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일제고사가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이 아이들의 등수를 매기고 학교의 등위를 나타낸다고 해서 해가 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학력의 격차를 파악하고 미진한 곳에 지원하겠다고 하지 않던가. 학교에서 시험보는 학생들에게 답을 가르쳐주고 답안지 채점을 조작하는 것도 쓸데없는 짓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어느 정도의 위치에서 서 있다'라는 훌륭한 정보를 주는 시험이니 모두가 최선을 다해서 시험에 임하면 좀 더 객관적인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그런데 왜 학생들의 '선택권'이라는 자유의 가치를 가르친 선생들과 교장이 파면을 당하는 걸까? 왜들 저러는 것일까. 시험을 보지 말라고 보이콧을 단체로 감행한 것도 아니고 시험을 보지 않을 사람은 보지 않아도 좋다는 안내를 한 것 뿐인데. 그리고 시험보지 않는 아이들을 위해 대체현장학습을 지도한 것이 그리 큰 죄란 말인가. 분명히 감정이 실려 아이를 죽도록 패거나 성추행한 교사들은 전직, 감봉인데 성실하고 착한 선생들이 파면이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학생들의 대체학습에 결석처리를 강행하려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혹시 시험의 객관성에 작은 흠집이 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 시험과 평가에 길들여져야 할 학생들에게 저항의 씨앗을 심는 불온한 세력이라 여기셨나. 결국 그 시험 때문에 밤늦게까지 초등학교에선 문제풀이가 행해진다는 사실엔 감격의 눈물을 흘리시려나.
난 요즘 아이들이 내 어릴 적의 딱지치기, 팽이싸움, '짬뽕(공을 손으로 치는 것 외에 야구와 같은 룰의 게임)', '오징어(오징어 모양의 틀에서 공격과 수비로 팀을 나누어 점수 많이 내는 팀이 승리) ', 얼음땡 등의 경쟁(?) 단체놀이를 하며 어울려 뛰어놀지 못하는 것이 가슴 시리도록 짠하다. 또 웬만한 어른보다 더한 지독한 스케줄에 학원들 사이로 이동하고 나서 저녁에 집 침대위에 쓰러지거나, 책상위에 앉아 벌겋게 충열된 눈으로 상대방을 썰거나 찌르거나 터뜨리거나 쏴서 죽이는 게임에 열중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일류대학 위해 머리 싸매고 달달 외우는 것이 학생의 본분일까
그래도, 국가가 이만큼 발전한 덕택에 오늘날 돈이 없거나 부모가 없거나 할일이 많아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가 없다는 점은 큰 혜택이다. 누구나 글을 읽을 수 있고 잘하면 외국어도 배울 수 있고 더 잘하면 수백명이 부러워하는 '우등생'이 될 기회를 동등하게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 기회를 활용해서 선두권의 대학까지 입학하면 그때부터 좋은 직장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넓어지게 된다.
찬란한 내 미래를 위해 한번 12년만, 아니 스펙을 준비해야 하니 16년만 앞만 보고 죽어라 뛰면 되겠다. 정말, 될까? 그래, 내가 해봤다. 그리고 왜 그리 할일 많고 즐겁게 공부할 수 있는 젊음을 교과서에 허비했던가 하는 자괴감만 남았다. 자식은 그냥두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렇다고 학교다니고 공부하겠다는 아이를 패서 말리겠다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교육목표는 무엇인가. 대국의 대통령 오바마가 침이 마르게 칭찬하던 교육시스템의 지향이 결국 '경쟁' 뿐이었나. 이미 정해진 몇 자리(일류대학)를 위해 죽어라 되지도 않는 머리 싸매고 교과서와 참고서를 달달 외는 것이 학생의 본분인가.
결국 소수를 위해 다수는 패배감과 자괴감을 맛보는 것이 훌륭한 공부가 되는 곳이 학교인가. 가야한다. 갈 수 있다. 주문과 노력만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을 위해, 수백만의 아이들이 들러리를 꼭 서주어야만 직성이 풀리는가.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건강한 학생은 공부 안하고 놀기만하는 문제아로 취급받고 백옥같은 피부와 도수가 진한 안경을 쓴, 사회부적응자의 모습을 한 '시험기계'가 한국 어린이, 청소년들의 롤모델인가.
스카이를 들어간다고 해서 핑크빛 미래가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안다. 거기에 부모의 재력, 인맥이 겸비되어야만 비로소 한국에서 '먹고살만한' 중산층에 진입할 기회를 가진다. 그중 하나라도 모자라면 '빈민'으로 살 것에 대한 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다들 그 정도는 알면서 공부를 할 것이다. 아니, 조건이 되지 않아도 개천에서 용난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곧이 곧대로 듣는 순진한 청년들도 있다. 결국 등록금 못 내고 빛에 시달리다 꽃다운 대학생시절을 조명도 화려한 큰강다리 아래로 몸을 던지는 것으로 마감했다 한다. 그렇다고 그의 부모에게 공양미 삼백석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난 어떡하지. 고민한다. 나 역시 입시를 겪었다. 힘들었다. 그것이 그렇게 삶의 자산으로 남았다. '그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로. 앞으로 학교는 더 할 것인데 내 자식을 지옥같은 곳에 억지로 밀어 넣을 수는 없다. 얼마전 뉴스를 통해 경험한 "엄마, 이제 됐어?"라는 유서의 섬뜩함이 지금 글을 쓰는 내 가슴을 떨게 만든다. 하지만 '대세' 또는 시대의 흐름을 혼자 거스르는 일은 엄청난 두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일이다. 누가 나 좀 잡아주었으면 좋겠다. 아니, 함께 걸었으면 좋겠다.
자기를 찾을 수 있도록 돕고, 삶을 꽃 피울 수 있도록 돕는 게 교육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학교에 기대를 걸지 않을 것입니다. 학교가 바뀌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만큼 우리는 학교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환경을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우리 자신이 곧 길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잘 닦여져 열려 있는 그런 길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힘을 모아 열어 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자기를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래서 삶을 꽃 피울 수 있도록 돕는 것이야 말로 교육의 본질임을 잊지 않는 한 우리는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진정한 교육을 시작할 때입니다. -책중, 교육 잡지 '민들레' 창간사
다행히 동지들이 터전을 닦고 있다. 그곳에 동참하거나 동참하고자 하는 동지들을 모아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마을이 학교다>(박원순 저, 검둥소 펴냄)는 소셜디자이너로 명함을 바꾼 박원순의 '대안교육'에 관한 참고서다. 학교 밖에서 이루어지는 배움터. 학교밖의 학교들. 의무교육의 전당 초등학교안에서 이루어지는 실험 '작은 학교'. 각 지방의 교육공동체들과 새로운 교육모델을 제시하는 연구, 실천모임 등을 나누어 소개한다.
반세기를 훌쩍 넘긴 역사를 자랑하는 대안학교의 효시, 홍성의 풀무농업기술고등학교와 도심의 대안학교인 성장학교 '별', 성미산학교, 이우학교, 하자센터, 아힘나평화학교 등의 사례를 소개한다. 역사와 운영방법, 현재와 미래를 듣고 한국 대안교육의 현주소를 알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이들의 공통점을 찾았다. 바로 체험하는 현장교육.
밥을 먹기 위해 꼭 필요한 작업인 농사짓기. 앞으로 세대에 닥칠 재난을 막아줄 인간들의 필수 교양인 생태학. 생각하고 생각을 나누기에 관한 수업은 필수다. 수학은 시장에 가서 돈을 주고받으며 하고 작은 사업을 직접 운영해서 경제를 배운다. 학생과 교사가 둥글게 앉아서 서로의 느낌과 생각을 나누고 이를 자유롭게 비판하고 토론한다. 이들에겐 입시와 경쟁은 책상 한구석에 접혀있다. 음악과 미술은 경연대회가 아닌 창작활동으로서 이루어진다. 연극을 기획하고 공연하는 과정까지 관계와 소통에 관한 배움이 인상적이다.
공교육의 변신도 있다.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의 '작은 학교'들의 교육개혁사례를 소개하면서 공통적 화두는 교장공모제와 교사추천제이다. 교장공모제가 말도 많고 기껏 교육비리 근절책으로 제시되어 별로 인기를 끌고 있지 못하지만 최근 성장세를 타고 있는 작은학교의 '살아있는 체험교육'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파악하고 있다. 재직 5년이면 다른 학교으로 옮겨야 하는 문제가 '시스템 유지'의 가장 큰 장애이기 때문이다.
이때 교장공모제가 도움이 된다. 작은 학교에 교장이 자리를 잡고 교사를 데리고 오는 것이다. 지금 일반 학교에 뜻있는 교사 한둘이 들어간다고 해서는 절대 될 수 없는 일도 뜻있는 교장이 원하는 교사들을 모으면 학교 하나를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것. 큰 규모보다 한 학년 한 학급 15인정도의 소규모 학교일수록 유리하고 체험을 위주로 하는 교육과정에도 더 맞는단다.
매스컴을 타서 너무 유명한 남한산초등학교, 이를 재빠르게 따라간 거산초등학교, 완주의 삼우초등학교의 인기는 높아서 매년 신입생을 가려 뽑는 것이 교사들의 '일'이 되어버렸다. 세월초등학교와 송산분교 조현초등학교의 사례를 소개한다. 결국 제도 내에서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교육감의 과감한 인사권행사와 학부모들이 힘을 모아 이루는 교장공모제를 활용하고 교장이 선임한 선생들이 학교를 '장악'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초등교육의 대안모색이 학교 안팎으로 활발한 데 비해 중·고등교육과정의 대안은 아직 초보단계다. 대학입시를 도저히 버릴 수 없는 한국사회의 현실에서 이를 잘라버리지 못하면 자연에서 어울리고 생활에 부딪혀서 깨닫고 토론하고 글을 쓰며 사고하는 '참'교육은 불가능한 것일까.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한다. 교육공동체는 대부분 그렇게 이루어졌다. '풀', '청춘'과 고산 산촌 유학센터, 꿈나무 어린이 도서관, 난골 주민도서관'새숲', 기차길 옆 작은학교는 개인이나 뜻을 함께한 여럿이 민간차원에서 개척한 교육 '틀'이다. 인정받지못하여 제도권에서 지원하는 어떠한 혜택도 받지 못하는 곳들의 운영은 창립자나 후원, 학부모로부터 지원받은 돈으로 이루어진다. 빠듯한 살림이지만 그래도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 도움을 주고 있다는 다짐으로 움직인다.
'공교육은 죽었다'는 끝없는 메아리다. 갈 곳 모르고 주저앉아 우는 이 땅의 수만 명의 탈학교학생들과 수백만 명의 '들러리'들에게 희망은 무엇일까. 사교육이 없으면 공교육을 버텨내지 못하는 지경의 오늘의 학교, 그곳에서 사는 학생들과 변화를 꿈꾸는 학부모들에게 '작은 촛불'이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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