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때문에 일 년 농사 망쳤어. 일 년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개화기와 수확기에 어디 단 하루도 햇빛 쨍쨍한 날이 있었나. 태풍에 쓸리고, 물러 터지고, 착색도 떨어지고, 올해 농사는 안 짓는 것만도 못했어."충남 아산시 탕정면 갈산리에서 올해로 30년째 포도농사를 지어 왔다는 박종국(52)씨의 한숨 섞인 푸념이다.
포도농사 잘 짓기로 소문난 그도 악천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찾은 박씨의 포도농장에서는 상품성 잃은 포도송이가 바닥에 떨어져 자연 발효 되면서 당 짙은 포도향이 진동했다.
피부 속 깊이 파고드는 그 향기는 잘 익은 포도주를 연상케 했다. 그러나 발효되는 포도의 향기가 짙으면 짙을수록 속 타는 농부의 안타까운 마음은 더 커진다.
개화기, 수확기 궂은 날씨로...올해 수확량 2009년의 30%에 불과박씨의 올해 농사는 작년 수확량의 30%에 불과하다. 바닥에 버려지는 포도송이를 바라보면 한숨이 절로 난다. 계산상으로 생산비 인상분을 제외하더라도 작년(2009년)보다 최소한 3배의 가격은 받아야 작년 만큼의 소득이 생기지만 출하가격은 5㎏들이 한 박스에 1만8000원 안팎으로 2009년과 비슷한 수준이다.
또 2009년 같으면 인터넷을 이용한 택배판매로 서울·일산 등 전국에서 출하되는 포도와 당당히 경쟁해 입맛 까다로운 수도권 소비자들에게 가장 높은 가격으로 선택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박씨는 2009년에 2만5000원으로 거래되던 택배판매와 수도권 출하를 올해는 모두 포기했다. 자칫 상품성 떨어지는 포도를 출하했다가 탕정포도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소비자들에게 한 번 신뢰를 쌓기는 어렵지만, 수 십 년간 어렵게 쌓아온 신뢰를 무너뜨리는 것은 한순간 이다. 내년을 위해 그리고 탕정포도의 이미지 훼손을 막기 위해 올해 출하를 포기한 것은 참 잘한 결정인 것 같다."적당한 햇볕을 받으며, 제대로 익은 포도는 수확기로 접어들면 검은 빛에 하얀 분말을 입힌 것 같이 탐스럽고 맛깔스런 빛깔을 갖는다. 그러나 올해는 일조량이 부족해 보랏빛으로 변색돼 미완의 작품이 되고 말았다.
결국 박씨는 농장과 인접한 도로에서 생산비에도 못 미치는 가격으로 소비자들과 직거래 하고 있다. 소비자들이 직접 상품을 보고 구매를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상품성이 다소 떨어지면 조금 더 깎아주거나 한 송이 더 얹어주며, 적정가격을 합의하는 방식이다.
몇 년 전부터 비료와 농약값이 폭등해 농업환경이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다. 특히 올해는 농부의 노력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최악의 일기가 봄부터 수확기까지 이어졌다.
봄철 개화기에는 연일 계속되는 비와 저온현상으로 화접불량에 냉해피해까지 입었다. 여기에 더해 이 모진 시련을 다 이기고 수확을 시작할 무렵부터 수요가 절정에 달하는 추석까지도 궂은 날씨는 계속됐다.
농산물이 비싸다고 탓만 할 수 없는 농촌의 절박한 현실을 박씨의 포도농장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충남시사신문>과 <교차로>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