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말로'의 북상으로 우리나라 서남 해역에 긴장이 감돌던 지난 5일은 일요일이었다. 합동참모본부는 긴급히 기자들에게 메시지를 보내 이튿날인 6일부터 진행되기로 예정되어 있던 서해에서의 한미연합훈련이 연기되었음을 알렸다.
태풍이 온다는 명확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결정은 미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기자들은 "정부가 천안함 출구전략으로 가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고 부지런히 휴대폰을 눌러댔다. 결국 서해에서의 한미연합 대잠수함 훈련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그러나 태풍은 제주도에조차 상륙하지 않은 채 6일 남해를 거쳐 8일 오전에 동해로 빠져나갔다.
시들어버린 태풍의 위력처럼 최근 한미연합훈련도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이와 같은 조짐은 지난 7월 말에 진행된 동해 연합훈련에서도 감지됐었다.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를 필두로 하는 항모전단과 스텔스 전투기인 F-22 랩터 4대를 동원했다는 사실에서 중국을 작전의 범위에 포함시키는 이미지가 강하게 발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7월 훈련에서 중국에 대해서는 '모호성'을 유지했다.
7월 21일 부산에 입항한 미7함대 소속 조지워싱턴 원자력 항공모함은 '떠다니는 군사기지'다. 비행갑판 길이가 360m, 폭은 92m, 면적이 축구장 3배 크기인 1만8211㎡다. 돛대까지의 높이가 20층 빌딩과 맞먹는 81m다. 이 항공모함에는 미 해군의 최신예 슈퍼호넷(F/A-18E/F) 및 호넷(F/A-18A/C) 전폭기와 조기경보기 '호크아이2000'(E-2C) 등 60여 대의 항공기를 탑재하고 있다. 항공모함 내에는 방송국, 우체국, 체육관, 병원, 정비공장, 세탁공장 등이 들어서 작은 도시의 기능까지 하고 있다. 실제로 이 항공모함이 소비하는 1일 에너지량이 부산시와 거의 맞먹는다. 한 번 출동하기 위해 시동 거는데 1억 달러가 소요되기 때문에 한국이 원한다고 함부로 오는 전력이 아니다.
여기에다 미사일 요격 기능까지 보유한 이지스함을 항모전단으로 보유한 조지워싱턴호가 만일 서해로 들어올 경우, 중국이 직면할 안보위협은 심각해진다. 중국의 모든 연안도시들이 토마호크 미사일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게 되고 1시간 이내에 전투기들이 중국의 핵심 목표를 타격할 수 있는 군사적 상황이 전개된다.
산술적으로 전투반경 2346km 내에 하루에만 150회, 600톤의 폭탄을 투하할 수 있는 호넷 전투기와 1200km 밖의 목표를 타격할 수 있는 토마호크를 발사하는 잠수함이 항모전단에 배치되어 있다. 중국으로서는 폭발하는 화산 위에 올라서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에 중국은 이 연합훈련에 격렬히 반발하며 대응훈련을 천명하는 등 '냉전식 위기'로 치닫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미 항공모함 모셔 오기'와 '한국군 아프간 파병'의 내막
미국은 서해상에서의 대규모 훈련에 처음부터 부정적이었다. 미측은 5월 24일 우리 정부가 대북 '단호한 조치'를 발표한 이후에도 "항공모함은 1년 스케줄이 다 계획되어 있기 때문에 갑자기 이를 변경하여 한반도에 투입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우리 국방부에 통보했다.
이런 기조는 6월까지 이어졌다. 특히 미국은 6월 9일 유엔 안보리에서 통과된 '대이란 제재결의안'이 중국의 협조로 가능했음을 강조하며 여러 외교 경로로 우리 정부에 항공모함을 서해에 출동시키기 어렵다는 완곡한 입장을 전달했다. 아울러 미국이 보유한 11개의 항모전단 중 한국에 출동시킬 전력이 없다는 재정적인 어려움도 전달했다.
이에 서해 연합훈련을 발표한 한국정부 입장에선 '미국 항공모함 모셔오기' 위해 대미 외교력을 총동원했을 터. 한미연합사령부의 한국 측 장군들이 아침저녁으로 미군 장성을 접촉하여 끈질긴 설득에 나섰고 펜타곤에도 연일 협조요청을 하는 등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잡는 행태가 연일 계속되었다.
6월 26일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토론토에서 만나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2012년에서 2015년으로 연기할 것임을 합의했다. 항모 조지워싱턴호가 동해로 들어오기로 결정된 것도 이 무렵이다. 한국의 끈질긴 요청으로 수차례 진통을 거쳐 7월에 조지워싱턴호가 동해에 들어오는 것으로 절충을 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합의는 7월 초에 한국군 부대의 아프간 본대 파병이 임박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한국의 '항공모함 모셔오기' 못지않게 미국은 아프간에 '한국군 부대 모셔오기'에 몰입해 있었던 것이 협상의 지렛대로 작용한 셈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애초 우리가 요구했던 대규모 상륙훈련과 같은 대북 군사적 압박을 최대화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훈련을 미국에 제안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미국의 의도대로 훈련이 기획될 수밖에 없었다.
한미 정상이 만나 전작권 전환을 연기하기로 합의한 직후에 김태영 국방장관과 월터 샤프 한미연합사령관이 6월 27일 경에 만났다. 전작권 전환 연기 후속대책과 함께 이날 두 사람 사이에서는 매우 의미 있는 주제가 토의되었다. 한국군의 아프간 파병 대책과 함께 두 사람은 국방부가 실행하려던 대북 심리전 방송을 하지 않는 것으로 절충했다. 이는 미국의 강력한 요청을 우리 정부가 수용한 것이다.
또 미국이 2013년까지 방위비 분담금을 평택기지 공사비로 전용하기로 되어있는 기존의 한미 간 합의를 수정하여 2013년 이후에도 전용이 가능하도록 해달라는 미국의 요청이 전달되었다. 이와 함께 2015년까지 평택기지가 반드시 완공되어야 한다는 월터 샤프의 강력한 요청도 김 장관에게 전달되었다. 전작권 전환 연기·아프간 파병·항공모함 동해 출동이라는 양국의 국가이익이 막후 거래 형식으로 교환되었다고 보여진다.
'대북 메시지' 없는 한미연합훈련그러나 7월의 훈련 양상은 한반도 군사적 긴장과 중국 자극이라는 부담을 회피하려는 미국의 의도대로 '미국 주도- 한국 지원'으로 나아가게 된다. 7월 훈련에서 함재기 60대를 탑재한 조지워싱턴호가 위용을 뽐내며 앞서가면 그 뒤로 갑판이 텅 빈 우리 수송함인 독도함이 엉거주춤하게 뒤따라가는 모양도 연출되었다. 애초 독도함은 경항공모함으로서 헬기를 비롯한 항공 전력을 탑재해야 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국방개혁 2020을 수정하면서 독도함에 탑재할 항공 전력을 계획에서 순연한 바 있다. 이에 따라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초라한 한국 해군의 모습도 덩달아 노출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평시에 연안방어를 완전히 책임지고 있는 한국 해군의 대미의존성이 드러나고 미국 주도의 군사훈련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확산된다. 이러한 군사에서의 종속은 한국이 요구하는 연안방어의 충족이라는 목표를 초월하여 미중 간의 전략적 패권경쟁에 한국이 흡수될 수밖에 없는 군사적 경로로 이어진다. 이 경우 한국은 중국을 가상적국으로 하는 미국의 세계전략에 흡수될 개연성이 부쩍 높아지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과연 이 훈련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가에 혼란을 느끼게 된다.
결국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강화된 한미동맹으로 대북 경고라는 목표를 뛰어넘어, 동북아의 신냉전적 질서에 직면하는 상황은 우리로서는 아직은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천안함 사건 이후 한국정부의 입장을 신중하게 지켜보던 중국이 발끈하고 나선 이유는 미국을 앞세우려는 한국정부의 태도 때문이었다. 천안함 사건을 처리하는데 있어 한국정부의 입장을 존중하던 신중한 태도가 미 항모의 서해 진입을 운운하는 대목에서는 한국정부에 대한 분노로 바뀐 것이다.
중국은 미국의 해상세력에 대응하기 위해 항공모함 건조를 서두르고 있고 대함 탄도미사일(ASBM)을 실전배치하여 미 항공모함의 자유로운 기동을 견제하려 하고 있다. 이외에도 신형 구축함, 프리깃함, 원자력 잠수함, 재래식 잠수함 건조로 나아가는 중국의 해상 위협에 한국도 심각하게 직면할 수 있다. 이러한 중국의 태도는 미국의 해양세력에 대한 견제용이라는 점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한편 7월 25일부터 28일까지 진행된 훈련의 내용을 보면 상당히 '미국적'인 특징이 발견된다. 우선 군사훈련과 별개로 북한에 대한 금융자산 동결이라는 경제제재가 병행되는 흐름이다. 재무부가 '참전'한 대북 압박은 조지 부시 행정부 시절 럼스펠드 장관의 '국방부 독주'와 상당부분 대비된다. 게이츠 국방장관은 럼스펠드의 강압적 군사정책을 비판하면서 미국의 외교력(D), 정보력(I), 경제력(E), 군사력(M)이 복합된 'DIEM'을 표방하는 가운데 조용하고 효과적으로 '실패국가'를 관리해야 한다는 정책방향을 신봉한다. 따라서 북한에 대한 압박 역시 북한 '정권 교체'나 '체제 전환'과 같은 네오콘식 발언을 하지 않으면서도 더 적은 정치·군사적 비용으로 더 큰 효과를 발휘하는 입체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을 선호한다. 이렇게 되면 북한으로서는 비록 외형적 긴장은 과거 훈련에 비해 완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심각한 고립과 체제 위기에 직면한다.
이와 더불어 이번 연합훈련은 북한과의 대규모 재래식 전면전쟁을 가상하지 않고 육해공군과 사이버사령부 요원이 참여하여 ▲네트워크 방어전 ▲연료 공급과 지휘통제(해병대) ▲대잠훈련(해군) ▲공중급유와 실무장 합동타격훈련(공군) 등 기능 위주의 훈련으로 진행되었다. 첨단 디지털 기술로 지휘통제하는 네트워크 기반(NCW)의 군사작전을 구현하면서 북한에 대한 정밀타격과 비대칭위협에 대한 기능적 방어를 훈련의 주안점으로 설정한 것이다.
이 훈련이 진행되기 이전의 한미 간 협의과정에서 미국은 한국이 요구한 상륙차단훈련 및 대규모 실병기동훈련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과의 긴장고조는 원치 않으면서도 단순히 추가 도발에 대한 '경고'만 하고 훈련 내용도 최소한으로 축소하려 한 것이다. 이 때문에 7월의 연합훈련에는 '대북 메시지'가 없었다. 과거 남북 간에 긴장이 고조된 94년 당시에는 팀스피리트 훈련을 하면서 "유사시 평양정권 궤멸"이라는 정치적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한데 반해 이번에는 그러한 정치적 메시지가 없이 순수 군사훈련으로 진행하여 국내 보수 세력이 일부 반발하기도 했다.
MB표 외교안보전략의 결말
그러나 8월이 되면서 미국의 분위기에 예기치 않은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의 신중하던 대중국 행보가 갑자기 강경한 분위기로 돌변하기 시작했다. 8월 9일에 마이클 멀린 미 합참의장이 "미국은 서해상에서 항공모함을 동원한 군사훈련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이전의 신중한 행보가 크게 비견되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한편 멀린의 이 발언이 나올 무렵 월터 샤프 사령관의 국방부 출입 기자단과의 간담회가 돌연 취소되었다. 본토로부터 '함구령'을 받은 월터 샤프가 갑자기 언론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동안 미 본토에서 중국을 자극하는 발언이 연일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미국의 중요한 태도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11월 중간 선거를 앞두고 의회에서 공화당의 정치공세에 비세(非勢)를 느낀 민주당 정권은 다분히 보수층에 영합하는 정책들을 쏟아내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멀린 의장의 '중국 때리기'였다. 이 당시 조지 워싱턴호는 남중국해에서 베트남과 연합훈련을 하면서 중국의 신경을 은근히 거슬리게 하던 중이었다.
한편 미국을 앞세웠다가 중국과의 외교가 험악해지는 상황을 직감한 청와대는 이제부터 거꾸로 미국의 핵심전력이 서해로 들어오는데 신중한 모드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미 항공모함이 서해로 들어온다고 했을 때 한국정부가 "오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기반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언제는 모셔오느라고 발을 동동 구르던 정부가 이제 와서 말을 바꿀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던 중에 "미 항공모함이 9월에 서해로 들어온다"는 국내 일부 언론의 8월 10일자 보도는 우리 정부에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서둘러 국방부가 나서서 "결정된 바도 없고 미 측으로부터 통보받은 사실도 없다"며 진화했다. 불과 한 달 전과 비교하면 한미의 입장이 정반대로 바뀐 셈이다. 미국은 한국정부가 해 달라는 대로 다 해주니까 이제는 한국이 중국을 의식하며 지원 받기를 꺼려하고 있다. 결국 항공모함이 서해로 들어온다는 것은 오보로 판명이 났고 우리 정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마추어 외교가 초래한 재앙을 가까스로 벗어난 셈이다.
한편 이런 소동이 벌어지던 지난 8월 9일에는 또 하나의 재앙이 벌어지고 있었다. 북한이 서북해역 백령도,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기습적으로 포 사격을 실시한 것. 이날 포 사격은 5시 30분부터 33분까지 3분여간 백령도 인근 북방한계선(NLL) 남쪽 1~2km 지점에 13발이 떨어진 것을 시작으로 5시 52분부터 6시 14분까지 120여발의 포탄이 연평도 NLL 부근 북 측 해상에 떨어지는 등 44분 간 지속되었다. 표적을 정해 놓고 일제사격을 하는 방식(TOT)의 사격이었다. 그러나 이미 외교안보전략의 중심이 붕괴된 한국정부는 이에 대해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고, 언론에 "포탄이 (NLL을)넘어오지 않았다"고 잘못된 발표를 하여 신뢰도 무너뜨렸다. 이후 청와대와 국방부가 극심한 갈등에 휩싸이며 책임공방이 벌어졌다.
그리고 9월, 예정된 서해에서의 한미연합훈련은 태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궁금증은 더욱 증폭된다. 도대체 연합훈련을 하려고 한 목표와 의미는 무엇인가? 무언가 보여주기 위해서? 그러나 그 목표와 전략이 전제되지 않은 채 이리저리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이유 없는 소동이 되고 말았다. 천안함 이후 복잡한 국제정세를 관리하지 못하고 미국에만 의존하다가 국가의 외교안보전략이 총체적으로 붕괴되는 그런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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