.
 속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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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 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책끝에 붙인 글.
 앤디 워홀 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책끝에 붙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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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필립 할스만 님이든 필리페 할스만 님이든, 이분이 내놓은 사진책 이름이 어떠하며 어느 해에 나왔는지조차 잘못 적어서 엉터리로 퍼뜨리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할스만 님은 모두 여섯 가지 사진책을 내놓고 숨을 거두었으며(1906∼1979), 당신이 내놓은 사진책 이름은 <The Frenchman>(1949), <Piccoli : A Fairy Tale>(1953), <Dali's Mustache>(1954), <Philippe Halsman's Jumpbook>(1959), <Philippe Halsman on the Creation of Photographic Ideas>(1961), <Sight and Insight>(1972)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우리 나라는 나라밖 사람이나 마을 이름이 어떠한가를 한글로 적는 '외국어 적기법'이 제대로 서 있지 않습니다. 이와 함께 맞춤법과 띄어쓰기 또한 아직 뒤죽박죽입니다. 새로 빚는 토박이말을 붙이느냐 띄느냐 국어사전에 올리느냐 마느냐를 놓고 꽤나 갈팡질팡입니다.

우리가 살피고 곱씹으며 살찌울 대목이란 우리 삶과 넋과 말이지만, 말을 어떻게 적바림해야 맞느냐 틀리느냐를 놓고 툭탁질만 하고 있는 노릇입니다. 이러는 가운데 필립 할스만이든 필리페 할스만이든 하는 분이 일군 사진삶을 사진책 하나로 알뜰히 담거나 엮어 내놓은 일은 아직까지 없습니다. 앞으로 이분 사진책이 (미국이나 일본에서) 새로 다시 나올 수 있으면, 한글판이 아닌 영어판이나 일본말판으로 사들여서 볼 수는 있겠지요. 그렇지만 한국땅에서 내로라하는 출판사이든 사진 문화를 갈고닦는다는 출판사이든, 아니면 나라에서 몸소 돈과 품과 손길을 바쳐 사진밭을 일구겠다고 나선다 하든, <달리 콧수염>이나 <뜀박질> 사진책을 옹글게 엮어 사랑스레 내놓을 수 있을는지 없을는지 궁금합니다.

속 사진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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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사진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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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에 이름난 으젠느 앗제이든 유진 스미스이든 스티글리츠이든 기무라 이헤이이든 아무개이든, 이런저런 이들 사진책을 한국에서 제대로 옮겨 내는 일이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에두아르 부바(Edouard Boubat) 님이 찍은 사진에 미셀 투르니에가 글을 붙인 <뒷모습(Vues de dos)> 같은 사진책이 어쩌다 한 번 옮겨지기는 하지만, 이 사진책을 옮긴 한국 출판사는 <뒷모습> 겉사진을 '옷 벗은 아가씨 뒷모습' 사진으로 갈아치워 내놓았습니다.

프랑스에서 나온 <Vues de dos>는 발레하는 아가씨 뒷모습이었습니다. 한국 출판사에서 <뒷모습> 겉사진을 '옷 벗은 아가씨 뒷모습'으로 갈아치운 뜻이란 어렵잖이 헤아릴 수 있겠지요. 우리네 책마을 눈높이는 아직 이만하며, 책마을뿐 아니라 책을 사서 읽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들 눈높이는 여태껏 이 테두리에서 맴돕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사진책 <Portraits>를 이야기하기에는 무척 섣부르거나 때이른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필립 할스만 님이 일군 사진을 당신 옆지기 이본 할스만 님하고 두 딸아이가 함께 엮어 내놓은 <Portraits>라는 사진책에 무슨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가를 읽어내면서, 우리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우리 사진밭을 어떻게 일구면 아름다울까를 나누기란 참으로 팍팍하며 어려운 노릇이 아니랴 싶습니다. 어쩌면 머나먼 앞날까지도 우리들은 필립 할스만 님 사진밭과 사진마음과 사진삶을 이분 사진책을 들여다보면서 찬찬히 살필 수 없을는지 모릅니다.

속 사진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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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님 콧수염 사진.
 달리 님 콧수염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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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할스만일까 하고 묻기 어렵습니다. 왜 할스만 사진일까 하고 여쭙기 힘듭니다. 필립 할스만 님이 숨을 거둔 다음 당신 옆지기와 아이들이 엮은 사진책 <Portraits> 첫 번째 사진을 왜 아인슈타인 얼굴로 했는지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책끝에 필립 할스만 님이 당신 사진을 놓고 적은 글을 붙인 까닭을 헤아리기 힘듭니다. 필립 할스만 님이 얼마나 잘난 사람이었는지를, 또는 못난 사람이었는지를, 당신이 즐기던 사진이란 어떤 삶 어떤 꿈 어떤 빛이 스민 생각자락이었는지를 고운 말마디로 주고받기 어렵습니다. 아니, 무엇보다 <Portraits>라는 사진책을 본 적이 있는가요 하고 여쭙기 힘듭니다. <Portraits>이든 <The Frenchman>이든 <Piccoli : A Fairy Tale>이든 <Dali's Mustache>이든 <Philippe Halsman's Jumpbook>이든 <Philippe Halsman on the Creation of Photographic Ideas>이든 <Sight and Insight>이든 뭐라도 하나 본 사람이 있어야 필립 할스만 님 사진 이야기를 펼칠 수 있습니다. 필립 할스만 님 사진책 하나 찾아내어 장만하려고 땀을 쏟고 돈을 바치는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세계 사진 역사에 이름을 남긴 놀라운 사람'이 아닌 '사진을 아끼고 사랑하며 즐긴 사람' 삶·꿈·빛을 웃고 울면서 나눌 수 있습니다.

속 사진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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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스만 님과 식구들.
 홀스만 님과 식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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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스만 님 사진이 겉장에 나온 <라이프> 잡지를 뒤로 한 모습.
 홀스만 님 사진이 겉장에 나온 <라이프> 잡지를 뒤로 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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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2010)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2007∼2010)



태그:#사진책, #사진읽기, #책읽기, #삶읽기, #사진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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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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