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일(월)지난 14일, 여행을 떠난 후 벌써 몇 개의 섬을 건너갔다 왔는지 잘 모른다. 육지에서 가까운 서해안의 섬들은 이제 더 이상 섬이라고 부르기 힘든 실정이다. 육지와 섬 사이에 연륙교가 놓이고, 다시 그 섬과 또 다른 섬 사이에 연도교가 걸쳐 있어서, 굳이 배를 타지 않고도 건너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얼핏 떠오르는 섬 이름만 들어봐도 강화도, 동검도, 황산도, 구봉도, 선재도, 영흥도, 메추리섬, 제부도까지 대략 8개 정도다. 나머지는 잘 기억도 나지 않고, 또 내가 미처 몰라서 가보지 못한 섬들도 있을 법하다. 그 섬들을 일일이 돌아보는데 예상 밖으로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렸다. 자연히 육지에서 머무는 시간보다, 섬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지고 있다.
섬은 섬인데, 섬이 아니다아무리 작은 섬도 일주를 할라치면, 직선거리의 3배 가까이는 가야 하기 때문에 육지에서 이동할 때와는 차이가 크다. 더군다나 서해안은 방조제를 제외하고는 직선이라고 할 만한 해안선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는 만큼 여행에 속도가 붙지 않는 이유다.
점점 더 많은 섬들이 '섬'으로 남아 있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얼마나 더 많은 섬들이 육지로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섬이 섬으로서의 고유한 가치를 지켜갈 수 있는 방식의 개발이 아니라면, 섬을 육지로 만드는 일에 좀 더 신중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동안 여러 섬을 거쳐 오면서 몇몇 섬사람들에게서 외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렇게 호의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육지와 섬 사이, 섬과 섬 사이에 다리가 높이면서 생기는 생활의 편리성 못지않게, 외지인들의 방문이 잦아지는 데서 생기는 부작용 역시 만만치 않다. 지역 공동체가 붕괴하고, 사람 관계가 지나치게 물질화되는 측면이 있다. 부동산 투기가 극성을 부리면서 지역의 자산이 중앙으로 빠져나갈 가능성마저 있다.
섬과 섬 사이에 바다가 있는 게 아니라, 섬과 섬 사이에 다리가 있다는 말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 떨어져 있을 때 서로를 그리워하게 되고, 그러면서 서로를 좀 더 잘 알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섬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다리는 놓였지만, 그래서 좀 더 가까운 거리에 살게 됐지만, 오히려 예전보다도 더 섬을 잘 모르고 사는 게 아닌가 싶다. 섬에 있으면서 섬이 그리워지는 것 역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비를 뚫고 영흥도에서 선재도 거쳐 대부도로어제 저녁 일기예보대로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창 밖을 내다보면서 바로 떠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인다. 비가 내리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축축해지는 느낌이다. 방 안에서 눅눅한 냄새가 진동한다. 어젯밤 비에 젖은 물건들이 채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곰팡이가 슬고 있는 게 분명하다.
오전 10시 30분, 빗발이 가늘어지고 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젖은 속옷을 입고, 젖은 양말과 젖은 신발을 신고 거리로 나서야 하는 게 오늘 내게 닥친 운명이다. 여전히 도로 바닥에 빗물이 흥건히 고여 있다. 갓길이 좁아 물웅덩이를 피해 가는 게 쉽지 않다. 핸들을 부여잡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영흥도에서 다시 선재도를 거쳐 대부도로 되돌아 나온다. 그 사이 비가 그친다. 우비도 벗고, 가방에서 방수포도 벗긴다. 맨살에 와 닿는 바닷바람이 말할 수 없이 시원하다. 아직 해는 비치지 않고 있다. 자전거타기에 딱 좋은 날씨다. 이 상태가 얼마나 지속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때만이라도 열심히 인생을 즐겨야 한다. 언덕을 쏜살 같이 내려가는데 마치 겨드랑이 아래로 날개가 돋는 기분이다.
비가 그치고 시간이 지나면서, 밑바닥이 드러난 갯벌 위로 낚싯대를 들고 걸어 들어가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고 있다. 바닷가에서는 어디를 가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내가 만약에 낚시를 즐기는 사람이었다면, 이들 섬을 채 벗어나지 못하고 어느 한 곳의 바닷가에 그냥 주저앉았을 게 틀림없다.
대부도 온 천지가 포도밭...하지만 올해 농사는대부도는 대표적인 포도 생산지다. 대부도에서는 포도밭이 아닌 땅을 찾아보기 힘들다. 지역 어디를 가나 포도를 손질하고 갈무리하는 사람를을 흔히 볼 수 있다. 도로가는 물론, 산기슭에도 포도밭이 있고, 심지어 바닷가마을에도 포도밭이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포도가 이 지역 주민들의 대표적인 소득원인 셈이다.
그런데 올해 작황이 너무 좋지 않다. 최근 3주 가까이 비가 내리는 바람에, 포도 알이 물을 잔뜩 먹어 터져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생산량이 뚝 떨어지면서 가격이 두 배 이상 치솟았다. 포도뿐만이 아니다. 올해 과일농사가 전반적으로 안 좋다.
올 추석 선물로 한우세트가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과일 값이 너무 높게 치솟은 까닭이다. 그 피해가 농민들에게 돌아가고 있어 안타깝다. 대부도의 포도는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다고 한다. 짠물이 밴 바닷바람이 포도의 당도를 높여준다. 지금 대부도에서는 포도가 한철이다. 대부도에서는 지금 포도를 먹거나 사가는 게 미덕이다.
제부도 가는 길에 '메추리섬, 쪽박섬' 이정표가 눈에 띈다. 섬 이름이 이채롭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섬들인지 호기심에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가는 길에 언덕이 많아 애를 좀 먹었다. 게다가 이정표도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지 않는 곳임이 분명하다.
메추리섬은 메추리 형상을 한 섬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메추'라는 이름의 마을을 뜻하는 섬이었다. 섬까지 제법 긴 연도교가 놓여 있는데, 철조망으로 가로막은 선착장이 있는 것 외에 특별히 방문객들의 발길을 끌만한 것은 없었다. '외지인'들이 갯벌에서 소라와 게를 잡거나, 낚시를 하기 위해 찾아가는 곳이다.
메추리와 관련 없는 메추리섬, 쪽박과 관련 있는 쪽박섬메추리섬을 나와 왼쪽으로 마을 안길을 더듬어 들어가면 쪽박섬이 나온다. 쪽박섬은 예상대로 '쪽박'처럼 생긴 아주 작은 바위섬이다. 쪽박섬을 앞에 둔 해변가의 한 매점 주인이 뭐 이런 것까지 보려 왔냐며 웃는다. 그러면서도 날이 맑은 날에는 제법 이곳까지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오늘은 오전에 비가 온 탓에 사람이 별로 없다고 아쉬운 표정이다.
주변이 좀 어수선한 것 말고, 경관이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다. 쪽박섬이 있는 해변가에서 영흥화력발전소와 영흥대교와 선재대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메추리섬과 마찬가지로 물이 빠진 갯벌에서 소라와 게를 잡을 수 있다. 물이 들어오면, 그때는 낚싯대를 드리우면 된다. 쪽박섬이라고 해서 꼭 쪽박을 찰 일은 없을 것 같다.
쪽박섬을 바라보며 점심을 먹는데 파리가 연신 날아든다. 멀리서 온 손님에게 파리떼 달라붙는 걸 그냥 바라만 보는 게 예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주인양반이 파리채를 들고 나와 파리를 쫓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주변에 있던 어부들 사이에 때 아닌 파리 논쟁이 붙는다.
왜 올해는 그 많던 모기가 사라지고 대신 파리가 더 늘었냐는 얘기다. 답? 그들 말에 따르면, 올해 비가 너무 많이 와 모기알은 다 쓸려 내려갔는데 파리는 그렇지 않았다는 게 답이다. 그러면 파리알은 왜 그대로 남아 있을까? 답은 각자의 상상에 맡긴다.
탄도와 전곡항을 지나 제부도까지 내쳐 달린다. 탄도는 시화방조제가 들어서면서 육지가 된 섬이다. 얼마 전 앞바다에 풍력발전기가 세워지면서 엄청난 변화를 맞고 있다. 바다 위에 세워진 풍력발전기로는 이것이 국내 최초다. 이전에는 하루 두 차례 앞바다에 떠 있는 누에섬까지 바닷길이 열리는 광경을 보러오는 사람이 많았는데, 지금은 풍력발전기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더 많다.
바닷길이 열릴 때 누에섬까지 걸어 들어갈 수 있다. 누에섬 위에 등대전망대가 있고, 그 위로 펼쳐지는 낙조가 탄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이곳에는 순전히 낙조를 바라보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낙조를 보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날이 좋아야 하는데 그런 날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풍력발전기가 들어서면서 누에섬 일몰이 망가졌다는 비판도 있다.
탄도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전곡항 역시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최근에 요트와 보트가 접안할 수 있는 대규모 마리나 시설이 들어섰다. 자치단체에서는 이 지역을 '해양 레저 산업의 전진기지'로 삼겠다는 계획이다. 이 지역은 앞으로 해양 레저 산업과 관련한 다양한 시설이 들어설 예정이어서 더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제부도 들어가는 길이 여느 섬과 달리 매우 이채롭다. 하루에 한두 차례 바닷길에 열리고, 갯벌 위를 얕게 덮은 시멘트 도로 위를 달려서 제부도까지 들어간다. 도로 옆으로 물이 찰랑거릴 때는 마치 바다 위를 달리는 듯한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예전에는 인도나 갓길이 없었는데 얼마 전 도로 왼쪽에 새로 인도를 깔았다. 길바닥에 맷돌을 깔아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엔 좀 울퉁불퉁한 게 흠이지만 제부도까지 안전하게 건너갈 수 있어 그 무엇보다 좋다.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길이다. 자전거를 타고 꼭 한 번 지나가 볼 만한 길이다.
제부도에 들어서면서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오늘 아침, 내일은 강풍에 많은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었다. 어쩌면 내일이 이번 여행에서 최악의 조건을 갖춘 날이 될 수도 있다. 비가 오는데 강풍이 안 불거나, 강풍이 부는데 비가 안 오거나 해서 일기예보가 적당히 빗나가기를 기대해 본다. 오늘 일정은 제부도에서 마감한다. 오늘 달린 거리는 57km, 누적거리는 총 423km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