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편에 삼만 원이면/너무 박하다 싶다가도/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국밥이 한 그릇인데/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줄 수 있을까/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박리다 싶다가도/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함민복 시, '긍적적인 밥')함민복의 시 <긍정적인 밥>에서 곤궁한 시인의 삶을 엿볼 수 있듯이 시는 돈이 안 된다. 많이 안 된다. 그래서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시를 버린다. 서점가에도 버젓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책은 자기계발서, 처세서 등 다른 부류의 책이다.
박완서의 중매(?)로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1·2>(정끝별·문태준 해설)를 만났다. 그동안 시를 내게서 너무 멀리 두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서재를 살펴보니 시집은 몇 권 되지도 않는다. 저만치 밀쳐두고 가끔 생각날 때 뒤적거렸다. 시를 내가 멀리하고 있었으니 시도 나를 멀리했다. 가끔 시를 읽다가 시어에서 영감을 얻을 때가 있다. 박완서 작가 역시 "글을 쓰다가 막힐 때 머리도 쉴 겸해서 시를 읽는다"고 "좋은 시를 만나면 막힌 말꼬리가 거짓말처럼 풀릴 때가 있다"고 한다.
"... 다 된 문장이 꼭 들어가야 할 한마디 말을 못 찾아 어색하거나 비어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도 시를 읽는다. 단어 하나를 꿔오기 위해, 또는 슬쩍 베끼기 위해, 시집은 이렇듯 나에게 좋은 말의 보고다.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 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 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린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p216.<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중)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1·2>는 신문에 연재됐던 것을 한데 모은 것으로 시인 정끝별과 문태준 등을 통해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100명이 각자 10편씩 추천받은 시인 156명의 작품 429편을 다수 추천 순으로 100편을 선정한 것이라 한다.
김수영의 시 <풀>, 한용운의 <님의 침묵>, 백석의 <남신의주유동 박시봉방>, 김소월의 <진달래꽃>, 김춘수의 <꽃>, 박목월의 <나그네> 등이 추천횟수 베스트 10위에 올랐고 작가별로는 서정주, 김수영이었다 한다.
애송시 100편 중에는 학창시절 우리가 즐겨 외웠고 편지 속에 인용하기도 했던 시들을 다시 만나는 기쁨도 있고 미처 알지 못했던 시인들의 시어들을 만나는 기쁨도 있다. 주옥 같은 애송시를 정끝별과 문태준의 해설을 겸하고 있는 데다가 일러스트의 그림까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눈에 띄어 마치 연애편지라도 읽듯 설렌다. 언제라도 시집을 펼쳐보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누구나 애송했을 김춘수의 시 <꽃>, 뭇 남성들이 연애편지에 빌렸을 오규원의 <한 잎의 여자>. 그런데 해설에서 보니 시인 오규원은 보통 사람이 호흡하는 산소의 20퍼센트 밖에 호흡하지 못하는 만성폐쇄성질환을 앓다가 2007년 겨울에 타계했다고 한다. 임종 직전 그는 '한적한 오후다/불타는 오후다/더 잃을 것 없는 오후다/나는 나무속에 자 본다'라는 마지막 문장을 손가락으로 제자 손바닥에 써서 남겼다고 한다. 가슴이 저릿해온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로 시작되는 기형도 시인의 <빈집>. 시도 시이지만 시인의 짧고 불행했던 삶에 마음 간다. 이 시는 기형도의 마지막 시란다. 이제 막 피어나려는 스물아홉의 나이에 삼류 심야극장의 후미진 객석에서 죽음을 홀로 맞았다 한다. 예전엔 그 누구나 달달 외웠고 즐겨 암송했던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박인환은 이 시를 발표 후 5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시인 이상을 추모하며 연일 계속된 과음이 원인이었다.
젊은 날에 요절한 박인환의 시어 가운데 나오는 버지니아 울프는 세계대전 한 가운데서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템스 강에 뛰어들었다. 유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한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 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천상병 시인, 중학생 때 길에서 주운 한하운 시집을 읽고 시인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고은 시인... 주옥같은 시 100편과 해설까지 겸해있어 좋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를 어려워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에서 모티머 J.애들러는 시는 어렵다고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일단 읽으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내어 무조건 읽을 것과 반복해서 읽을 것을 권했다. 시와 더불어 시인들의 사연 사연을 또한 알 수 있어 좋어 좋은 애송시 100편을 담은 시집을 책상에 앉으면 바로 눈 앞에 보이는 데다 두었다. 자주 들여다봐야지.
가을이다. 한낮에는 찜통더위지만 조석으로 부는 바람이 가을이라고 속삭인다. 어둠이 깃들면서 풀숲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도 가을이라 속삭인다. 시를 읽으면서 마음은 시에 젖어든다. 올 가을엔 시를 품어보자. 시에 푹 적셔보자. 가난한 시인들이 생애를 다해 노래한 시의 이름을 불러 시를 꽃피게 하자.
덧붙이는 글 | 시집:<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1.2>
해설: 정끝별. 문태준
그림:권신아. 잠 산
가격: 각 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