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4월 치러진 18대 총선에서 '386'은 몰락했다. 탄핵 역풍이 거셌던 17대 총선에서 대거 국회에 진출했던 386은 18대 총선에서 대부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전대협 초대 의장을 지낸 이인영 전 의원, 2기 의장이었던 오영식 전 의원, 3기 의장이었던 임종석 전 의원은 물론 386의 맏형 격인 우상호 전 의원, 김태년, 정청래, 정봉주, 이기우, 복기왕 전 의원 등이 대거 여의도 정치 무대에서 사라졌다.
17대 총선에서 국회에 입성한 당시 열린우리당의 386 의원들은 총 31명에 달했지만 18대 총선에서는 송영길 인천시장(당시 3선), 최재성, 조정식 의원 정도만 격전지였던 수도권에서 살아남았다.
심판은 가혹했고 386 정치인들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 역사적 평가는 끝나지 않았다"는 작은 독백을 남기고 쓸쓸히 퇴장했다.
그로부터 2년여, 이제는 40대를 훌쩍 넘긴 이들은 486(40대, 80년대 학번, 60년대 생)이라는 새로운 닉네임을 달고 정치적 재기의 몸짓을 시작했다.
정치적 재기 나선 486
486 그룹은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에 맞서 싸워 제도적 민주화를 이룬 주역이다. 1990년대 중반, 15대 총선부터 이들은 '젊은 피 수혈론'에 따라 정치권에 대거 진출하기 시작해 17대 총선을 기점으로 개혁과 정치권 세대교체를 기치로 당시 여권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국회는 물론 청와대에도 상당수의 486 인사들이 포진해 국정 운영에 깊숙이 관여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걸었던 기대가 실망으로 변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군사독재의 상징이었던 국가보안법 철폐는 물론 한미FTA, 이라크파병 등 굵직한 사회 현안에 대해서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는 서민들의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되는 분양원가 공개 등 민생 현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동일한 세대로 묶이기는 했지만 각자가 속한 계파에 따라 이합집산을 하면서 제대로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보수진영은 이런 이들에게 80년대 운동권의 관성에 젖어 이념 투쟁에만 몰두하는 무능 세력이라는 낙인을 달았다.
민주당 내 수도권의 한 중진 의원은 "17대 국회에서 486 초선 의원들에게 가장 많이 했던 이야기가 상임위 활동을 중심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라였는데 역부족이었다"며 "한 가정을 책임지는 생활인이 된 486 세대들이 집값 폭등, 육아 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정치권에 들어온 486들은 이런 문제에 아무런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정치적 퇴출이라는 심판을 받은 그들은 꼼짝없이 반성문을 써야했다. 그러나 낙선 후에도 당내에서 권력을 좇아 '양지'만 찾아다닌다는 비판도 없지 않았다.
486의 반성문... "더 많은 복지, 더 좋은 민주주의로 가야"
지난해부터는 486 전·현직 의원 23명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연이은 서거가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이들은 매달 세 번째 수요일마다 모여 과거에 대한 반성을 공유하고 정치경제 등 한국사회 전반의 대안을 찾는 공부를 해왔다. 그래서 모임의 임시 명칭도 '삼수회'가 됐다.
꾸준한 모임을 통해 이들은 한국 정치의 진보 색채를 강하게 해야한다는 데 공감대를 이뤘다.
이인영 전 의원은 최근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이념적으로는 사민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가 공존하는 쪽으로, 세력으로는 민주화 세력과 진보 세력의 동맹, 국가나 사회상으로는 통일되기 전까지 남한 사회가 더 많은 복지, 더 좋은 민주주의로 가야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민주당이 좀 더 진보 쪽으로 이동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자는 이야기다. 이른바 '담대한 진보론'이다. 정동영 의원이 가로채간 '담대한 진보'는 486그룹의 반성을 토대로 이 전 의원이 만들어낸 말이다.
486 그룹은 1년여 간 쌓인 공감대를 바탕으로 "하청정치를 끝내겠다"며 독자 정치세력화에 동을 걸었다. 새로운 정치를 통해 '역사적 평가를 다시 받겠다'는 결기가 느껴졌다.
분위기도 좋았다.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송영길 인천시장, 안희정 충남지사, 이광재 강원지사 등 486 주자들이 광역단체장에 당선되면서 세대교체 바람이 강해졌다. 486 그룹에 대한 정치적 복권 가능성도 엿보였다.
분위기 탄 486의 정치적 독립선언, 그러나
분위기를 탄 이들은 이번 전당대회에서 486 후보들의 단일화를 고리로 당권 도전은 물론 2012년 총선과 대선의 교두보를 마련한다는 청사진을 그렸다. "향후 정치는 486 그룹이 중심이 돼서 이끌고 나갈 것"이라는 자신감도 넘쳤다.
하지만 처음부터 모양새를 구겼다.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세대교체의 아이콘으로 486 단일 후보를 내세워 돌풍을 일으키겠다는 계획은 최재성, 이인영 두 주자의 단일화 실패로 단박에 어긋났다.
쏟아지는 비판 속에 486에 대한 회의론이 고개를 들고 있지만 삼수회는 독자 세력화의 길을 걷겠다는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입장이다.
우선 이번 전당대회에서 지도부 당선을 목표로 정세균·손학규·정동영 등 이른바 '빅3'와의 짝짓기에도 나서지 않겠다고 했다. 이인영 전 의원은 "민주당의 구질서와 결연히 결별하고 새로운 길을 가겠다"고 밝혔다. 최재성 의원도 "표를 구걸하지 않겠다"고 했다.
삼수회의 맏형인 우상호 전 의원은 "우리가 하청정치 종식을 외치며 후보단일화를 추진했던 것은 단순히 이번 전당대회용이 아니라 486의 진보적 가치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는 '486 정치' 선언이었다"며 "이번에서 486 후보가 몇이나 지도부에 입성하느냐에 상관없이 '486 정치'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국 조직화에 나서는 486 그룹, 새 정치 성공할까
삼수회는 10월 전당대회 이후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 개편하는 등 정치 세력화에 본격 나선다는 계획이다. 전·현직 의원뿐만 아니라 원외 위원장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고 필요에 따라선 전문가 그룹들과도 모임을 함께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민주당 내에 강력한 '진보 블록'을 만들어 당의 변화를 이끌고 당 밖의 진보 세력과의 연대에도 적극 나선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우 전 의원은 "20년 전 목숨을 걸고 독재에 맞섰던 486 세대는 공동의 정치적 이익이 아니라 함께 추구할 가치에 따라 뭉칠 수 있는 세력"이라며 "그동안 축적된 고민을 바탕으로 향후 15년 동안 우리 정치를 책임질 준비를 해나가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들의 새로운 세대정치가 얼마나 빛을 발할 수 있을지에는 여전히 물음표가 달린다. 과거처럼 민주화 운동 경력이라는 훈장만으로 손쉽게 유권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던 시대가 이미 지나갔을 뿐 아니라 오히려 민주화 운동 경력은 없지만 정치권에 진출한 개혁 성향의 전문가 그룹들이 그들만의 전문 경험을 살려 맹활약하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변호사 출신 의원실의 한 486 세대 보좌관은 "민주화 운동 세대라는 것만으로 진보나 개혁을 주도할 수 있다는 생각은 시대착오적"이라며 "486 그룹이 '독재에 맞서 짱돌을 던졌다'는 우월의식을 버리고, 세력이나 깃발이 아니라 국민들을 설득할 구체적 대안을 들고 나와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치평론가 고성국 박사는 "486들이 진보를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구체적이지 않고 기성정치인들과 어떻게 다른 정치를 할 것인지도 전당대회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보여주지 못했다"며 "우리 사회의 미래와 정치 행태라는 두가지 분야에 있어서 486만의 가치를 제시하고 국민들에게 인정받는 브랜드로 만들지 못한다면 홀로서기는 실패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486의 새로운 정치 실험의 성패는 그들의 반성문이 얼마나 절실했으며 486이 된 그들이 386이던 시절보다 얼마나 업그레이드됐는지를 실제로 보여주느냐에 달린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