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린 시절을 전남 신안군 지도읍 서낭구지에서 보냈다. 논과 밭에서 일도 했지만 바닷가에 나가 낚시질도 즐겼다. 뜨거운 여름철엔 홀라당 윗도리를 모두 벗은 채 해수욕도 즐겼다. 돌아오는 길목은 갯벌과 자갈밭 그 중간 지점의 백사장 길이었다.
해안에서 자란 사람들은 늘 파도 소리에 한 뼘씩 커간다. 밀물과 썰물의 교차 시각처럼 그 키도 교차하여 들고 나며 큰다. 해안 포구에 남긴 발자국들도 바닷물에 들고 나며 한 뼘씩 커진다. 하루하루의 발자국들은 사라지지만 크던 키는 그곳에 남아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가? 해외 펜팔에 열을 올리고 있던 때였다. 뉴옥에 산다는 그녀의 이름은 케어리 호그리프였다. 네 번째 편지에 그녀의 얼굴 사진을 받아봤다. 우리나라 탤런트 얼굴을 뺨칠 정도였다. 승마와 수영이 그녀의 취미였다. 그에 뒤질 새라 나도 멋진 배경을 담은 인물 사진 한 장을 보냈다. 붉게 물든 석양 노을을 내리받은 바닷가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그 뒤로 그녀의 편지는 영영 끊기고 말았다.
유연태 외 6인이 쓴 <대한민국 해안 누리길>(생각의 나무)은 우리나라 동해와 서해와 남해의 52개 해안 길을 소개하고 있다. 좋은 사람들과 쉬엄쉬엄 걸으면서 볼 수 있는 주변관광명소는 물론이고, 2km의 짧은 코스에서부터 20km의 긴 구간도 있다. 어떤 길은 해수욕장을 품고 있는 백사장 직선 코스지만 또 어떤 길은 구불구불 휘어져 있는 느림보 굼벵이 길이기도 하다. 어떤 길은 새벽녘 동터 오는 경관이 멋지기도 하지만 또 다른 길은 해넘이 붉은 노을이 장관이기도 하다.
전라남도 함평은 나비축제로 널리 알려진 도시다. 매년 5월 초에 함평읍 수호리 엑스포공원에서 그 축제가 열린다. 몇 해 전 고향 땅을 거쳐 되돌아올 무렵에 그곳에 들린 적이 있다. 곳곳에서 나풀거리던 나비들의 모습은 가히 대장관이었다. 그만큼 수많은 관광객들도 줄을 잇고 있었다.
헌데 그 함평에 유명한 해안길 산책로가 있다고 한다. 이른바 미니초가집 산책로에서 물레방앗간으로, 물레방앗간에서 구름다리로, 구름다리에서 야채 차밭으로, 야채 차밭에서 왕대밭 숲으로, 왕대밭 숲에서 정자쉼터로, 정자쉼터에서 야생화단지로 이어지는 코스가 그것이란다. 그 길목을 신경통과 피부미용에 끝내준다는 해수찜을 하고 난 뒤에 걸으면 더더욱 온 몸이 날아갈듯 가볍고 상쾌해진다고 한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청산도의 돌담길을 보니 꼭 제주도의 돌담을 보는 듯하다. 다만 청산도의 돌담에는 구멍이 숭숭 뚫리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다. 청산도길은 완도군 청산면 도청리에서 동촌리까지를 일컫는 길목이다. 그 길목은 구불구불 휘어져 있고, 비뚤배뚤 구부러진 곡선로다. 길 위쪽으로는 산비탈을 깎아 만든 다랑이 논이 줄지어 있다. 그 길 위에서 '서편제'도 찍었다고 하니 어찌 그 길에 정감이 오가지 않겠는가.
"어쩌면 바닷길을 걷는 것은 우리네 인생을 성찰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며 인생의 넓이와 깊이를 생각하고 짠 내 나는 포구에서 생의 비애를 생각한다. 그리고 어두운 바다를 밝히는 등대의 불빛을 바라보며 막막한 미래를 가늠하는 것일는지도 모른다."(234쪽)망상해수욕장을 걸으면서 느낀 사색의 표현이다. 알맞게 자란 송림을 두른 해안선을 가진 망상해변은 밀가루를 뿌려놓은 듯 고운 모래밭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길이가 5km에 달해 '명사십리'라 부르기도 한단다. 그 때문인지 쪽빛 바다가 전해주는 파도소리에 몸을 맡기려는 젊은 연인들이 그곳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걷기 여행이 화제가 되고 있는 요즘이다. 집 근처 산책길에서부터 제주 올레까지 많은 사람들이 여유로운 길을 찾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바닷가 해안길은 꾸미지 않아 더욱 소박하다. 경쟁심이나 조급증 같은 것은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산소호흡기 같은 길이다. 혹여 어린 시절 나 같은 동심의 해안길을 찾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 책은 따뜻한 길동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