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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4일 오후, 밀라노에 도착했을 때는 해는 기울고 많은 비가 내렸다.

때문에 돌아다니기 어려웠다. 

더구나 배터리가 바닥나는 바람에 디지털 카메라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래도 두오모 성당의 아름다움만은 놓치고 싶지 않아 아내와 함께 빗속에 성당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밀라노 두오모성당  400여년에 걸쳐 완공되었다는 아름다운  성당. 이탈리아인들의 끈기와 치밀한 힘을 보는 것 같았다.
밀라노 두오모성당 400여년에 걸쳐 완공되었다는 아름다운 성당. 이탈리아인들의 끈기와 치밀한 힘을 보는 것 같았다. ⓒ 홍광석

이탈리아의 도시를 돌면서 느낀 소감이 많지만 그 중에서 도시에 광장이 많았다는 사실이었다. 로마의 유적지 주변의 광장, 스페인 광장은 물론 폼페이의 폐허에도 광장은 있었고 피렌체의 시뇨리오광장, 베니스의 산 마르코성당의 광장, 그리고 밀라노의 두오모성당 앞의  광장까지.

 

광장이 갖는 의미는 개인적인 견해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본 광장은 성별, 노소,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시민에게 개방되었던 공간이었다.

그런 공간에서 사람과 부딪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와 배려를 배웠을 것이다.

피렌체의 시뇨리오광장에서 느낀 일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멀리 그리스 광장의 도편추방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광장의 문화가 일찍이 토론을 통하여 민주주의의 싹을 키웠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또 내가 본 광장은 분수와 작은 조각품 아니면 주변의 회랑이라도 갖춘 문화공간이었다.

시뇨리오 광장의 수많은 조각품, 산 마르코 광장 주위의 회랑, 스페인 광장의 분수 등은 광장이 단순히 사람이 모이는 곳만이 아니라 시대의 정신을 반영한 예술품을 전시하는 문화 공간임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가 르네상스의 진원지가 되었던 이유도 광장이라는 공간 즉 광장문화를 배경으로 키워졌던 것이지 우연의 산물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탈리아는 지방 분권이 보장되어 지방은 독자적인 정부만큼 자치를 누린다고 들었다.

이탈리아가 통일되기 전에 수많은 왕국과 공화국으로 나누어 있던 전통 때문이라고 했다.

틀린 생각일지 몰라도 나는 이탈리아의 그런 전통은 역시 각 지역이 갖는 광장의 힘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과거 우리나라는 이탈리아의 광장처럼 백성들이 모여 작품도 내걸고 축제도 하는 광장이 없었다.

장터가 유럽의 광장 기능을 했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장은 상시적인 공간이 아니었고 또 토론의 장이 아니라 상업 목적의 공간이었다는 점에서 유럽의 광장과 비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에게 광장이 없었던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우선 궁색한 변명이긴 하지만 좁은 농토에 많은 인구가 살다보니 그런 광장을 만들 여유가 없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개방적인 광장을 허용할 수 없었던 정치제도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애초에 백성을 '위해 주어야 하는 어린 존재'로 여기는 위민 정치 속에서 백성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수탈에 저항하는 민란을 염려하여 오가작통법으로 백성을 통제했던 정치풍토에서 백성이 자유롭게 모일 수 있는 개방적인 광장은 불편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땅의 지도자들은 광장이라는 공간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는지도 모른다.

덧붙여 우리는 전통적으로 중앙 집권적인 국가였기 때문에 서양처럼 자치적인 큰 도시를 이룰 수 없었던 점도 광장이 없었던 요인이 아닌가 싶다.

 

끝으로 우리에게 광장을 가질 수 없었던 요인으로는 광장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일반 백성들의 길들여진 신민의식을 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설화(舌禍)와 필화(筆禍)가 많았던 시대, 시 한편에도 귀양살이요, 자칫 목숨을 잃었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정치 아닌 세상사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도 목숨을 거는 모험일 수 있다.

 

그런 억압된 정치 구조에서 살아남는 길은 불만을 속으로 삭이며 체념하고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백성들은 광장의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았고 설사 광장이 있다고 한들 모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폼페이 유적의 광장 2000년 전에 벌써 크고 넓은 광장이 있었다는 사실은 자유를 누리는 인간이 살았다는 증거다. 현대 도시에 비해 손색없는 도시를 만들었던 힘도 광장에서 나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폼페이 유적의 광장2000년 전에 벌써 크고 넓은 광장이 있었다는 사실은 자유를 누리는 인간이 살았다는 증거다. 현대 도시에 비해 손색없는 도시를 만들었던 힘도 광장에서 나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홍광석

나는 이탈리아 광장을 보면서 우리의 아름다운 산천을 배경으로 서 있는 누정(樓亭)을 떠 올렸다. 작게는 시골 마을의 정자나무 곁이 있는 초정(草亭)이 있었지만 그보다는 풍광 좋고 바람이 잘 통하는 외진 산천에 선비들의 공간이었던 정자(亭子), 또 아름다운 산천을 조망할 수 있었던 영남루나 평양의 부벽루 같은 누각(樓閣)를 떠올린 것이다.

 

문화인류학이나 건축 등 광장과 누정과 관련된 공부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두 공간을 비교한다는 것은 억지스러울 수 있다. 자칫 누정의 문화는 봉건정치 속에서 우리의 한계를 드러내는 곳이었고 또 현재 우리의 자화상을 드러내는 작업일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계급적인 폐쇄성을 갖는 공간으로 여유 있는 양반들이나 관리들이 배타적인 자기들만의 권익만을 옹호하고 누렸던 누정(樓亭)이 떠오른 까닭은 오늘의 우리 문화 현실과 이탈리아의 문화 현실이 비교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누정이 계급적인 폐쇄성을 갖는 공간이긴 했으나 지배집단이 모여 친목을 도모하거나, 시를 짓는 등의 문예의 장으로 쓰였던 학문과 놀이의 기능을 수행했던 공간이기도 했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누정에는 광장처럼 시민 또는 백성을 위한 문화와 정치가 없었다.

일반 백성들이 알 수 없는 한시를 주룩 걸어놓고 그것으로 백성을 차별했던 권위적인 문화만 있었다. 나쁘게 표현하자면 끼리끼리 모여 놀고 즐겼다는 말이 된다.

 

때문에 누정은 백성들의 현실과 먼 곳에서 백성들의 등이야 휘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았던 이기심만 가득한 곳이었다.

 

그런 점 때문에 나그네는 이탈리아의 광장을 보면서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본 것이다.

전통을 보존하고 시민의 권리는 지키는 서양의 내면을 보지 못한 채 얼치기 근대화를 앞세워 백성을 압박하고 우리의 문화를 파괴했던 과거의 역사가 되돌아봐졌던 것이다.

 

어머니의 삶이 배인 농이며 장독을 아무렇게나 버릴 수 있는 뱃장, 마을길을 넓힌다고 수백 년 된 당산나무를 베어버린 만용, 민족의 전통적인 문화를 미신으로 몰아 싹을 잘라버린 무지…. 그런 역사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고 또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 것인가?   

광장이라는 개념조차 희미했던 나라.

근래에 만들어진 광장도 폐쇄하는 나라,

지시와 명령은 있으되 토론다운 토론이 없는 나라.

국민의 의견을 수렴할 줄 모르는 나라.

국민을 위한다면서 국민의 뜻과 배치되는 자신의 고집을 2백 년 대계라고 우기는 인물이 대통령인 나라. 그러면서 민주주의라고 법과 질서 운운하는 정부가 국민을 억압하는 나라.

있으나마나한 청문회로 스스로 국회의 존재를 부정하는 뒤가 구린 자들이 국회의원이라고 위세 하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광장은 금단의 공간일 뿐이다.

 

이제라도 자유로운 광장을 보고 싶다.

사람이 소통하는 광장, 문화가 있는 광장을 만들었으면 싶다.

현대 작가들의 작품도 좋지만 옛날 조상들이 남긴 유물들도 이제 밖으로 꺼내어 모든 사람들에게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가르쳤으면 싶다.

 

두오모 부근의 세계적인 무대라는 스칼라 극장 내부는 볼 수 없었다.

그곳에도 작은 광장이 있었으나 사람은 없었다.

사람이 없는 광장은 생기가 없다.

서둘러 약속 장소로 돌아오니 다른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겨레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밀라노#두오모성당#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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