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무례에 의해 일방적으로 내 일상이 깨뜨려졌다고 여길 때 사람마다 대응하는 방식이 다를 것이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상대에게 면박을 주거나 상대의 행위를 제지하려고 할 것이다.
사람마다 보이는 대응 방식의 차이는 그 사람의 인격 차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해석은 분명 과도한 측면이 있다. 그냥 기분과 분위기에 따른 차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같은 대상에 의해 일상을 침범당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텔레마케팅 전화가 아닐까 한다.
"안녕하세요? 전희식 고객님이시죠?"라는 전화는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건 관계없이 똑같은 음색과 똑같은 상냥함, 그리고 100% 여성이라는 특징이 있다.
전화를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한순간에 기분을 잡친다는 공통점이 있고 쏘아붙이지 않으면 벌레 털 듯 전화를 끊기에 급급해 하는 공통점도 있다.
나는 애써 품위를 유지하면서 점잖게 항변하는 쪽이다. "제 전화번호를 어떻게 아셨어요?"라든가 "이런 일방적인 전화 판매행위는 위법 아니에요?"라고 말이다.
마치 수사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전화 건 곳이 어딘지와 당사자의 신분과 전화번호를 확인하기도 하면서 통화를 거절한다.
<... 숨도 안 쉬고 속사포처럼 쏟아낸 말 끝에... 내가 벌어먹고 사는 일이 전화줄이라서 그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상대방의) 귀찮음과 실망과 의심과 적의와 때론 쌍욕을 얻어먹고... 헤드폰과 숫자와 네모난 칸막이에 갇혀 저마다 다른 별의 외계인에게 암호를 눌러대는 나는 말이야... (오늘도) 후와후와 심호흡을 몇 번 하고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고 웃으며 말을 건네지... '당신 나 알아? 언제 봤다고 그런 말을 해!'... 언제쯤 딸깍 끊어질까. 언제쯤 우웅 소리가 들릴까. 어떡하면 욕 안 듣고 대화를 계속할 수 있을까. 어떡하면 점잖게 거절 당할 수 있을까. 후와후와... (한숨소리) 입 밖으로 나와 버렸네... 내 심장을 꺼내 보면 하도 오그라들어 몇 그램 안 나갈 거야...>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숨이 막히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감정을 싹뚝 잘라내고, 느낌도 기분도 싹뚝싹뚝 잘라내 가슴 구석에 숨기고 회사가 요구하는 대로 웃음과 친절로, 고객이 바라는 대로 표정과 말투로 자기를 옭아매야 하는 노동자들. 쌍욕을 듣고 울음을 삼키면서도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해야 하는 사람들. 이름하여 감정노동자.
위 인용글은 <삶이 보이는 창> 76호(2010년 9~10월호)에 나오는 글이다. 김혜자 시인의 시 '텔레마케트와 독신자'에서 인용했다.
줄여서 '삶창'이라 부르기도 하는 이 책을 구독한 지 4년여 된다. 환호하면서 노동시를 읽고 노동현장 수기를 읽던 시대가 있었지만 요즘도 척박한 삶의 구석구석을 문학으로 비추어내는 잡지가 있다는 사실에 빚진 마음으로 읽어왔던 책이다.
늘 특집이 실리는데 이번 호 특집은 '요새것들에게 듣는 요새것들 이야기'이다. 국내 최초의 세대별 노동조합인 '유니온노동조합' 위원장인 김영경을 비롯하여 생기 넘치는 젊은이 넷이서 '요새것들' 이야기를 선보이고 있다. 기성세대에 대한 투정이나 불만 가득한 사회를 향한 적의로 채워진 이야기가 아니다. 세대 간 공감대를 넓힐 수 있는 화두들을 던진다. 그들의 적막한 불안과 근거 없는 희망이 같이 읽힌다.
이번 호 역시 장애인, 여성, 이주노동자, 건강, 인권, 생태, 노동현장, 문화, 철학 등의 영역을 구체적인 생활에 기대어 풀어내고 있다. 문학이란 이런 것이라고, 지식이란 이래야 한다고, 실천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질박한 땀냄새 풍기며 이야기하는 책이다.
내게 이 책은 '삶이 보이는 책'이라기보다 '내 삶을 바꾸는 책'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 책에 나온 글을 보고 내 지갑이 열릴 때도 많았고 이번 호를 읽고서 은근히 텔레마케팅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
내 분명 그러리라. "아. 그래요? 네. 그렇군요."라고 말하리라. 상냥하고 친절한 여성의 "전희식 고객님"에 부응하여 조용히 그녀의 말을 잘 들어주리라. 그렇다고 너무 오랜 시간을 뺏지는 않으리라. 괜히 헛심만 뺐다고 여기게 해서 그녀의 감정을 더 지치게 해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