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밤 곤하게 잠든 아이를 안고 들어선 몽골인 어능게르(가명)는 한 눈에 봐도 성한 구석이 없는 사람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여린 몸매에 네 살배기 아이를 안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을 올라오느라 힘에 부쳐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이를 눕히고 자리에 앉은 어능게르는 겉으로 보기에도 온몸이 붉게 도드라져 있었다. 얼핏 보면 여드름이나 피부병으로 오해하기 쉬울 정도로 붉은 반점이 왼팔의 경우 손목부터 등짝까지 퍼져 있었다. 그러나 그 반점을 자세히 보면 긁힌 자국도 있고 멍도 있었다. 그를 통해 반점은 붓기가 가라앉으며 생긴 자국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오른 팔뚝에는 여전히 검고 붉은 색을 띠며 주위보다 한참 도드라진 멍이 위 아래로 나 있었다. 강한 외부 충격에 의해 생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몽골인 부부의 싸움... 말릴 수 없었다는 경찰
어찌된 영문인지를 묻자, 어능게르는 마른 침을 삼키더니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서울대학교 어학원으로 유학 와서 공부하다 같은 몽골인 남편을 만났어요. 결혼한 지 5년 됐는데, 결혼하면서부터 매를 맞았어요. 술만 마시면 때려요. 그런데 요즘 더 심해졌어요. 오늘은 죽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경찰에 달려갔어요."어능게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경찰이 들어왔다. 쉼터까지 어능게르를 데려왔다가 주차를 하고 뒤늦게 들어온 것이었다.
"남편이 굉장하더라고요. 덩치도 있고 술을 드신 데다 우락부락해서 말릴 수가 없고, 위험한 것 같아서 이리로 데려왔어요."폭력행위를 한 남자를 술을 마셨다는 이유 때문에 달래서 돌려보내고, 폭력 피해자를 쉼터로 데려온 경찰은 이 사건을 폭력 사건으로 보지 않고, 그저 단순한 부부싸움 정도로 보는 모양이었다. 경찰이 부부싸움이라는 이유로 가정폭력 문제에 개입하기를 꺼려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는 폭력을 두고도 폭력 가해자에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머리가 지끈했다.
경찰 입장에서는 파출소에서 난동을 부릴지도 모를 건장한 체격의 외국인을 폭력행위로 조사하고, 골치 아픈 부부싸움 문제에 끼어드는 것보다 양측을 잘 설득해서 돌려보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래서 피해여성과 아이는 쉼터로 잠시 보내고, 가해자는 달래서 집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술 취해 칼 휘두르는 남편... "추방됐으면 좋겠어요"그러나 피해자인 어능게르의 입장은 달랐다. 어능게르는 시퍼렇게 멍든 곳과 붉은 반점을 가리키며, 남편이 자신을 때릴 때 칼등으로 무지막지하게 때렸는데, 술에 취한 사람이 칼을 잡고 휘두르는 것을 상상해 보라고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아이도 있는데.......남편이 몽골로 추방됐으면 좋겠어요."합법 체류자인 남편이 추방되었으면 좋겠다는 어능게르의 말은 그녀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설명하고 있었다. 어능게르의 말을 들으며 할 말을 잃었다. 사람이 사람을 칼을 들어 때린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거니와, 먼 이국땅에 와서 서로 다독이며 살아도 모자랄 판에, 아이를 앞에 두고 폭력을 행사하는 아빠가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또한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가정폭력에 노출된 한 여성과 아이를 위해 우리 사회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고작해야, 쉼터를 찾아주고, 가해자를 다독거려서 돌려보내는 정도라는 사실에도 화가 났다.
어능게르 부부의 일처럼 경찰이 가정폭력 문제에 눈을 감아 버리면, 가정의 안정과 평화는 폭력으로부터 늘 위협을 당하게 될 것이다. 가정폭력 피해자와 가해자, 가정폭력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교육과 인식 전환이 없는 한, 칼등이 아닌 칼날로 상처를 입은 피해자가 있어도 경찰은 부부싸움이라고 개입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가정폭력은 부부싸움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갈 성질의 것이 아니라, 형사적 잣대를 들이대야 하는 범죄이다. 그런 면에서 경찰은 어능게르 부부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덧붙이는 글 | 위 사건은 사건 다음날 관할 경찰서에서 조사를 하였고, 피해자 보호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