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파고다 공원. 오늘도 많은 노인들이 공원에 나와 있다. 여기선 장기를 두고, 저기선 자식 자랑이나 정치 이야길 나누고, 재밌는 만담도 한다. 또 가만히 앉아 하늘만 쳐다보는 우울한 노인도 있다.
이들을 지켜보는 젊은 연인 한 쌍도 있다. 연극의 이야기꾼들이다. 현수는 무명 희곡작가로 연인인 지현에게 자신이 구상한 연극을 들려준다. 연극의 내용은 파고다 공원을 배경으로 노인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란다.
하지만 지현은 "구려"라고 일축한다. 젊고 싱싱한 사람들의 얘기나 숀 코네리 같이 미중년을 등장시켜도 모자랄 판에 파고다 공원 노인네들의 구질구질한 얘기를 누가 들어주겠냐고 묻는다.
사실 관객의 마음도 이와 비슷하리라. 그러나 <썽난 마고자>는 액자식 구성, 세련된 연출,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로 예상치 못한 흥미와 감동을 준다.
노인 문제를 다룬 연극은 '구려'? <썽난 마고자>는 다르다!
이 연극은 우선 무대부터 특이했다. 무대가 중앙에 있고 객석이 양편으로 나뉘어 있다. 샌드위치의 빵 두 개가 객석이면 속은 무대다. 파고다 공원처럼 꾸며진 무대는 벤치 3~4개와 등나무 벤치 하나, 그리고 나무 한 그루로 단순하다. 그렇지만 무대를 마주보고 있어서인지 정말 공원 같은 아늑한 느낌이다.
연극 시작 전에 배우들이 이미 무대에 나와 있다. 그들은 관객에게 말을 걸기도 하며 새우깡을 나눠준다. 관객들은 신기해하며 새우깡을 받아먹는다. 시작 전부터 뭔가 다른 연극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암막도 따로 없어 "공연 시작합니다!" 하는 말과 함께 극이 시작된다. 주인공인 한 쌍의 젊은 연인과 노인들은 극이 끝날 때까지 거의 무대를 나가지 않고 함께 한다. 무대 한쪽에서 젊은 연인이 대화하면, 다른 쪽에 있는 노인들은 장기를 두거나 잡담을 하며 조용히 있다. 반대로 현수와 지현이 상상하면, 그들의 상상이 노인들의 연기로 펼쳐진다. 이 때 젊은 연인은 관객처럼 그들을 지켜본다.
마당극의 성과, 세련되게 활용해
관객 또한 공연에 참여시킨다. 관객과 춤을 추거나 대화할 뿐 아니라, 관객석을 하나의 무대 소품으로 바꾸어 버린다. 노인이 관객에게 새우깡을 주며 "비둘기들아, 많이 먹어" 라고 외치면 관객은 모두 살찐 비둘기가 된다. 관객은 공연 시작 전부터 자신이 비둘기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는 큰 웃음을 낳는다.
노인들이 등나무 벤치에 올라가 투쟁을 외치면 관객은 파고다 공원을 점거한 노인들이 되어 함께 동참하기도 한다. 따로 막이 없는 무대에서 공연의 처음부터 끝까지 배우와 관객을 참여시키는 무대 연출을 활용하며 큰 재미를 준다. <썽난 마고자>는 이렇게 우리식 연극인 마당극의 성과를 세련되게 활용한다.
연극이 진행될수록 구질하다는 인상은 완전히 사라진다. 반대로 정말 재밌다. 노련한 배우들의 연기와 호흡은 환상적이고, 무대 연출은 참신하다. '생연극'을 표방하는 극단 차이무답게 배우들이 내뱉는 대사가 정말 생생하다.
걸음걸이에서 말투까지 노인으로 완벽하게 변신한 배우들의 연기가 지루할 틈이 없게 만들어 관객의 집중도를 높인다. 또 '가공할 최여사'의 등장과 난데없는 '떼춤' 장면은 정말 웃겨서 관객의 배꼽을 잡게 하기에 충분하다.
매끈한 풍자로 파고다 공원 노인들의 시위를 상상해
연극의 핵심 내용은 이렇다. 서울시장이 G20 정상회의를 위해 'Design de Seoul'이란 구호 아래 파고다 공원 일대를 청계천이나 광화문 광장처럼 개발하려 한다. 서울시는 곧 공원의 경관을 헤치는 노인들을 쫓아내려 한다. 노인들은 거기에 대항하여 등나무 벤치 지붕에 올라가 투쟁을 외친다.
물론 이는 연극 속 현수의 상상이다. 그렇지만 이는 현재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용산을 개발하면서 살아온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울분을 토하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래서 연극 속 노인들의 이야기에 공감이 간다.
그렇지만 연극은 심각하게 나가기보다는 매끈한 풍자를 보여 준다. 진지해질 때면 과장된 행동과 대사로 자신들을 희화화하고, 슬퍼질 때는 슬쩍 다른 얘기로 넘어가 버린다. 파고다 공원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하는 물음에 "청계천이니 올림픽공원이니 한강공원이니 많다"거나 "노인은 천안행 차비가 무료"라며 쿨하게 대답한다.
멋진 황혼, 멋진 젊음이란 무엇일까?
연극은 종반에 들어 젊은 연인과 늙은 연인의 사랑을 마주치게 한다. 늘 꿈을 먹고 살며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사는 무명 극작가 현수에게 현실 때문에 돈을 벌고자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하는 지현은 지쳐간다.
지현은 구질구질한 파고다 공원 말고 근사한 와인 바에도 가고 싶고 백화점에서 쇼핑도 하고 싶단다. 그런 지현에게 현수는 대책 없이 반지를 내밀며 프로포즈한다. 이들 커플은 현실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한편 무대 다른 편에서는 또 다른 한 쌍의 커플이 탄생한다. 달밤 등나무 벤치에서 앞으로 남은 인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한 두 노인이다. 극의 마지막은 이렇게 낭만적 결말로 얼버무린다.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뛰어난 연기와 연출, 극이 남기는 메시지는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기에 충분하다.
파고다 공원에서 우리가 노인을 보며 느끼는 우울한 마음은 정말 노인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우리의 구질구질한 삶 때문이었을까. 한참을 웃다보면 어느새 진중한 메시지를 전하는 연극이 <썽난 마고자>다.
극중 현수가 읊은 기형도 시인의 시 <늙은 사람>이 다시 떠오른다. 과연 멋진 황혼, 멋진 젊음이란 무엇일까?
늙은 사람
-기형도
그는 쉽게 들켜버린다
무슨 딱딱한 덩어리처럼
달아날 수 없는,
공원 등나무 그늘 속에 웅크린
그는 앉아 있다
최소한의 움직임만을 허용하는 자세로
나의 얼굴, 벌어진 어깨, 탄탄한 근육을 조용히 핥는
그의 탐욕스런 눈빛
나는 혐오한다, 그의 짧은 바지와
침이 흘러내리는 입과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허옇게 센 그의 정신과
내가 아직 한번도 가본 적 없다는 이유 하나로
나는 그의 세계에 침을 뱉고
그가 이미 추방되어버린 곳이라는 이유 하나로
나는 나의 세계를 보호하며
단 한걸음도
그의 틈입을 용서할 수 없다
갑자기 나는 그를 쳐다본다, 같은 순간 그는 간신히
등나무 아래로 시선을 떨어뜨린다
손으로는 쉴새 없이 단장을 만지작거리며
여전히 입을 벌린 채
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그의 육체 속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 무엇이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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