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투쟁단은 오후 1시까지 사무실로 집결 해 주세요."
9월 4일 토요일 오후 2시.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정문 앞에서 집회가 열린다고 했습니다. 먹고 살기 바빠 잊고 살았던 이름을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조에서 발행한 소식지를 보고서야 다시 기억했습니다. 류기혁. 그 이름이 마음을 스치면서 5년전 일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2005년 6월경 류기혁은 비정규직 노조에 가입하고 활동에 가담한다는 이유로 업체로부터 일방 해고 통보를 받게 됩니다. 그 후 비정규직 노조 임시 사무실에서 불법파견과 복직 투쟁을 해나갑니다. 그러다 같은 해 9월 4일 부당해고에 대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임시 사무실 옥상에서 굵은 밧줄에 목을 매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그 때 저도 노동부의 현대자동차 불법파견 판정 후 정규직화 하라며 몸벽보를 두르고 1인 시위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함께 출근 투쟁도 하고 선전지도 배포하면서 그와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2남 1녀 중 장남으로 홀어머니와 남동생을 부양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계속 만나면서 그가 보기 드문 순진한 총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노조 가입 후 가해지는 업체 관리자의 해고 위협에 많이 괴로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유도 모른 채 해고 당하고 말았습니다.
"형님, 저기 가서 오뎅 하나 먹어요. 제가 살께요."
그 당시 31살이던 그는 제가 1인 시위를 하고 있으면 퇴근 하다 말고 제 곁에 서서 회사 안에서 일어 났던 일을 모두 말해 주곤 했습니다. 제가 1인 시위를 하고 있으면 곁에서 시위가 끝나기 기다리다가 저에게 가끔 수고 많다며 오뎅을 사주기도 했습니다. 이야기 나눌수록 너무도 순진하고 순수한 면이 많이 보여 한편 걱정스럽기도 했습니다. 저는 한 곳에서만 1인 시위를 하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했기 때문에 자주 만나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목을 맸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저는 한동안 가슴이 먹먹 했습니다. 그리고 참 미안했습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억울한 이야기를 들어 줄 상대가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젊은 나이로 생을 그렇게 억울하게 마감하게 된 것이 마음 아팠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류기혁 가족은 그의 죽음을 조용히 처리하고 싶어 했습니다. 류기혁은 사측의 부당해고를 너무도 억울해 했는데 그의 억울한 부당해고는 그가 가족 품에 넘어 가면서 흐지부지 그렇게 매듭 지어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 상황을 이해 할수 없었습니다.
그 후 5년. 오늘 그가 가신 날을 맞이하여 외롭고 억울하게 죽어간 그의 원혼이라도 위로 하고자 '고 류기혁 노동열사 5주기 추모 문화제'를 현대자동차 정문 앞에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1시간 전에 사무실로 가보니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만장을 40여 개 만들어 들고 서 있기로 했습니다."
누가 수고 했는지 이미 검은 천에다 갖가지 글귀를 새겨 넣어 둔 상태였습니다. 옥상에 대나무도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힘을 합하여 대나무와 만장을 날랐습니다. 정문 앞에서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측에서 폭력을 유발하여 집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지도 모른다고도 했습니다.
저는 2003년부터 2006년까지 불법파견 집회를 하고 1인 시위를 하면서 많이 보았습니다. 사측은 어디서 구했는지 경비복을 입힌 젊은 사람들을 대거 준비 시킵니다. 본관 앞이나 사내에서 집회를 하면 그들은 괜히 시비를 걸어 폭력을 일삼았습니다. 머리가 터져 피가 나 119 구급차에 실려 가기도 했고 갈비뼈가 부러져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습니다.
저도 사측의 경비대에게 심한 몰매를 맞은 적이 있었습니다. 2005년 한창 불법파견 시위를 할 때였습니다. 오후 본관 앞에서 집회를 하는데 저는 그때도 1인 시위 몸벽보를 두른 상태로 옆에 서 있었습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정규직 활동가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만 있어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들은 잠시후 시비를 걸어 왔습니다.
그리고 경비를 시켜 가지고 있던 시위 도구를 마구 때려 부수고 닥치는 대로 폭력을 일삼았습니다. "야, 변창기 조심해"라고 어떤 경비가 말하면서 내 멱살을 잡고 날 엎어지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십수 명이 달려들어 저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다행히도 갈비뼈는 부러지지 않았지만 온 몸이 욱신거렸습니다. 그날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다쳤습니다.
저는 그런 지난 일이 떠올라서 혹시나 오늘도 사측이 그런 도발을 해오지 않을까 내심 겁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저의 괜한 근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와 주셨습니다. 저는 몇 명이나 왔는지 궁금해서 일일이 다 세어 보았습니다. 약 500여명이 그 자리에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인원 수에는 왜 와서 어슬렁 거리는지 모르겠지만 동부 경찰서 정보과에서 나왔다는 경찰 아저씨도 있었고 출입문 너머에 있는 사측 노무관리자와 경비도 포함 했습니다.
만장 재료를 정문 앞으로 가져가 끈으로 묶고 해서 만장을 40여 개 만들었습니다. 오후 1시 30분이 넘으니 사람들이 모여 들기 시작 했습니다. 서울서 관광차를 대절해서 오신 분들도 많았습니다. 울산 북구 출신 조승수 국회의원도 참석 했습니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회당에서도 참석했습니다. 각 지역 노조에서도 오고 비정규직 노조원도 많이 참석했습니다. 그 중에 제 눈에 띄는 분이 있었습니다. 휄체어를 탄 장애인이었는데 서생에서 왔다고만 할 뿐 다른 말은 질문해도 대답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2시. 행사가 진행 되었습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노래패 '한판'이 여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어 민중의례, 열사 약력소개, 추모노래, 추모사, 추모시, 추모굿, 배례로 순서가 진행 되었습니다. 그동안 먹고 살기 바빠 그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의 사진을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2부 순서로 지난 7월 22일 대법원에서 불법파견 판결난 후 급속히 늘어난 조합원이 많았고 새로운 조합원을 위한 순서를 마련 했습니다. 구호와 노동가 배우기가 마련되었고 이어 2005년부터 2010년 대법 판결이 나오기까지 경과 보고를 했으며 대법원 판결부터 조직화 사업까지의 과정에 대해 경과보고를 했습니다. 문화 공연을 했고, 끝으로 민주노총 김주철 울산본부장과 금속노조 이경훈 현대자동차 지부장이 나와서 연대발언을 했습니다. 두분 모두 불법파견 문제가 해결 될 때까지 함께 하겠다고 했습니다. 끝으로 '비정규직 철폐 연대가'라는 노동가를 부르며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류기혁 노동열사의 추모문화제는 끝났습니다.
오늘(9월 4일) 따라 엄청나게 무더웠습니다. 그 뜨거운 날에 뜨거운 추모 문화제 때문인지 날은 더 무덥게 느껴졌지만 거기 모인 사람들은 끝마칠 때까지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거기 모인 모든 분들이 엄숙하게 류기혁 노동열사 영전에 두 번 절을 올렸습니다. 저도 열받은 아스팔트 바닥에 무릎 꿇고 두 번 절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습니다.
"미안하다 기혁아. 정말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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