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여자들이 힘들게 낳아주면, 군대는 죽이는 것을 배워오는 곳"이라는 EBS 강사의 동영상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정말 군대란 그런 곳일까? 돈 있고 '빽' 있는 사람들에게 군대는 인생에 있어 선택사항 중 하나일 수 있을지 몰라도 '어둠의 자식들'에게 군대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일 뿐이다. 군대의 무게가 지워진 순간부터 인생은 무거운 중량을 부여받는 것이다.
나의 군대생활 3년은 돌이킬 수 없는 '잘못된 만남' 내게 있어서 군대는 인생의 지워진 시간, '잘못된 만남' 그 자체였다. 보급병으로 지낸 군생활은 추억하고 싶은 기간이 아닌 '인생에서 지워진 기간'으로 남아있다. 내 청춘의 몇 년을 앗아갔지만 배운 거라고는 '빼돌리는 일' 밖에 없었다.
(이 글은 20여 년 전의 군 생활을 다룬 이야기며, 현재 군대의 실태와는 관련이 없음을 미리 밝힌다.)내가 입대한 것은 1988년 겨울 무렵이었다. 논산훈련소에서 기본훈련을 마치고 의정부 306보충대에 도착한 나는 최전방부대의 사단 보급병으로 배치받았다.
사단직할 보급수송근무대(이하 보수대). 보급 주특기를 부여받고 생활한 3년간의 군 생활에서 나 자신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지금이야 군 간부들이 고기 한 덩어리만 집에 가져가도 강제전역감이지만 당시는 빼돌리는 자와 이로 인해 허덕이는 자들이 비일비재했으니….
빼돌리는 자와 이로 인해 허덕이는 자들 내가 군 생활 동안 가장 무서워했던 것은 전쟁도 아닌 북한도 아닌 고참도 아닌 바로 보급비리였다. 사단을 좌지우지 하는 사단 보수대의 막강 파워를 아는가? 사실 그 때 해먹는 라인에 있던 사람들을 보면서, 나에게도 떡고물의 기회가 늘어난 걸 즐거워 할 줄만 알았던 내 자신을 감히 고백한다. 그렇게 해먹어도 되는 걸 당연시 여겼던 나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다.
당시 사단급에는 보수대라는 부대가 존재하여, 사단 예하부대의 보급품을 관리하는 일을 담당했다. 내가 근무한 보수대는 OO사단의 1만 명 이상의 사단병력의 전체보급물자 뿐만 아니라 일시적인 주둔부대의 주·부식 보급까지 책임을 져야 했다.
나는 OO사단의 1종 보급행정병(주특기 시설보급)으로 13,000여명분의 주식(부식을 제외한 식량) 보급업무를 담당했다. 근무를 하는 곳은 보급부라고 불리는 사무실인데, 요즘의 동사무소와 같은 형태로 각 종별로 담당 계원이 앉아 있었다. 담당계원 뒷자리에는 군무원 아가씨들이 앉아있고 맨 뒷자리는 각 종별 출납관(준위~소령)이 앉아있는 그런 형태였다.
보급부는 사단 편성(예하)부대의 보급관이나 보급병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들락날락하며 보급 송장에 확인을 받아가고 결산을 하는 곳이었다(군대 생활 중 민간인인 군무원아가씨들과 - 예쁘건 안 예쁘건- 하루 종일 함께 한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업체선정에서부터 비리... 검수도 수박 겉핥기군대의 '1종' 보급품은 군대의 수많은 보급품 중 주·부식류를 포함한 전투식량과 대략 1일 일정한 비율로 소모되는 급식자재를 통틀어 지칭한다. 주식은 주로 중앙조달(중장기 보관이 가능하여 국가에서 직접계약)로 공급되는 쌀, 된장, 고추장, 조미료, 면류, 식용유, 통조림 등이다. 부식은 쉽게 상하거나, 신선도 유지를 위해 1일 이상 보관이 곤란하여, 매일 매일 납품을 받아야 하는 품목(육류, 생선류, 채소류 등)으로 주로 사단별로 지역 업체를 선정하는데 주로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부식은 사단 보수대에서 독립적으로 각 업체에 납품계약을 하여 직접 납품을 받고, 각 예하부대에 매일 반출을 해야 하는데 그 양이 실로 어마어마했다. 13,000명이 매일 먹어야 할 양을 공급하니, 납품업자가 한번 보수대와 계약을 하면 빌딩을 몇 채 장만할 수 있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부식계원이 정기휴가를 가노라면 납품업자가 전날 찾아와 쥐어주는 용돈만 몇 십만 원이었으니 그 윗분들은(?) 상상하고도 남을 만하다. 계약 한번이면 수억 원이 왔다 갔다 하는데 얼마나 많은 로비를 했을지는 두말 하면 잔소리다.
매일 입고되는 생양(장기보관을 위해 두부의 표피를 튀긴 것), 김치 등 수많은 부식을 한 두 명의 창고병이 모두 검수한다는 것은 사실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만큼 검수절차는 수박겉핥기에 불과했다. 모든 사병들에게 보급되는 우유도 처치 곤란이었다. 남은 우유의 양이 너무 많아 고참병들의 피부미용을 위한 우유 목욕도 한 두 번이지, 주민들에게 주는 것도 모자라 결국에 폐기처분되는 일이 많았다.
업체의 정기적 접대에 재고조작도 '식은 죽 먹기'부대에서 자체적으로 이뤄지는 민간계약은 항상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부실업체가 로비로 인해 따낸 납품계약, 또 납품단계에서 검수와 감독절차가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아침 일찍 운송차량과 함께 들어온 납품업자 사장과 눈 인사 한번 하면 그만이었다. 계원뿐만 아니라 군무원에 출납관까지 대동하여 읍내 식당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는 일이 잦았고, 그런 날이면 다음날 꼭 숙취로 고생하는 출납관을 보게 되었다.
한 달에 한 두 번씩 있는 사단 쌀 수령일. 군용트럭 십여 대를 이끌고 군 지사에서 쌀을 수령하고 돌아오는 길, 국도변의 허름한 음식점에서 운전병이며 보급계원 선임하사들은 실컷 먹고 쌀 가마니 몇 개를 내려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도 겨우 애교수준이었다.
재물조사나 군 내부감사시 예하부대의 쌀이 부족한 경우, 무서운 징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사병들은 국방부에서 지정한 1일 기준량(당시 백미745g, 압맥83g)에 훨씬 못 미치는 양의 밥을 먹지만 장부상 재고와 실재고가 맞지 않는 부대가 흔했다. 여기서도 보수대장과 출납관의 힘은 발휘된다. 예하부대장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산서상으로 그깟 쌀 몇 가마쯤이야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드럼 단위 유류 보급도 허점 투성이... 항의하면 예하부대에 보복1종은 계약단계에서 주로 문제가 있는 반면, 3종(유류, 연료, 윤활유 등)보급은 불출과정에서 비리가 발생했다. 3종창고는 유류를 보수대에서 예하부대를 불러 불출을 하기도하고 때에 따라 유조차를 타고 가서 보급을 하는 형태였다. 유류의 입고는 탱크로리 차량에 1만 리터 단위로 입고되지만 출고는 대부분 드럼단위로 불출을 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정량으로 입고된 유류는 예하부대 불출시 드럼단위로 보급을 하게 되지만 드럼을 가득 채우지 않고 약 80~90%만 채워서 보급을 하는 것이다. 그래도 송장에 서명을 해야 하는 예하부대의 보급관의 심정을 아는가? 내막을 들여다보면 받는 입장에서는 결코 말 한마디 할 수 없다. 혹시 유류를 수령하러 온 예하부대에서 항의라도 한다면 그 부대는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1년에 예하부대별로 사용할 수 있는 유류는 지정금액 한도 내에서만 운용해야하는 실정이었다. 혹시라도 3종 계원에게 밉보인다면 그 부대는 겨울철에 차량용 유류는 물론 내무반에서 꽁꽁 언 손을 녹이며 얼어 죽을 각오를 해야만 했다. 보복방법은 간단했다. 유류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여름철에 집중적으로 불출명령을 내게 되면 울며 겨자 먹기로 수령을 해야 하고, 막상 겨울에는 자금이 바닥나 유류신청을 할 수 없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악착같이 모은 기름은 모두 출납관과 3종창고장의 손아귀에 놓여 있었다. 어떻게 처리하는지 남아야할 기름이 분기별 결산 때마다 결손이 수시로 발생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기름이 남아돌든 결손이 발생하든 출납관과 창고장의 차량은 항상 부대 주유소의 기름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또 수십여 개의 통까지 가져와 부대에서 기름을 받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툭하면 새 것으로... 보수대 사병 내무반은 '호텔'군대라는 특수상황이라 더 이상은 생략하겠지만, 어디 이뿐이었으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했지 않았던가. 보수대에 근무하는 사병들도 윗분(?)들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보수대 고참의 특권이라면 군용속옷을 마음대로 2종(피복류) 창고에서 가져다 입는 것이었고, 세탁이 귀찮으면 아무데나 버리기도 했다. 멀쩡한 모포도 툭하면 새것으로 바꾸기 일쑤였다. 전방부대 내무반은 쓰러질듯 초라하다지만, 보수대의 내무반은 장판이며 외벽단장도 4종(공사 건축자재)계원의 묵인 하에 수시로 바꿀 수 있었다.
보급품 전군재물조사나 군수 감사 때 내무반 뒤에 구덩이를 파고 부대 내에 굴러다니는 전투화, 속옷, 모포 들을 파묻던 해프닝은 또 하나의 슬픈 자화상이었다.
감히 고백한다. 나에게 있어서 3년이란 청춘을 바친 군대는 인생의 지워진 시간이었다. 오죽하면 우리처럼 똑같이 훈련받고 만기 전역한 노무현 전 대통령도 군대가 그리 좋은 곳만은 아니라고 했을까? 북한과의 구시대적 백병전이 아니라 전방위 안보를 생각한다면 병력 숫자보다는 성능 좋은 무기를 마련하는데 더 주력해야 하고, 젊은이들이 빨리 사회에 적응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3년이라는 내 청춘, 나라를 지키느라 헛되게 써버렸는데, 그걸 자랑스럽게 말할 수 없는 나라라니…. 사람들은 가끔 군대 다녀온 게 자랑이냐고 쉽게 말한다. "돈 없고 빽 없는 게, 자랑은 아니지." 솔직히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아니, 맞는 말이다.
군대라는 이름 속에 감춰진 비리, 나는 군대생활을 떠올리면 비리의 극치를 보여준 그 기억이 떠올라 몸서리가 쳐진다.
"OO부대 이번 달 결산할 때 쌀 50가마만 더 떨어!" 덕분에 전역하고 나서도 2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동사무소 같은 보급부 사무실이 나오는 악몽을 심심치 않게 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