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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서를 관장하는 예조판서 자리가 공석이 되자 적임자를 추천해 주길 청한 건 이조(吏曹)의 의례적인 행사였다. 마땅한 인물이 나타나면 사헌부와 사간원은 그가 적임자인지를 살피는 고신서경(告身署經)에 들어가는 당연한 순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상감의 배려로 더 이상의 추한 꼴은 당하지 않았지만 정순왕후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반성보다 병진년(丙辰年)에 있을 선대왕의 제례를 방패막이로 삼아 숨겨놓은 생각을 넌지시 내놓았다.

"자리를 함께 한 여러분들은 내 말을 흘려듣지 마세요. 사가의 옷을 걸치고 내가 화원들의 실력을 탐색한 것은 돌아오는 병진년에 있을 선대왕 제례(祭禮)에 대한 그림 때문입니다. 주상은 수원으로 원행(遠行)하는 행차 준비에 단원을 끌어들이고 화원들을 늘리는 등의 준비가 점입가경입니다만 예판 자린 우리쪽 인물을 앉혀야 어린애같은 주상의 착상을 물리칠 수 있어요. 내 뜻이 여기 있으니 여러분들이 적당한 인물을 천거하세요."

자리를 함께한 중신들은 주위를 돌아보며 입술에 침 바르며 큼큼거렸다. 그들이라고 적당한 인물을 물색하지 않았겠는가. 겉으론 도덕군자로 추앙받은 사람일지라도 한거풀씩 벗기면 세상에 보여선 안 될 일들이 드러나 '서경(署經)'을 치르느라 그 얼마나 애를 먹었는가. '서'는 서명이고 '경'은 거친다는 뜻이다. 오경환을 형조좌랑에 임명할 때는 교첩(敎牒)으로 처리했으니 이런 걱정은 필요없었다.

나라의 법이 고려시대완 달랐다. 고려시대엔 1품부터 9품까지 서경(署經)을 받아야 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선 건국초엔 5품이하 관원만 서경을 받았고, 고신에 대한 격식도 4품 이상의 관원은 관교라 하여 왕이 직접 하사했고 5품 이하 관원은 교첩으로 처리했다.

"어찌 말씀들이 없으십니까. 예판자릴 시파(時派) 쪽에 내어주잔 말씀입니까?"
"우리 쪽에 적당한 인물이···, 없습니다."

"없다니오? 선대왕이 살아계실 땐 아부 잘하는 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없어요? 찾아나 보셨습니까, 이젠 벽파의 중신들은 주상이 던져주는 것만 받아먹습니까?"

형조좌랑 오경환이 슬그머니 나섰다.
"대비마마, 이번 일은 전하의 깊은 생각이 있음을 알 수 있나이다. 대비마마께서 보림원에 납신 것을 알고 혜원을 내보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것은 예판의 임명에 대비마마가 나서는 걸 차단시키려는 뜻이 다분하오니 이번만은 모른 척 하심이 옳은 일이라 보옵니다."

"나도 그러는 게 백 번 옳다 보지만, 선대왕의 제례를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주상이 하는 대로 두고 본다는 것은 궁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증명시키는 것이나 진배없어요. 이보세요, 벽파의 중신들은 내 말을 새겨들으세요. 이번에 우리쪽에서 사람을 내놓지 않으면 주상은 무슨 일이나 마음대로 처리할 겁니다. 귀양지에 있는 정약용을 불러 사헌부에 밀어 넣더니 지금은 어떻습니까? 홍문록에 수찬으로 올렸어요! 장차 중임을 하겠다는 선전포고가 아닙니까. 그런데도 여러분은 두고만 보십니까."

여전히 그 자리에 나온 중신들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들이라고 생각이 없겠는가. 말께나 하는 벽파의 수뇌부들은 귀양길에 들어서거나 벼슬길에서 떨어졌으니 조정의 실세로 내세울만한 자가 없는 건 사실이었다.

"액정서 별감 윤치호의 움직임이 가볍다는 민홍섭의 경고가 있어 거사 자금을 다른 곳에 옮겼기 망정이지 큰일 날 뻔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보림원에 나간 게 사내가 그리워선 줄 알았나요? 중인(中人)을 이용하란 무애 스님의 권면이 없었다면 벌써 조정은 주상의 수중에 들어갔을 겁니다."

중신들은 분위기가 마뜩찮은지 헛기침만 큼큼거렸다.
"아무리 주상의 총애가 극진하다 해도 정약용이 나서는 걸 막아야 합니다. 비록 그의 자리가 사헌부 수찬에 불과하다 해도 크게는 서경권(署經權)을 행사할 수 있는 시사(侍史)나 잡단(雜端)에 속했다는 걸 잊어선 안 됩니다. 스무 명이나 되는 감찰들이 정약용 밑에 있음을 기억하세요. 이번 뿐만 아니라 장차의 일에도 굽이굽이 덫을 놓을 게 뻔하니 뭣보다 그 자의 허물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오경환도 그 점에 대해 소신을 밝혔다.
"대비마마, 신도 사암(俟菴)의 허점을 찾아나섰으나 티끌만한 점도 발견할 수 없어 지금껏 생각이 많사옵니다. 사암이 사헌부에 적(籍)을 두고 있으나 그가 한때 서학(西學)에 몰입했던 점에 비춰본다면 적잖은 허물이 나타날 것으로 보오니 대비마마께 좋은 소식을 올릴 수 있으리라 보옵니다."

"참으로 답답들 하십니다. 고작 사헌부의 수찬 하나를 잡지 못해 이 난립니까. 그리고 우리 쪽에서 내세울 만한 사람이 그리도 없습니까? 4백년간이나 호령해 오던 사대부들의 위세는 어디 갔습니까."

정순왕후는 답답하다는 듯 도리질을 치더니 말을 끊었다.
"그럼, 이렇게 하세요."

고개 숙인 중신들이 머릴 들었다.
"예전···, 호조판서로 있던 민훙섭(閔弘燮)을 추천하세요."
"예에?"

너무 뜻밖이었다. 민홍섭은 고신과 사조(四祖)의 단자와는 상관없이 호조판서 자리에서 물러난 인물이다. 조선시대 6조(六曹)의 하나인 호조(戶曹)는 정2품 아문으로 호구 · 전지 · 조세 · 재물 등을 관장했다.

이곳에선 판적사 · 회계사 · 경비사 업무가 있었는데 특히 회계사는 중앙과 지방관청에 저축된 금전이나 식량 수지계산 및 사무인계 등을 맡았다. 거기에다 세폐색(歲幣色)까지 은연 중 관리했었다. 이것은 계절마다 중국황제에게 헌상하기 위해 가져가는 예물에 관한 사무였다.

정순왕후가 오래도록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건 민홍섭이 오래도록 그녀와 벽파를 위해 일해 온 충복이기 때문이었다. 지난날을 기억하며 그를 좀더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에 다시 한 번 비점을 찍는다.

"내가 그 사람을 가까이 두었던 건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벽파의 중신들이 제 주머닐 채울 때 그 사람은 나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사람입니다. 그에게 있는 허물은 모두가 나로 인한 것이지 제 주머닐 채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어요."
"하오나···."

민홍섭이 호조판서였을 때 내명부를 이끌어오던 정순왕후에겐 상당한 돈이 필요했었다. 호조판서는 정순왕후의 고민을 풀어주기 위해 중인(中人)이나 서민을 쥐어짜는 고리대금업을 시행하다 보니 정부의 관료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호조판서의 높은 이자율에 제한정책으로 나선 것이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정부의 고위 공직자를 비롯해 사대부가의 사람 중 이자놀이를 않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백성들은 고리대금에 허리가 휘는데 이 같은 사정을 알고 있는 호조판서가 이자놀이를 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는 데다 나라가 망해가는 수순이라고 볼 수 있나이다. 전하, 지금 고금리를 잡지 못하면 큰 위기가 올 것이니 호조판서를 파직하심이 옳은 일이라 보여지옵니다. 통촉해 주시옵소서!"

시파의 젊은 논객이 들고 일어나자 벽파(僻派)의 중신들은 콧방귀를 뀌었다.
"허어, 그것참. 충신났구먼 그래. 우리가 누굽니까. 글 좋아하는 사대부에요. 선비들이란 본시 이슬을 받아먹고 사는 존재가 아닙니까. 그러니 배운 도둑질이란 게 그저 책 읽고 글 쓰는 일이 아닙니까. 선비들이 생활을 알면 얼마나 알며 돈을 밝히면 얼마나 밝히겠나이까. 신들은 다달이 나오는 녹봉이나 챙겨 근근이 살며 이대로 가다간 집주름에게 적당한 집 한 칸 구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채놀이에 손을 댄 게 잘못입니까?"

자기 돈 갖고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비싼 이자를 받고 빌려주는 게 죄가 될 수 없다는 점에 힘을 주었다. 조선의 양반 치고 장리(長利) 안 놓은 이가 어디 있으며, 만약 자신들이 장리를 안 놓는다면 불쌍한 백성들은 흉년에 어떻게 살겠느냐 목소릴 높였다. 그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조선시대엔 양반들에게 있어서 사채놀이는 쉽게 목돈을 만들 수 있는 길이었다. 민홍섭이 호조판서에서 밀려난 건 연리 50%라는 살인적인 사채이자율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정순왕후는 그를 내세웠다.

"세상 사람들은 호조판서가 자리를 이용해 높은 이자로 배를 채웠다지만 그 사람이 힘쓴 탓에 내가 다스리는 내명부 살림살이가 어려운 일 없이 지나왔어요. 아랫것들이 나누는 얘길 들으니 사대부들은 각기 장리쌀과 사채놀이로 잇속을 차린다는데 민홍섭의 허물이 드러난 건 하나의 실수지 파직 당할 일이 아니에요. 내명부를 위해 아니, 나를 위해 일한 게 그 자릴 내놓을 일입니까. 지나간 일이지만 호조판서를 물러난 건 옳은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 예판자리에 추천을 하세요!"

정순왕후의 추달이 말의 옆구리를 박차는 것 같아 벽파의 중신들은 다시 의논을 모아 민홍섭을 예판자리에 천거했다. 울며 격자 먹기 식의 추천이었다.

그에 대한 소문이 돌자 한 통의  고변(告變)이 사헌부 수찬 정약용에게 전해졌다. 거기엔 기생의 필체로 보이는 매끄러운 글구가 쓰여 있었다. 내용이 의미심장했다.

거상조 나린 후에 소리하는 어린 기생
한 손으로 머리받고 이마를 반쯤 숙여
우조라 게면이며 소용이 편락이며
춘면곡 처사가며 어부사 상사별곡
황계타령 매화타령 잡가 시조 듣기 좋다

정약용은 글귀를 보면서 생각을 가다듬었다. 이것은 12가사로  기방(妓房)을 찾는 오입쟁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곡이었다. 거상(擧床)은 연회 때 상을 받기 전, 연주하는 것으로 대개 우조(羽調), 계면(界面), 소용(騷聳), 편락(編樂) 등이 가곡창이었다.

기방의 12가사 곡명인 춘면곡(春眠曲)이나 처사가(處士歌), 어부사(漁父詞), 상사별곡(相思別曲), 황계(黃鷄)타령, 매화타령은 주색을 밝히는 자들이 늘 선호하던 곡이었는데 이것들을 무슨 이유로 사헌부에 가져온 것인가. 정약용은 서찰을 한쪽에 내려놓고 마흔이 돼 보이는 사내에게 물었다.

"이걸 누가 보냈는가?"
"산홍(疝紅) 아가씹니다. 민홍섭이란 자를 예판에 추천했다는 말을 들으시고 우리 아가씨가 나으리께 서찰을 보내신 것입니다."

[주]
∎고신서경 ; 인사당담 부서에서 관원을 선발해 사헌부와 사간원 대간에게 보내 적임자인지를 조사케 하는 인사청문회
∎기방 12가사 ; 기방을 찾은 오입장이들이 좋아하는 열두 가지 가사
∎시사(侍史) ; 윗사람을 곁에서 모시면서 문서를 정리하는 사람


#추리, 명탐정,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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