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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출입이 제한된 국경지대

 

10월 하순이지만 연해주 일대는 이미 초겨울이었다. 언저리 나무들은 이미 잎들이 죄다 떨어져 앙상했고 풀들도 초록을 모두 잃고 있었다. 텅 빈 들판의 아스팔트길을 달리자 지명을 알리는 러시아 문자 도로 표지판이 먼 나라임을 일깨워 주었다.

 

"1946년 생 개띠입니다."

"1945년 생 닭띠입니다."

 

내가 그보다 한 살 위였다. 그는 우리말이 아주 유창했다. 경상도 말씨였는데 나보다 더 원음에 가까웠다. 중국 흑룡강성 일대 조선족을 만나면 억센 경상도 발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들 선조가 모두 경상도 사람들이기에 그대로 전해져 온 탓이었다.

 

크라스키노 마을 어귀에 접어들자 그는 남양 알로에 현지관리인 허영문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중근이 한때 머물며 의병활동을 한 연추(煙秋, 러시아지명 얀치헤 현 추카노프) 하리 마을과 동지들과 약지를 끊은 것을 기념한'단지동맹유지'비를 안내받기 위해서였다.

 

안내인 조씨는 허씨가 마을 슈퍼 앞 빈터에서 만나자고 했다면서 거기로 갔다.

 

곧 허씨가 승용차를 몰고 빈터로 왔는데 우리에게 자기 차로 옮겨 타라고 했다. 허씨는 핸들을 잡고는 최근 이 일대에 국경 경비가 강화된 현지 사정을 이야기했다.

 

안중근이 머물었던 연추(煙秋) 하리마을과 단지동맹비가 서 있는 일대는 최근에 외국인 출입이 제한된 국경지대로, 이곳을 방문하려면 미리 러시아 주둔 군부대에 사전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흘 전에 양 영사로부터 나의 여권 복사한 것을 팩스로 받아 러시아 주둔 군부대로 갔으나 공교롭게도 담당 군무관이 임무교대로 자리가 빈 공백 기간이라 허가를 받지 못하였다고 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 없으니 연추 하리마을이 보이는 핫산기념비가 있는 마을 뒷산 정상과 불법이지만 단지동맹비는 바로 자기 농장 앞에 있기에 당신 차로 안내하겠다고 했다.

 

연추(煙秋) 하리마을

 

곧장 마을 뒷산에 오르자 산 정상에는 핫산의 영웅을 기리는 기념탑이 높다랗게 서 있었다. 거기서는 사방이 일망무제로 훤히 다 보였다.

 

동쪽으로는 멀리 태평양이 보였고, 동남쪽 가물거리는 곳이 두만강 하구요, 남서쪽 가로막은 산 너머가 북한이라고 하며, 그 산 아래가 바로 한때 안중근이 의병 활동을 한 본거지 연추마을이라고 했다.

 

원래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 백성들이 기아와 학정을 피해 몰래 국경을 넘어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마을이었는데, 1937년 스탈린의 조선인 강제이동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방치되다가 그 뒤 러시아인들이 다시 개척한 마을로 지금은 한인들이 살고 있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100년 전 1910년 전후로 이 마을은 의병들과 독립지사의 근거지로 안중근, 홍범도, 이범윤, 이위종, 이상설, 최재형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거쳐 간 마을이었다.

 

한국에서 이곳을 별러 올 때는 연추마을뿐 아니라 이 일대를 샅샅이 답사하고 가능한 북한과 가까운 국경지대에까지 가서 안중근이 국내진공작전을 수행한 두만강과 북한 함경도 경흥도 카메라에 담고 싶었는데, 더 이상 가지 못하고 크라스키노 뒷산 정상에서 사방을 조망하는 것으로 답사를 마무리하려니 못내 아쉬웠다.

 

윤병석 교수에 따르면, 한인들이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1863년 13가구가 두만강을 건너 지신허(地新墟) 마을에 정착한 때부터라고 했다. 이주 초기에는 함경도 평안도 가난한 농민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들이 국경을 넘어 이 마을로 이주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잇단 흉작과 조선 왕조 말 부패관리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 백성들의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어들이고 무리하게 재물을 빼앗음)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의 뒤를 이은 한인들의 러시아령 연해주 이주는 해마다 급증하여 1900년을 넘으면서 몇 만을 헤아렸고, 나라를 빼앗긴 1910년대에는 10만 명이 넘었으며, 1919년 3 ‧ 1운동 무렵에는 몇 십만 명이 이 일대에 북적거렸다고 한다. 그들 대부분 일제 학정을 피한 백성들로,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연해주 일대는 조국독립운동의 해외 중요기지로 발전하여 한국독립운동사의 새 장을 열었다고 한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핫산 기념탑에서 그 일대를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는데 망원렌즈를 조씨 차에 두고 온 게 큰 실수였다. 거기서 연추마을은 원거리로 카메라에 잘 잡히지 않았다.

 

 

안중근 행장(6)

 

안중근이 이런 결정을 내린 까닭은 전국 13도 연합의병부대인 13도 창의소에서 대한제국의병은 일본과의 전쟁에 만국공법을 충실하게 지키라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의 포로석방 결정에 여러 의병들이 격렬하게 비난했다.

 

"저 적들은 우리 의병을 사로잡으면 남김없이 참혹하게 죽일 것입니다. 우리들은 적을 죽일 목적으로 이곳에 와서 풍찬노숙을 해가면서 적을 애써 사로잡는데 대장께서 그들을 놓아준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그렇지 않다. 적이 우리 의병에게 그렇게 폭행을 일삼는 것은 하느님과 사람들이 다함께 노하는 것인데, 이제 우리마저 야만 행동을 하고자 하는가. 또 일본의 4천만 인구를 모두 다 죽인 뒤에 국권을 회복하려는 계획인가?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기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약하고 저들은 강하니 악전(惡戰)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충성된 행동과 의로운 거사로써 이토(伊藤)의 포악한 정략을 성토하여 세계에 널리 알려서 열강의 동정을 얻은 다음에라야 한을 풀고 국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니, 그것이 이른바 약한 것이 강한 것을 물리치고 어진 것으로써 악한 것을 대적한다는 것이다. 그대들은 부디 여러 말을 하지 말라."

 

안중근은 의병 동지들과 부하들을 간곡히 타일렀다. 하지만 의병들의 논란이 들끓으며 따르지 않았고, 의병 동지 가운데 일부는 부대원을 이끌고 멀리 가버리는 자도 있었다. 안중근이 풀어준 일본군이 우리 의병의 위치를 알려줘 기습 공격을 당해 피해가 컸다. 안중근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본군 포로들의 배신감에 더욱 참담했다.  

 

그 며칠  뒤 안중근 의병부대는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4~5시간 격전을 치렀다. 날이 저물고 폭우가 쏟아져서 지척을 분간키 어려웠다. 장졸들이 이리저리 분산하여 얼마나 죽고 살았는지 헤아리기조차 어려웠으며 형세가 어쩔 길이 없어 수십 명과 함께 숲속에서 밤을 지냈다.

 

그때 의병들은 이틀이나 먹지 못해 굶주린 기색이 역력했고 제각기 살려는 생각만 가지는 것이라 그 지경을 당하고 보니 안중근은 창자와 간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럴 때는 흔들리는 부하들에게 다음의 시로 격려했다.

 

사나이 뜻을 품고 나라 밖에 나왔다가

큰일을 못 이루니 몸 두기 어려워라

바라건대 동포들아 죽기를 맹세하고

세상에 의리 없는 귀신은 되지 말게.

 (男兒有志出洋外 事不入謀難處身

  望須同胞誓流血 莫作世間無義神)

 

이 전투에서 안중근 의병부대는 폭우가 쏟아지는 악천후에 탄환이 떨어지고 부하들도 흩어져 수적 열세로 참패하고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면서 장마 속 산길을 헤맨 끝에 한 달 만에야 구사일생으로 연해주 본영으로 돌아왔다. 천만번 생각해도 하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일이었다.

 

국내진공에서 귀환 후 안중근을 가슴 아프게 한 것은 동포들의 냉대였다. 일본군 포로 석방이 의병부대가 기습받은 요인이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안중근은 패전지장으로 할 말을 잃었다. 안중근은 연추 본영에서 10여 일 묵으면서 몸과 마음을 추스른 뒤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프스크 등지를 다니며 동포들을 만나 의병조직을 하거나 교육 사업을 벌였다.

 

그런 가운데 어느 날 안중근은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를 지날 때 갑자기 흉한 6~7명에게 붙잡혔다. 이들은 일진회(一進會)의 무리들로 본국에서 이곳으로 피난해 와서 사는 놈들이었다. 그들이"의병대장을 잡았다"며 안중근을 죽이려 하자"너희들이 나를 죽이면 뒷날 우리 동지들이 너희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것이니 알아서 하라"고 윽박지르자 슬그머니 풀어줘서 또 한 번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이렇듯 안중근 참모중장의 의병투쟁은 어려울 때가 많았다.

- <대한의 영웅> 18~19쪽, <안응칠 역사> 137~140쪽 요약 정리


태그:#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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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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