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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은 가난했던 시절이다. 나라는 국제통화기금에서 돈을 빌리고 서민들은 금을 모았으며 외국여행을 자제하던 시절, 난 결혼을 했다. 나의 새로운 인생은 총체적인 가난과 함께 시작해야 했다.

결혼과 함께 시작된 시련

청첩장을 돌리면 사람들이 말했다. 요즘같이 살기 힘들 때 누가 결혼을 하느냐고. 그렇다. 결혼도 때를 골라서 해야 맞다. 코일을 수입해 건설자재로 쓰이는 제품을 만드는 회사에 다니던 난 하루가 멀게 건설업체의 부도소식을 들었다. 건물의 원자재로 쓰이는 시멘트를 수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때 우리나라는 전세대란을 맞았다. 돈이 돌지 않으니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결혼 전 남편은 자취를 하고 있었고 그 집의 전세자금으로 신혼집을 얻어야 했다. 문제의 시작이었다.

신혼집을 얻기 전에는 결혼을 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결혼날짜를 잡고 준비를 하는 몇 개월 사이에는 방이 빠질 거라 했고 난 믿었다. 하지만 시간은 흘렀고 결혼 날짜가 돼도 방은 빠지지 않았으며 주인집에게서 전세자금도 돌려받지 못했다. 

하는 수 없었다. 난 자취방에서 신혼을 맞았다. 방이 빠지는 것과 상관없이 전세 자금을 받기까지 3개월을 기다리기로 했기 때문이다. 신혼살림도 들여 놓지 못했다. 썰렁한 자취방에 티비 하나만이 있었다. 난 옷가지만을 챙겨 여관과 같은 자취방으로 들어갔고 방을 본 직장동료는 그곳을 '여관'같다고 했다. 그렇게 시련은 시작됐다.

힘들었다. 예쁜 신혼집에 대한 환상이 깨져서가 아니다. 그 집은 독채가 아니었다. 자취방은 주인집의 부엌을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었으며 칸막이로 막아 놓은 구조로 천장은 뚫려있었다. 집주인은 칸막이로 불법 개조한 방에 목돈을 받으며 세를 준 것이다.

화장실도 집주인의 거실에 놓인 화장실을 사용해야 했다. 결혼 후에도 직장생활을 했던 난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무엇보다 절실하게 필요했다. 퇴근 후 도착한 집에서는 맘대로 샤워 한번 하지 못했다. 마음이 불편하기에 남편과 부딪히는 일도 많아졌다.

반년이 넘어갔고 난 지치기 시작했다. 창신동 꼭대기 화장실도 따로 없는 공간에서 내게 신혼의 단꿈은 낯선 이야기다.  약속한 3개월이 5개월이 됐고 8개월이 됐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한계였다.

한참 신혼을 즐겨야 할 그 때 판사 앞에 서다

집주인에게 내용증명을 보냈다. 법을 알지 못했기에 난 일하는 틈틈이 임대차보증금 반환청구 소송을 준비했다. 일반적으로 법은 언제나 복잡하고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고 변호사를 선임할 수는 없었다.

할 일이 많았다. 내용증명을 보내야 하고 소장을 써야 하고 심리를 위해 법원에 출두해야 했다. 3천만원이하의 소액재판이라 하더라도 최소 3개월이 넘는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 시절 많은 세입자들이 소송을 했고 우리도 그 중 한 사람이 됐다.

마지막까지 가고 싶지 않았다. 살면서 법원에 출두해야 하는 일을 겪게 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난 한참 신혼을 즐겨야 할 그 때 판사 앞에 섰다. 어떤 것들은 현실이어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것들이 있다.

법원에 나온 집주인집은 당당했다. 전세금을 사업자금으로 썼던 것 같다고 남편은 말했다. 난 원고였지만 약자가 되어 판사 앞에 섰고 주인집은 돌려줘야 할 돈을 주지 못하고 있음에도 오히려 떳떳해 보였다. 이상했다.

그 사이 나는 집에 가는 것이 불편했다. 몸도 지치고 마음 둘 곳도 없는 것만 같았다. 물론 판결은 원소 승소였다. 전세금을 돌려받고 재판비용까지 피고가 지불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해결이 된 줄 알았다. 하지만 판결이 전부가 아니었다. 집주인은 판결이 나오고도 한동안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았다. 또다시 한 달이 지나고 전세금에서 10만 원을 뺀 나머지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방문이 고장 났다는 이유다. 재판비용도, 못 받은 10만 원도 미련 없었다. 오로지 벗어나길 바랐다.

법원 판결이 나왔음에도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았다면 또다시 법원에 가서 세입자가 할 수 있는 또 다른 절차를 밟아야 했을 것이다. 바닥을 보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할까.

경험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시간들

아이엠에프와 함께 시작된 전세대란은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게 된 세입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새로운 절차를 만들었다. 전셋집으로 이사를 들어오면 그날로 동사무소에서 '확정일자'를 받는 것이다. 만의 하나 차후에라도 그 전셋집이 세입자 모르게 근저당 설정이 될 경우 우선순위로 변제 받을 수 있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전셋집을 알아보고 계약을 하기 전에 부동산중개인이 근저당 설정이 돼 있는지 관련서류를 준비해 주기 시작했다. 서류를 확인한 후 이사를 하고 확정일자만 받으면 되는 것이다. 내 집이 없어 남의 집 전세로 이사를 다녀야 하는 사람들에게 전세자금은 그들이 가진 전부나 다름없다.

지금 세대는 아이엠에프를 모를 것이다. 나라가 경제적인 위기를 맞아 어려움을 겪었고 그 여파는 고스란히 서민들에게 돌아왔다. 

적어도 화장실을 따로 쓸 수 있는 공간이었다면, 다른 집과 같은 독립된 방이었다면, 법원까지 가지 않고 해결해 주었다면, 그랬다면 그때가 덜 힘들게 기억됐을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돈이 아쉬울 때가 있다. 돈이 사람을 속이지 사람이 무슨 잘못이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강자로 인해 피해를 보는 약자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1년 동안 내가 놓쳐버린 시간이 아쉽다.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나고 나면 그만큼 성숙해 있을 거라고. 그래도 내겐 경험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시간이었다.

덧붙이는 글 | <잘못된 만남>응모글



#아이엠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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