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과 경술국치 100년을 앞두고, 우리 근현대사에 가장 위대한 애국자 안중근 의사의 유적지인 러시아 크라스키노,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포브라니치나야, 중국 쑤이펀허, 하얼빈, 지야이지스고(채가구), 장춘, 다롄, 뤼순 등지를 지난해 10월 26일부터 11월 3일까지 아흐레간 답사하였습니다. 귀국한 뒤 안중근 의사 순국날인 2010년 3월 26일에 맞춰 눈빛출판사에서 <영웅 안중근>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습니다.
2010년 경술국치 100년에 즈음하여 <영웅 안중근>의 생애를 다시 조명하는 게 매우 의미 있는 일로 여겨져, 이미 출판된 원고를 다소 손보아 재편집하고, 한정된 책의 지면 사정상 미처 넣지 못한 숱한 자료사진을 다양하게 넣어 2010년 11월 20일까지 43회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 기자말 오후 9시 20분, 쑤이펀허에 머문 지 꼭 6시간 만에 열차가 출발했다. 열차는 중국 동북 흑룡강성 어두컴컴한 대평원을 달렸다. 열차는 객차를 많이 달고 있는 양, 굽이 길에서는 앞쪽의 객차가 활모양으로 휘어 다 보였다. 어림잡아 열대여섯 개는 달고 달린 듯했다.
안중근이 이 평원을 밤새 달려가 포살(捕殺, 잡아 죽임)하고자 하는 나라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어떤 인물일까? 일본인 작가 미요시 도오루(三好徹)가 쓴 <이토 히로부미>와 정일성의 <이토 히로부미> 두 책을 대조하며 책장을 넘겼다.
[이토 히로부미 행장 (1)]가난한 농민의 아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그에 대한 평가는 한일 양국에서 극과 극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나라를 빼앗아간 침략의 원흉이지만, 일본에서는 제국주의 반석에 올려놓은 근대 일본의 아버지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는 1841년 10월 14일 일본 스오구니(周防國, 현 야마구치 현 히카리 시)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쇼가손숙(松下村塾)에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에게서 배웠다.
젊었을 때는 영국공사관을 습격하고, 국학자인 하나와 다다토미(塙忠宝)를 암살하는 등 열혈 과격파였다.
그는 초슈(長州)의 지도자들에게 빼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발탁되어 그들의 주선으로 영국유학을 다녀왔고, 그 뒤 출세를 거듭하여 초대 내각총리(총리대신 4회 역임), 초대 추밀원장을 지내는 등, 근대 일본의 가장 훌륭한 정치가 가운데 하나였다. 일본인들은 1963년부터 1984년까지 그들이 가장 많이 썼던 1천 엔(圓) 지폐에 그의 초상을 담을 만큼 대단한 인물로 추앙하고 있다.
1905년 11월에 을사늑약 후, 대한제국 통치를 위해 조선통감부가 설치되자 이토는 초대 통감(총독)으로 취임했으며,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 이 시기 그의 정책은 결국 조선에 반감을 불러왔다.
1907년 7월 이토는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양위시켰다. 이러한 그의 공이 인정되어 67세 때 일본 최고위 작위인 공작(公爵)을 수여받았다. 1909년 조선 통감을 사임하고, 추밀원 의장으로 복귀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천민의 아들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내각총리를 네 번이나 역임한 입지의 인물이지만 죽음은 그를 피해가지 않았다.
1909년 10월 초순, 예순 여덟인 이토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는지 해외유학 준비 중인 아들을 오이소(大磯) 자택으로 일부러 불렀다. 아들 분키치는 그때 스물네 살로, 이토가 본부인 이외 여인에게서 얻은 늦둥이였다. 이토는 아들에게 일렀다.
아들에게 남긴 말"사람에게는 타고난 천분이 있다. 나는 너에게 아비의 뜻을 계승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타고난 천분이라면 비록 네가 거지가 되더라도 결코 슬퍼하지 않을 것이며, 부자가 되더라도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이어 이토는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한 뒤에 이렇게 말했다.
"충성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지성(至誠)이다. 지성은 귀신을 울게 하고 천지를 움직인다고 하는데, 이는 진실이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심신을 군주에게 바치고,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해 왔다. 이 마음은 오로지 지성이란 단어로 집약된다. 반드시 귀신을 울리고 천지를 움직여 보이겠다고 다짐했다. 너도 충의 다음으로 지성이란 글자를 깊이 가슴에 새겨라.""
읽는 학문도 필요하지만 듣는 학문도 필요하다. 사람은 살아있는 책이어야 한다. 서양에 도착하면 사람들과 많이 접촉해 식견을 넓혀라. 그 누구와 만나 그 어떤 문제를 토론하더라도 대화 상대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사물에는 반드시 겉과 속이 있다. 넓고 깊게 사물의 안팎을 통찰할 수 있는 것이 안목이다. 정밀한 관찰은 서양인의 특색이며, 조잡한 관찰은 동양인의 약점이다.""사물에는 이루어지는 순서가 있다. 돌발적이거나 서둘러서는 안 된다. 상식적이고 주도면밀한 운용이 필요하다. 천하의 일을 추진하노라면 목숨을 걸어야 할 경우가 생긴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다. 너도 네 뜻을 이루려면 죽음을 각오하라. 의존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의 힘에 의존하지 말고 네 힘으로 해라."먼 길을 떠나며 아들에게 마치 유언을 하는 듯하다. 이토는 출국 전 국제신문협회 초청 연설 뒤 한 외신기자가 질문했다.
"어렵고 위험한 상황에 처했던 과거의 체험을 떠올릴 때가 있는가?""나는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과거에는 다소 목숨에 애착을 가졌으나 요즘에는 덤으로 살고 있다고 여긴다.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죽을 수 있다. 내가 우려하는 마지막 문제는 대한제국이므로 그 문제만 해결되면 걱정할 것 없다."이토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하다. 1909년 10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그의 마지막 여정을 살펴본다.
마지막 여정1909년 10월 14일
오후 5시 20분 추밀원장 이토 히로부미가 오이소(大磯) 역에서 시모노세키 급행열차에 올라탔다. 이 열차는 평소에는 오이소 역에 정차하지 않지만 만주시찰을 떠나는 원로를 위하여 특별히 임시 정차했다. 플록코트에 중산모자를 쓴 이토는 전송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는데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열차가 움직이자 이토는 플랫폼에 전송 나온 100여 친지에게 외쳤다.
"여러분, 설에는 좋은 술을 함께 마십시다."그러자 플랫폼의 전송객들이 떠나는 이토 공을 향해 화답했다.
"이토 공작 만세!"그 환성을 뒤로 하며 이토는 오이소를 떠났다. 이 세상 마지막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1909년 10월 15일
이토 일행은 이날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여 청일강화회담이 열린 순반로(春帆樓)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곳은 그가 하급무사시절 추억이 많은 곳이자 청일전쟁 뒤 청국과 강화회담 당시 이홍장과 담판을 지은 곳이기도 하다.
1909년 10월 16일
이토 일행은 이날 낮 모지(門司)항을 출항하는 오사카 상선 <데츠레이마루(鐵嶺丸)>를 타고 1909년 10월 18일 정오에 다롄 항에 하선했다.
1909년 10월 19일
이날 다롄에서는 일본인, 중국인, 유럽인 등 300여 명이 참석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관민연합환영회'가 열었다.
1909년 10월 20일
이날 이토 히로부미는 관동주의 주청 소재지인 뤼순을 방문하였다. 뤼순은 요동반도 최남단이며 남쪽으로는 산동반도의 위해위를 마주보고 있다. 동서로 두 개의 항구를 가졌는데 넓고 물이 얕은 동쪽 항구는 어선의 정착장이고, 좁은 서항은 1696년부터 청국 해군의 근거지였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에게 점령된 뤼순은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일본의 조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곧 서방 강대국의 중재로 중국에 반환되었다. 1898년에 다시 러시아가 조차했다가 1904년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이 항구를 함락했다. 서항 일대의 신시가지는 하얗게 석회 칠을 한 관동도독부청이 솟아 있었다.
1909년 10월 21일
이토는 뤼순 이령산에 올라 러일전쟁 전사자 무덤에 참배했다. 그는 여기서 시 한 편을 남겼다.
오랜만에 듣는 203고지일만 팔천 명의 뼈를 묻은 산오늘 올라보니 감개무량하다하늘을 바라보니 산봉우리에 흰 구름이 둘러져 있네.(久聞二百三高地 一萬八千埋骨山 今日登臨無限感 空看嶺山白雲還) 1909년 10월 24일
이토 히로부미는 무순(撫順) 탄광시찰에 나섰다. 무순은 봉천(지금의 선양)에서 동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중국 최대 탄전이다.
사방 60평방킬로미터의 거대한 광구로 석탄 추정 매장량은 9억5천만 톤에 이른다. 탄층 두께는 20미터에서 최대 130미터로 평균 40미터다. 그래서 겉흙을 걷어내고 그냥 파들어 가면 되는 노천탄광이었다.
- 사키류조 <광야의 열사 안중근> 111~114쪽 요약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