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4일(금) 서산시 대산읍을 벗어나 다시 바닷가 길을 찾아간다. 29번 국도를 타고 대산읍을 관통하는데 상당히 조심스럽다. 차량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갓길이 거의 없는 데다 화물차들도 많이 지나다녀 다소 위험하다. 이런 길에서는 운전자들도 신경질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스스로 방어 운전을 하는 게 최선이다.
국도로 들어서기 전에 수퍼에 들러 길 위에서 먹을 간식을 보충한다. 오늘 내가 가야 할 길 위에서는 수퍼를 만나기 힘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추석 연휴를 괌에서 보내고 돌아와 오늘 아침 막 문을 연 수퍼 주인이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내 차림에 관심을 보인다. 서해안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더니 '젊은' 사람이 기백이 넘친다고 칭찬을 한다. 그러면서 추석 전에도 한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왔다가 무릎 통증이 심해 바로 이 앞에서 버스를 타고 되돌아갔다며, 나보고는 무사히 완주를 하라고 당부한다. 젊다는 말에 괜히 우쭐해져서 다시 자전거에 오른다.
기백이 넘치게 출발을 하기는 했는데, 바닷가 길을 찾아가는 게 쉽지 않다. 환성리(지곡면)에서 도성리로 방향을 트는데 어디를 어떻게 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길 한 번 잘못 들면, 되돌아 나오는 일도 쉽지 않다. 힘들여 넘어간 언덕을 다시 되돌아 넘어오는 것처럼 사람 맥 빠지게 하는 일도 없다. 이 지역 역시 어제 독곶리와 벌천포를 다녀왔던 길과 마찬가지로 오르막과 내리막의 연속이다.
29번 국도에서 벗어나 도성리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서부터 길이 헷갈린다. 언덕 위로 올라서 더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인다. 그때 마침 길 한쪽 깻단을 쌓아놓은 밭에서 땅콩을 수확하고 있는 아주머니 두 분이 보인다. 내가 가야 할 길은 방금 지나쳐온 길 옆에 있었다. 길을 잘못 들기는 했지만 다행히 언덕을 다시 되돌아 내려가지는 않아도 된다.
얼마 안 가 진충사가 나온다. 지도상에 표시가 되어 있는 이정표 중에 하나다. 그분들 말씀대로 제대로 길을 찾긴 찾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안심할 일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 또 다시 길을 잃고 헤맬지 모른다. 오늘 여행도 결코 만만치 않다. 도성리에서 중왕리포구를 찾아가는 길은 사실상 산길이다.
휴~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숲 사이로 좁은 시멘트 길이 끊어질 듯하면서도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러다 갑자기 숲이 사라지면서 시야에 벼이삭이 누렇게 익어 가는 논이 나타난다. 그 논 건너편에 수평으로 쌓은 제방이 보인다. 하지만 그 너머가 저수지인지 바다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자전거를 타고 산 속 깊은 숲을 헤쳐 나오느라, 그때쯤에는 그만 내가 가고 있는 곳의 위치를 잃어 버렸다. 아무리 큰 지도라 하더라도 이런 산길까지 세밀하게 표시가 되어 있지는 않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제방 위에 올라선다. 눈앞에 갑자기 광활한 '땅'이 펼쳐진다.
얼핏 보기에 그 땅이 갯벌인지, 밭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 넓은 땅 어디에도 바닷물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먼발치 낮은 땅을 향해 한 줄기 불쑥 튀어 나온 산자락이 보이고, 그 끝에 배 몇 척이 땅바닥에 기우뚱한 모습으로 엎드려 있는 것이 보인다. 지도에 '도성리포구'라고 표기가 되어 있다. 휴,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애초 목적지로 삼았던 중왕리포구는 아니지만, 최소한 내가 서 있는 위치가 어디쯤인지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오늘의 고난은 도성리포구를 떠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도성리포구까지 가는 길은 일종의 맛보기였던 셈이다. 도성리포구를 지나쳐 다시 산길을 오른다. 웬만하면 여기서부터는 다시 바닷가로 내려갈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가도 가도 산이다. 고개인지 언덕인지 모를 오르막길들이 끝없이 나타난다.
앞서 '젊은 사람' 소리만 듣지 않아서도 바닷가로 가는 길을 포기하고 바로 내륙을 관통하는 국도를 잡아탔을지도 모른다. 이래서야 어디 바닷가 여행이라고 할 수 있나? 산길을 모두 에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도성리포구에서 중왕리포구를 향해 가는 길 역시 산길의 연속이다. 도저히 산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어쩌다 만난 평지는 농로로 길은 낸 곳이어서, 지도로는 도무지 방향을 잡을 방법이 없다. 중왕리포구까지 사실상 안개 속이었다. 내 발로 자전거를 타고 가긴 갔지만, 어떻게 해서 그곳까지 갈 수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농로를 벗어나 할 수 없이 지방도로로 올라탔는데 그 길이 운 좋게 나를 중왕리포구까지 이끌었다.
피로 씻어 준 박속낙지탕 중왕리포구도 그렇고 이웃해 있는 왕산리포구까지, 이 지역에는 낙지를 전문적으로 요리하는 음식점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박속낙지탕이 유명하다. 순전히 낙지를 맛보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나처럼 여행 삼아 찾아오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박속낙지탕은 맑은 국물에 박속과 감자 등속을 함께 넣어 끓인다. 어느 정도 국물이 끓기 시작했을 때, 산 낙지를 넣고 조금 더 끓인다. 깔끔하고 시원한 국물 맛에 단 맛이 감도는 낙지가 일품이다. 여기까지 오느라 쌓인 피로가 일시에 말끔히 가시는 기분이다. 낙지를 건져서 간장이나 초장에 찍어 먹고 나면, 국물에 칼국수나 수제비를 넣어서 한 번 더 끓여 먹는다. 나는 허전한 뱃속을 달래기 위해 밀가루 음식 대신 공기밥을 시켜 먹었다.
박속낙지탕을 먹고 나서 한가하게 포구를 서성인다. 그러는 사이 배 여러 척이 포구로 들어온다. 모두 낙지를 잡으러 멀리 나갔다 돌아오는 배들이다. 배에서 어구를 내리는 어부들의 표정이 밝지 않다. 낙지를 많이 잡았냐는 말에 '어디 낙지가 있간?'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말투가 퉁명스럽다.
얼마 전, 계속되는 비로 낙지들이 뻘 깊이 내려가 숨는 바람에 낙지가 잡히지 않는다는 보도가 있었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낙지 머리와 내장에서 카드뮴이 기준치 이상으로 검출됐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돼 낙지로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이 곤란을 겪어야 했다. 카드뮴 공포는 곧 사그러들었지만, 낙지를 잡아들이는 일이 예전만 못한 건 여전하다. 그나마 낙지 맛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계속 포구를 찾아오고 있는 게 다행이다.
중왕리포구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왕산리포구까지, 다시 다리가 부러져라 산을 넘는다. 산길이 끝이 보이지 않는다. 왕산리포구에서 호리까지 가려면 농로인지 산길인지 알 수 없는 소로를 타야 한다. 하지만 그 길을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나같은 길치는 그 길에서 미아가 될 가능성이 90%다.
결국 그 길을 포기하고 지방도로로 올라탄다. 이 도로를 타고 장현리(팔봉면)에서 구도항을 지나 호리까지 달린다. 호리는 서산시에서 태안군으로 넘어가기 직전 북쪽 바다 위로 살짝 고개를 쳐든 형태를 하고 있는 좁은 땅이다. 지형이 호랑이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호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름이 그래서 그런지 호리 깊숙이 들어가는 길이 마치 호랑이가 사는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좁고 험하다. 호리 역시 구불텅구불텅 이어지는 길이다. 좌우로 휘었다가 돌았다가, 위로 솟구쳤다가는 다시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길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이 흥미롭다.
호리 끝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만조가 되어 바닷물로 가득 찬 가로림만과 마주친다. 넘실대는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와 있다. 여기가 땅끝이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우뚝 선 해안 절벽이 바다 한가운데로 툭 튀어나와 있다. 그 절벽 위로 펜션 여러 채가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다.
호리 땅끝을 찍고 돌아 나오는 길,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서둘러야 할 시간이다. 그런데 다리에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남은 힘을 다해 페달을 밟는다. 피로가 누적된 탓인지, 근육의 피로가 가시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다. 언덕 하나를 넘는데 이전보다 2배 가까이 더 긴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만약 텐트를 그대로 가지고 다녔다면... 잠시 섰다가 다시 출발할 때마다 다리가 시큰거린다. 휴식이 필요할 때다. 하지만 어디서 얼마나 쉬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계획했던 것과 달리 전체 여행 일정이 계속 늦춰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애초 계획에서 약 3일 정도 더 늦고 있다.
태안읍 도내리로 들어서 읍내까지 들어가는 길이 대산읍으로 들어가는 길과 마찬가지로 갓길을 찾아보기 어렵다. 뒤따라오는 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조금만 천천히 가주면 좋겠는데, 그걸 못 참고 화를 낸다. 자동차를 타는 사람들이 조금만 더 여유를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바닷가길 여행의 본분을 잊고, 산길과 논길을 신나게 헤매고 돌아다닌 날이다. 어떻게 보면, 이 길은 강원도 산길과 매우 유사한 데가 있다. 고개 너머 또 고개다. 진땀이 흐른다. 하도 고개를 넘어 다니다 보니, 나중에는 고개를 내려가는 일은 물론이고 고개 아래로 평지가 나타나도 하나도 반갑지 않다.
오늘 아침 숙소를 나오자마자 우체국을 찾아가 텐트 일체를 집으로 되돌려 보냈다. 나중에 아쉬운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계속 가지고 다니기에는 너무 부담스런 짐이다. 그나마 텐트를 없앴기 망정이지, 오늘까지도 그 짐을 그대로 가지고 다녔다면 어떻게 됐을까? 길 위에 그냥 주저앉아 버릴 뻔하지 않았나?
내일은 태안군의 최북단에 있는 만대땅끝마을까지 올라가야 한다. 태안군은 해안선이 톱니를 연상시킨다. 태안군은 양날 톱니를 가진 톱이다. 지형상 서산시 서쪽 해안과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태안반도 안에서도 태안군이 전체적으로 가장 복잡한 지형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편안한 여행 같은 건 아예 기대도 하지 않는다. 만대땅끝마을까지 가는 길 역시 험난한 길이 될 것이 뻔하다.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는 내 낯빛이 거의 납빛이 되어 있다. 오늘 달린 거리는 70km, 총 누적거리는 718km이다.
덧붙이는 글 | 기록 정리 (그동안 빠트린 것들)
날짜 주행거리 누적거리
15일 80km
16일 87km 167km
17일 77km 244km
18일 64km 308km
19일 58km 366km
20일 57km 423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