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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족두리봉을 배경으로 <고양올레>회원들이 북한산 둘레길 번개걷기를 했다.
북한산 족두리봉을 배경으로<고양올레>회원들이 북한산 둘레길 번개걷기를 했다. ⓒ 고양올레 송근옥

청아한 하늘과 푸르고 장대한 북한산이 맞닿아 교접하는 명징한 풍광 속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매료되고 감흥하는 모습이었다. 하늘은 온통 짙은 에메랄드 바다로 깊고 황홀하게 펼쳐져 우주로 우주로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티끌 한 점 없이 숨 막힐 듯 깨끗한 초자연적 공간의 순결성이 바로 눈앞에서 허공으로 펼쳐져 보였다. 그 속에서 나는 오래 전 간간이 읇조리던 한 편의 시를 까마득한 기억을 더듬어 속으로 중얼거리고 말았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중략)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생략)
(김소월의 초혼 중...)

언젠가 나는 김소월의 '초혼'이란 시에서 가장 절묘하게 기막힌 느낌으로 다가오는 두 글자를 발견하여 가슴 한쪽 깊숙한 곳에 무의식적으로 간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그런데 오늘 같은 날, 이 시구 속의 두 글자 '너무'는 그동안 내 안에 고요히 잠재하고 있던 운명을 떨치고서 내 심장의 급속한 혈류를 통해 나의 감정으로 격하게 솟구쳐 왔다. 그러니까 오늘 같은 하늘과, 오늘 같은 빛과, 오늘 같은 바람이 산과 대지에 어우러져 자아내는 그 미묘하게 소름끼치는 감동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한 언어의 예술이 황홀한 현실이 되어 시나브로 다가온 것이다.

나는 족두리봉, 향로봉, 비봉이 바로 코앞에 훤히 보이는 북한산 둘레길의 아랫자락에서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의 포로가 된 느낌이었다. 무언가 가벼워지면서도 충만해지는 듯한 미묘한 기분... 그 알 수 없는 희열과 쾌감의 느낌 속에 둘레길을 사뿐사뿐 걷고 있었다.

평창마을길 언덕을 오르며... 북한산 둘레길 평창마을길 구간 중 가파른 오르막을 천천히 올랐다.
평창마을길 언덕을 오르며...북한산 둘레길 평창마을길 구간 중 가파른 오르막을 천천히 올랐다. ⓒ 고양올레 송근옥


걸으며 행복했다. 길을 걷다가 전망이 좋은 곳을 지날 때면 모두들 행복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다.
걸으며 행복했다.길을 걷다가 전망이 좋은 곳을 지날 때면 모두들 행복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다. ⓒ 고양올레 송근옥

사람들과 나는 느리고 완곡한 오르막과 조심스런 숲 속의 내리막을 반복하며 둘레길을 누렸고, 음미했다. 질기고 강한 핏줄 같은 뿌리로 흙을 움켜쥔 채 서있는 굽은 소나무 옆을 걸었고, 작은 이파리 겹잎으로 무성한 산초나무 군락사이를 지나치며 걸었다. 싸리나무 길가를 지날 때엔 어릴 적 겨울이면 눈 내린 마당을 쓸기 위해 빗자루를 만들러 산에 오르던 아버지가 떠올랐고, 그 뒤를 졸졸 따라 나서며 좋아라했던 막둥이의 가물거리는 기억도 어렴풋이 났다.

사람들과 나누는 밑도 끝도 없는 무수히 사소한 이야기들이 다 아무렇게나 좋았다. 그들과 아무런 사심 없이 나누는 솔직한 이야기와 웃음이 바람이 되었고, 향기도 되었다. 그들과 나누어 먹은 과일 한 조각, 떡 한 덩어리, 소박한 과실주 한 잔은 아름다운 만찬음식이 되고도 남았다. 그 풍성하고 경이로운 산길에서의 식사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어 각자의 영혼 속으로 스며들어 갔을지도 모른다.

우직하게 커다란 바위 옆을 지나면서 나는 평소 옹졸했던 나의 소심에 대해 생각했고, 반성했다. 바위를 그냥 쳐다보기만 했는데도 문득 스스로에게 겸손해지는 것 같은 순간의 착각이 일어날 정도이니 바위는 산길에서 만난 스승임에 틀림없었다. 그 곁을 흐르는 맑은 계곡물은 졸졸졸 작은 소리를 옹알거리며 흘렀다. 마치 걸음에 장단을 맞춰주는 것처럼 리듬을 타고 흘렀다. 그 소리를 들으며 언덕의 계단을 올라가자니 끈적거리던 땀은 어느새 말끔히 식었고, 무거웠던 걸음은 손오공이 구름을 탄 듯한 기분처럼 한결 가벼워졌다.

길을 걸으니 여물지 않은 부족하고 모자란 마음이 한결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걸으며 생각했고, 걸으며 나도 몰래 마음수양을 했던 모양이다. 그저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눈앞에 놓여 있는 지극히 평범한 산길, 숲길, 마을길을 천천히 걸었을 뿐인 것을...

나는 길을 걸으며 내 의지로서는 아니었지만 비움과 채움을 모두 어렴풋이 체험할 수 있었다. 내 안의 욕심과 이기를 버리기 위해 크게 숨을 내쉬기도 하고, 멀리 보이는 산과 하늘을 보며 맑은 정심을 가다듬어 보기도 했다. 누군가 뭐라 하며 가르치려 하지 않는데도 나는 걸으며 무심코 겸양을 배우려 했고, 모든 대상들과의 관계와 조화로움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자연의 품속에서 누리는 호사스러운 걷기여행은 미숙한 사람을 변화시키며 조금씩 성숙하게 하는가 보다.

참을 수 없는 즐거움... 북한산 둘레길을 걷다가 소나무 그늘에서 쉬며 웃음꽃을 피웠다.
참을 수 없는 즐거움...북한산 둘레길을 걷다가 소나무 그늘에서 쉬며 웃음꽃을 피웠다. ⓒ 고양올레 송근옥


쉴멍 놀멍 걸었다. 북한산 둘레길 '평창마을길'을 걷는 도중 손바닥 위에 사람들을 받치는 모습으로 사진도 찍으며 아이들처럼 재미나게 놀았다.
쉴멍 놀멍 걸었다.북한산 둘레길 '평창마을길'을 걷는 도중 손바닥 위에 사람들을 받치는 모습으로 사진도 찍으며 아이들처럼 재미나게 놀았다. ⓒ 고양올레 송근옥

사람들은 누구랄 것 없이 참지도 않고 시시때때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서로 즐겁고 재미나게 만들기 위해 시키지도 않은 표정과 목소리로 우스꽝스런 몸짓을 하기도 했다. 그들의 가식 없는 그런 순수한 모습들이 참 보기 좋았다. 폼 나게 무게 잡지 않는 유치한 어른들의 어린애 같은 솔직한 그 모습이 정말 좋았다.

'일소일소(一笑一少) 일노일노(一怒一老)'- '한 번 웃으면 한 번 젊어지고, 한 번 화낼 때 마다 한 번 늙게 된다'는 흔해빠진 인간사의 평범한 경구...
나는 푸시시 웃으며 그걸 생각해보았다.

둘레길을 걸으며 발바닥 아래 사가사각 밟히는 이슬 머금은 촉촉한 흙을 감사한 마음으로 밟을 수 있었다. 푸르고 무성한 초록의 빛깔로 환하게 반겨주는 나뭇잎, 풀잎들이 베풀어주는 한량없는 청량한 공기도 흠뻑 마실 수 있었다. 자연은 양심 없는 뭇사람들처럼 이해 타산적이지도, 염치없이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너그러이 내어주며 편안하게 누리라 할 뿐...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청어한 하늘을 바라보며 북한산 둘레길을 걸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청어한 하늘을 바라보며 북한산 둘레길을 걸었다. ⓒ 고양올레 송근옥

오전 8시 반부터 북한산 둘레길을 걷기 시작해서 세 구간의 걸음을 마칠 오후1시 무렵 쯤 아침에 보았던 하늘을 다시 쳐다보게 되었다. 여전히 깊고 청아한 푸른 하늘이 그대로 거기 있었다. 단지 크고 작은 하얀 뭉게구름이 파란 허공 속에서 두둥실 자유롭게 떠다니고 있을 뿐...하늘을 우러러 보니 무심코 한 소절의 노래가사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어색함으로 느닷없이 입가에서 흥얼거리며 흘러나왔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덧붙이는 글 | 지난 9월 25일 <고양올레> 걷기모임에서 북한산 둘레길 옛성길~평창마을길~정릉 사색길 약 10km를 걷고 나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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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에 걷기 좋은 길을 개척하기 위한 모임으로 다음 카페 <고양올레>를 운영하는 카페지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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