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은 유별나다. 연일 푹푹 찌는 더위, 거기다 열대야가 있는 날이 예년에 비해 훨씬 많은 것 같다. 장마가 끝난 뒤에도 숨바꼭질하듯 곳곳에 많은 비를 뿌리고 있다. 언제나 더위가 물러가려나?
그래도 가을은 소리 소문 없이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다. 입추 지나 처서를 앞두고 가을의 전령사라는 풀벌레들의 청아한 목소리가 들린다.
온갖 심술을 부린 여름이지만, 꼬리 내릴 날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하니 아쉽기도 하다. 여름이 다 가기 전에 땀을 흠뻑 흘려 유명한 산의 산길을 적시고 싶다.
은선폭포를 거쳐 관음봉...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대전에 볼일이 있어 내려가려는데, 등산 전문가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동료 한 분이 반가운 제의를 해왔다.
"저희 대전에 내려왔어요. 일 끝나시면 저희랑 산행 어때요? 몇이서 편을 짜 계룡산에 오르기로 했는데, 이곳에 올 때 등산화나 챙겨 오시죠!"
"계룡산은 꼭 오르고 싶었는데, 그거 좋은데요. 근데 높고 험하지 않나요?"
평소 내 산행실력이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며 걱정하지 말란다.
일을 마치고 먼저 도착한 일행들과 만났다. 휴대폰이 있어 약속하고 만나는 게 편하다. 참 좋은 세상이다.
우리는 이른 점심을 먹고 동학사로 향한다. 공주 동학사를 여러 번 다녀갔지만 계룡산 등반은 처음이라 내심 기대가 된다.
계룡산 지도를 펼쳐들고 산악대장이 코스를 잡는다.
"국립공원 계룡산에 왔으니 산행다운 묘미는 느끼고 가야죠? 관음봉을 밟고선 자연성릉을 타는 코스가 아주 좋아요. 그리고 삼불봉에서 계룡산 산하를 보고, 남매탑 쪽으로 내려와 동학사 구경을 해보자고요."
좀 수월한 코스를 타자는 내 말에 일행들은 입을 모은다.
"산악대장이 제시한 코스는 생각보다 힘들지 않아요. 여기까지 와서 겉만 훑고 가면 후회스럽죠!"
코스를 정하고, 산악대장이 늠름한 모습으로 앞장선다. 배낭에는 얼린 물이며, 막걸리 몇 병과 안주로는 가게에서 주문한 파전과 도토리묵을 포장해 짊어진다.
모두 씩씩한 발걸음이다. 다들 불혹을 넘긴 나이지만 젊음이 느껴진다. 동학사 오르는 길이 고즈넉하다. 간밤에 내린 소나기 때문인지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가 거칠다. 시원한 물소리에 바람까지 살랑살랑 불어주니 출발부터 상쾌하다. 악다구니를 쓰며 울어대는 매미가 우리를 반긴다.
동학사를 벗어나자 평평한 돌을 깔아 등산로를 잘 닦아놓았다. 그러고 보면 계룡산 등산로는 돌길의 연속이다. 돌길을 걷기가 처음엔 힘든 줄 몰랐는데 가파른 고개를 넘고, 돌계단을 걸을 땐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딱딱한 돌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천근만근 무거워진 몸이 반항을 한다. 금세 숨이 턱에 차오르고, 땀은 온몸을 흥건히 적신다. 흙길을 걷는 게 얼마나 편안한가를 새삼 느낀다.
우리는 너른 바위 하나 골라 걸터앉아 숨을 고른다. 하늘을 한번 쳐다본다. 맑게 갠 하늘이 어제 소나기구름의 하늘과는 딴판이다. 한줄기 바람에 얼굴을 내미니 마음까지 시원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웅장한 은선폭포가 우리를 반긴다. 깎아지른 절벽에서 엄청난 물줄기가 사정없이 쏟아져 내린다. 우렁찬 큰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다. 은선폭포는 갈수기 때는 폭포로서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운이 좋은 걸까. 녹음과 조화를 이룬 힘찬 폭포수가 그야말로 장관이다. 세상의 온갖 근심을 죄다 저 폭포수에 씻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원한 물줄기가 지친 발걸음에 힘을 불어넣어준다. 관음봉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돌길의 깔딱고개가 장난이 아니다. 여느 산이든 정상을 앞두고 깔닥고개는 있기 마련이지만 이곳은 좀 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모르게 거친 황소 숨소리를 낸다. 아무 생각이 없다. 그냥 무의식적으로 힘든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자꾸 뒤쳐지는 날 보고, 산악대장이 큰 목소리로 외친다.
"자, 빨리요. 관음봉 정자가 보이네요. 이제 정상입니다. 어서 시원한 막걸리나 한 잔 합시다."
숨이 턱에 닿을 즈음, 정상이 코앞이라는 소리에 힘이 솟는다.
해발 816m의 관음봉. 국립공원 계룡산에서 입산통제가 되는 최고봉 천황봉과 쌀개봉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이다. 정상 표지석이 있는 관음봉에 올라서니 능선마다 봉우리마다 한여름 짙은 녹음의 바다가 펼쳐진다. 관세음보살을 닮았다하여 관음봉이라고 하는가? 관음봉 산세가 후덕하고 자비로운 느낌이 든다. 육각정자에 걸터앉아 숨을 고르니 세상을 다 얻은 느낌이다.
일행들이 준비한 막걸리 한 잔을 단숨에 들이킨다. 지금까지 올라오며 힘들었던 모든 것들을 시원한 막걸리가 한방에 날려 보내는 것 같다. 도토리묵과 파전 안주가 허기를 달래준다.
관음봉에서 삼불봉까지... 계룡산 산행의 백미
한참을 쉬고, 산악대장이 다음 코스를 안내한다.
"이제부터가 계룡산 산행의 백미를 느낄 수 있는 코스입니다. 자연성릉을 따라 삼불봉까지는 힘들어도 힘든 줄을 모르고 갈 수 있죠. 다시 신발 끈을 단단히 묶자고요."
관음봉에서부터 삼불봉까지는 자연성릉을 따라간다. 자연이 빚어낸 암벽이 마치 성곽을 이룬 것 같다. 그래서 자연성릉이라 부르지 않았나 싶다. 자연이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성곽을 쌓았을까? 계속되는 능선은 좁고, 능선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하다. 튼튼한 난간과 사다리 계단이 있어 다행이다. 아기자기한 자연암벽을 걷는 기분이 스릴 만점이다.
기기묘묘한 바위능선에 제멋대로 휘어진 키 작은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또, 바위틈에 홀로 자란 소나무가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게 신비스럽다. 모진 비바람을 겪으면서 한껏 멋을 부린 노송의 아름다움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때 묻지 않은 푸른 자태가 싱싱하다. 인간이 억지로 만들어낼 수 없는 자연의 작품 앞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삼불봉 가는 길은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을 즐기느라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 그런데 '바로 코앞에 있는 봉우리가 삼불봉 정상이겠거니'하고 올라보면 산은 또 가로막고 있다.
"그러니까 삼불봉은 봉우리 세 개를 지나야 정상인가 보네!"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된다. 내리막길이 편하다 싶으면 다시 오르막이다. 다리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그래도 삼불봉 정상에 다다랐다. 해발 775m의 삼불봉 정상에서는 계룡산 전체가 조망된다. 멀리 안테나가 서 있는 게 계룡산 주봉인 천황봉이고, 오른쪽으로 차례대로 쌀개봉, 관음봉, 문필봉, 연천봉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삼불봉은 암봉이 세 명의 부처님을 닮았다고 하여 삼불봉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니 아득하다. 어떻게 힘들게 걸어왔는가 싶다.
이곳 삼불봉에서 겨울철 눈꽃이 핀 계룡산을 바라보면 신천지가 펼쳐진다는 정상에서 만난 등산객 얘기에 우리 일행은 겨울등반을 계획해본다.
산악대장의 목소리에 기쁨이 실려 있다.
"막걸리가 두 병 남았네요. 한 잔씩 하고 이제 하산하자고요! 내려가면서 상원암 남매탑을 보고가면 계룡산 산행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될 것입니다."
다섯 시간 가까운 산행이다. 땀범벅이 되어 오른 돌길의 계룡산 등반이 가는 여름을 멋지게 장식한 것 같다. 한사코 뒤쳐져 따라간 나를 격려하며 이끌어준 일행들이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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