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소설을 잘 읽지 않는데 김혜나가 쓴 <제리>를 읽게 된 것은 내가 즐겨찾는 블로그에 올라 온 매력적인 서평과 여느해보다 무더웠던 여름 날씨 때문입니다. 평소 소설을 잘 읽지 않는데 매년 8월에는 피서 삼아 한꺼번에 소설을 몰아서 읽곤 합니다.
<제리>와 더불어 <연을 쫓는 아이들>, <천개의 찬란한 태양>, <도가니>, <GO>,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등의 소설을 올 여름에 읽었습니다.
아! 그리고 제가 구독하는 신문 광고에서 받은 좋은 느낌과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이라는 것도 책을 선택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책을 펴고 몇 쪽을 넘기지 않아 '어 이거 뭐야?' 하는 생각이 들어 작가 약력을 살펴보았습니다.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 작가더군요.
참 도발적인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소설은 여자 주인공과 그 친구들이 노래방에서 남자 도우미들을 고르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 남자를 시작으로 모두들 자신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 앞으로의 한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 대해 간단히 말했다. 그들의 이름은 루키, 찰스, 준과 같은 별칭이었다. 나이는 거의 다 20대 초반이었고, 20대 중반의 남자도 두어 명 끼어 있었다." (본문 중에서)
이 소설의 제목 <제리>는 대학생인 주인공이 노래방에서 만난 남자 도우미의 별명입니다. 소설 <제리>의 주인공은 수도권의 별볼일 없는 2년제 야간대학에 다닙니다. 그녀에겐 꿈이 없습니다.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은 모두 마이너리티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지금 대학을 함께 다니고 있는 우리들 중에서 의사나 변호사가 되거나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하다 못해 꽤 이름 있는 중소기업에만 취직해도 옳다꾸나, 개천에서 용 났네, 잔치라도 열어 줄 태세였던 것이다." (본문 중에서)
"남자들은 대부분 대형 마트의 물류팀 직원이나 컴퓨터 수리 기사 등 이것저것 잡다한 일들을 하는 조그만 업체에 취직하겠지. 아니면 강처럼 호프집 매니저로 일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본문 중에서)
여자들은 사무보조원이 되거나 보습학원 강사, 몸매가 받쳐주는 경우 백화점 판매원, 내레이터 모델이 되는 것이 고작이라는 것이지요.
"서울도 아닌 인천의 2년제 대학 야간반에 재수까지 해서 겨우 들어온 나에게, 꿈이 무엇이냐니."
"여럿이 술을 마시는 이 순간조차도 나는 혼자라는 소외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죽을 때까지 같이 술 마셔 주는 사람이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어."
희망없는 대학생활을 하는 그녀의 삶은 늘 주안역 근처의 호프집에서 시작하여,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시거나 나이트클럽, 노래방을 전전하는 것으로 반복됩니다. 그녀의 삶은 술로 지탱됩니다. 그녀가 사귀던 남자 친구 '강'과 가장 닮은 꼴은 둘다 술을 잘 마신다는 것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수능도 보지 않았을 때,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경멸과 한숨으로 뒤덮였다고 합니다. 사람들과 마주할 때마다 끊임없이 자라나는 소외감과 자괴감에 짓눌려 결국 대학을 선택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하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어느 대학에 다니느냐고 물어왔고, 소외감과 자괴감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남자 도우미가 나오는 노래방에서 돈을 주고 '제리'를 골랐을 때도 당당한 자신감은 생기지 않습니다. 젊은 남자를 돈을 주고 샀지만 마음껏 즐길 수가 없었습니다. 소외감과 자괴감으로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담배, 술 그리고 섹스로 위로(?) 받는 청춘그녀 주변의 사람들의 삶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녀가 사귀다 헤어진 남자친구이자 헤어진 후에도 섹스 파트너로 지내고 있는 '강'은 호프집 매니저입니다. 설레는 마음도 사랑하는 느낌도 없이 만났다 헤어진 두 사람은 헤어진 후에도 서로 필요할 때마다 불러 섹스를 즐기고 헤어지는 무료한 삶을 반복합니다.
"굳이 섹스를 해야 할 만한 이유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지 말아야 할 이유 또한 없었으므로 우리는 계속 섹스만 나누었다." (본문 중에서)
노래방 남자 도우미 생활을 하는 '제리'의 삶 역시 힘겹고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녀와 제리의 만남은 마이너리티끼리의 만남입니다.
"술을 매일 마시는 것도 지겹고, 되도 않는 사람들 이야기 들어주는 것도 지겹고, 여자들 재밌게 해 준다고 혼자서 쇼하는 것도 이제는 정말이지 미쳐 버릴 것 같고…. 일하기 싫어서 미쳐 버릴 것 같은데, 다들 네가 뭐가 힘드냐고, 무슨 대단한 일 한다고 힘든 체하느냐고만 말하니까, 이제 그런 소리 듣는 것 자체도 힘들고." (본문 중에서)그는 노래방 남자 도우미 세계에서도 마이너리티입니다. 여자 도우미들과 달리 남자 도우미들에게는 공짜로 술마시고, 여자들과 즐기고 게다가 돈까지 벌 수 있다는 편견과 환상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화류계로 빠져드는 모든 남자들이 다 선수로 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선수가 될 수 있는 남자들은 대체로 호감형의 외모를 가진, 멋있거나 잘 생기거나 예쁘장한 얼굴이어야 했다. 그리고 성격도 활발하고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는 등 나름의 끼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본문 중에서)
"나도 스무 살에 이 일 시작할 때는 남들처럼 1~2년만 죽 때리며 착실히 돈 모아 그만둘 거란 계획을 했어. 그렇게 모은 돈으로 대학에 가거나 기획사 하나 잘 잡아서 연예인이 되리라는 허황된 기대로 가득했지." (본문 중에서)
"초이스가 없는 날에는 나처럼 일없는 애들이랑 같이 술만 마시고 그렇게 한 푼 두 푼 술값으로 쓰다 보면 돈을 벌기는커녕 빚 안지고 사는 게 다행이지." (본문 중에서)
화장품 사고, 미용실 다니고, 피부관리 받으며 공들여 치장하지만 막상 룸에 나가면 선택 당하는 에이스들은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싹수가 노랗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는데, 어른이 되어 보니 그 말이 딱 맞더라는 것이지요.
술과 섹스로 현실을 벗어날 수 없어
이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 해주는 것은 섹스뿐인듯 보입니다. 그러나 섹스 역시 그들의 삶을 돌려 놓지는 못합니다. 술이 깨면 늘 현실로 돌아오는 것처럼, 섹스 역시 짧은 시간의 만족감이 지나면 곧장 현실로 돌려보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제리와 섹스를 나누며 처음으로 위로와 배려의 느낌을 경험하게 됩니다.
소설 속 주인공 그녀는 결코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누구에게나 환영받고 모두에게 선택되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에이스와 같은 삶을 바라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는 것이지요.
수 많은 사람과 술을 마시고 섹스를 나누어도 그녀 곁에 머무는 사람은 없었으며 늘 혼자였다는 것입니다. 소설은 노래방에서 남자 도우미 제리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하여, 또 다른 노래방에서 섹스를 나눈 제리가 먼저 떠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40대 중반의 독자인 저에게도 적나라한 섹스 묘사가 당혹스럽지만, 야하다는 느낌보다는 책을 읽는 내내 초라하고 슬프고 답답한 마음이 듭니다. 소설의 결말은 흐릿하고 답답합니다.
"강렬한 빛을 피해 눈을 꾹 감았다 다시 떴을 때는 감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입니다. 이른바 <88만원 세대>인 젊은이들의 삶이 흐릿하고 답답하기 때문이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 블로그에서 읽었던 서평에 젊은이들의 팍팍한 삶을 경제학적 지식과 통계자료를 동원하여 설명한 <88만원 세대>보다 훨씬 충격적이었다는 평가가 있었는데, 제 생각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책을 펼쳐든 순간부터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때까지 내려놓을 수가 없겠더군요.
이른바 88만원 세대 젊은이들이 소설 <제리>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처럼 살아가고 있다면, "그들을 해방하고 구원하는 모든 것이 오직 나 자신뿐이라는" 작가의 말은 불편함으로 남습니다.
젊은이들이여, 박수부대로 남지 마라
88만원 세대를 쓴 우석훈은 젊은이들에게 짱돌을 들고 나서라고 선동(?)하였지요. 무기력한 개인으로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토익 책을 덮고 짱돌을 들라고 말입니다.
얼마 전, 읽은 김선주 선생의 책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에 실린 칼럼 '수능 350점 이하만 읽을 것'이라는 칼럼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12년 동안 대학 못가면 인생 끝장이고 학벌이 인생을 좌우한다는 생각을 강요받고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죄인처럼 닦달을 해 모두들 기가 꺽여 푹 주눅이 들어있다."
김선주 선생의 책에 나오는 이 대목도 딱 소설 <제리>의 등장 인물들에게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소설 <제리>의 등장 인물들은 대부분 부자도 아닌데다 공부도 못하고 미모와 몸매도 출중하지 못하니 마이너리티의 조건을 모두 갖춘 열등생인 셈이지요.
같은 책의 '150점 이상을 위한 사회'라는 칼럼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2년간의 교육을 마친 전체 학생의 평균 점수가 92점이고, 이 평균 점수를 가지고는 하위권 전문대 밖에는 못 간다는 엄연한 현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는 30~40만 명의 청소년 그리고 20여만 명의 전문대 입학자가 우리 자녀들의 평균치이다."
김선주 선생은 이런 평균치를 위한 교육정책, 진학지도, 직업 훈련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수능성적 80점에서 100점까지 그리고 80점도 받지 못한 30만 명에 대한 배려가 없으면 우리 사회는 끝내 지탱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들이 각자 행복하고 쓸모있는 시민이 될 수 있어야 '민주사회'라는 김선주 선생의 말에 소설 <제리>에 나오는 열등감에 휩싸인 고단한 젊은 그들의 삶을 비춰보면 여전히 우리는 민주사회에서 살고 있지 못합니다.
또 같은 책에 실린 '너희는 박수부대로 살아라'는 제목의 칼럼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만약 태어나서부터 기회를 얻지 못하고 나라가 적절하게 대책을 세우지 않아 인생의 길목 길목에서 실의와 좌절을 겪게 될 젊은이들이 더 이상 박수부대는 되지 않겠다면 어쩔 것인가. 후배가 뱉은 '그러니까 세상이 한번 뒤집어져야 해요'라는 밀아 칼이 되어 가슴을 후벼 팠다"
젊은 그들이 실의와 좌절을 떨치고 더 이상 박수부대는 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날이 꼭 오리라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제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