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보강 : 1일 오후 7시 30분]<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원제목 <덕혜희>)의 작가인 일본인 혼마 야스코는 50만 부 이상 팔린 소설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덕혜옹주>)가 자신의 책 수십 곳을 무단도용했다고 주장했다.
<오마이뉴스>가 단독으로 입수한 혼마 야스코의 '표절 검토 자료'에 따르면 "소설 <덕혜옹주>는 어떤 출처 표시도 없이 혼마 야스코가 <덕혜희>를 쓰면서 독자적으로 취재·조사한 내용을 무단으로 사용했다"고 보고 있다. 이런 대목이 40여 곳에 이른다는 것이 혼마 야스코측의 판단이다(자세한 내용은
딸림기사 참조).
혼마 야스코는 이렇게 비교 검토한 결과를 바탕으로 조만간 저작권과 관련된 소송 등을 제기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법률대리인인 이은우 변호사(법률사무소 '지향')는 "혼마 선생의 책 내용을 그대로 갖다 쓰면서 출처도 밝히지 않는 등 인용의 기본원칙이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며 "저작권 침해가 중대하기 때문에 소송 등 법적으로 가능한 대응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혼마 야스코는 지난달 25일 <한겨레> 기고글에서 "그 소설은 난해한 소 다케유키의 시를 비롯하여 내 책의 내용을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무단차용했다"고 공개적으로 '표절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하지만 <덕혜옹주> 출판사측은 "책에서 혼마 야스코의 책을 참고했다고 밝혔기 때문에 소설 <덕혜옹주>가 표절 시비거리가 안 된다"고 의혹을 일축했다. 저자인 권비영씨도 "표절은 없었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40곳 이상, 독자적으로 취재·조사한 내용 무단 사용"<오마이뉴스>가 입수한 혼마 야스코의 '표절 검토 자료'는 B4 32쪽에 이르는 분량이다. 혼마 야스코는 자신이 일본어로 쓴 <덕혜희>(1998년)와 이것의 번역본인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이훈 옮김, 2008년 5월), 소설 <덕혜옹주>(권비영, 2009년 12월)를 비교검토한 내용이다.
혼마 야스코는 이렇게 비교 검토한 끝에 소설 <덕혜옹주>가 40여 곳에서 자신의 책내용을 '무단도용'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자료는 소설 <덕혜옹주가>가 출간된 직후 1차적으로 검토한 것이어서 향후 표절 의혹을 받는 대목이 더 늘어날 수 있다.
이와 관련, 이은우 변호사는 "1차 자료를 작성한 이후에 추가적인 검토를 한 결과 소설 <덕혜옹주>는 <덕혜희>의 전반을 무단도용했다는 게 혼마 선생의 판단"이라며 "특히 권비영씨는 저작권 침해 논란을 의식해 일부 내용을 변경, 왜곡했다"고 말했다.
표절 의혹 40여 곳 중에는 혼마 야스코가 독자적으로 취재·조사했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많았다. 혼마 야스코는 <덕혜희>를 쓰기 위해 수년간 한국과 도쿄, 쓰시마를 돌아다니며 관련자료들과 증언들을 조사·취재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덕혜희>는 덕혜옹주의 삶을 처음으로 복원한 저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저자인 권비영씨가 자신의 책과 언론 인터뷰 등에서 "<덕혜희>는 가장 완벽한 참고자료였다"고 고백했지만, 그것이 '표절 논란'을 잠재울 지는 미지수다
먼저 덕혜옹주가 창덕궁 관물헌에서 보낸 일상을 서술한 대목을 보자(참고로 여기에서 출처를 나타내는 ①과 ②는 각각 혼마 야스코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와 권비영씨의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를 가리킨다).
①"만 8살 된 덕혜는 매일 아침 7시 반에 일어나 어머니와 함께 세수를 하고, 낙선재로 가서 순종·윤비 부부에게 아침 문안을 드린 후 관물헌으로 돌아가 아침을 먹는다. 그 후 9시 반부터 한효순·민영안·이혜순 세 학우와 함께 스미나가·사사키 두 교사로부터 일본어·산수·작문·그림 등을 배우고, 점심을 마치고 나서는 효덕전에 가서 참배를 한다." (65쪽) ②"옹주와 귀인 양씨는 부왕의 혼령을 좇아 창덕궁 관물헌으로 거처를 옮겼다. (중략) 오전 7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서 세수하고 소복에 검은 댕기를 하고 낙선재로 갔다. 오라버니 순종황제에게 문안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볼 때마다 눈물을 보이는 순종 앞에서도 옹주는 의연했다. 문안을 올린 후에는 다시 관물헌으로 돌아와 아침상을 받았다." (77쪽~78쪽)표현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두 내용은 흡사한 구석이 많다. 혼마 야스코는 "자신이 조사·정리한 내용을 권비영씨가 발췌해 도용했다"고 주장했다. 덕혜옹주가 도쿄로 유학을 떠날 때 경성역에서 배웅하는 장면도 그렇다.
①"유학 때문에 도쿄에 가시기로 정해진 창덕궁 덕혜옹주는 3월 28일 오전 10시 경성역을 특별열차로 출발하셨다. 수행은 스미나가 통역, 궁년 2명, 하인 1명, 고용인 1명을 합쳐 모두 6명으로, 한 장 기사장이 도쿄까지, 민 이왕직은 대전까지, 시노다 차관은 시모노세키까지, 오야마 히노데 소학교 교장 및 다수의 관심은 수원까지 배웅하였다. 이날 히구데 소학교의 낯익은 친구 100여 명과 관민까지 많은 사람들이 역에서 배웅하였다. 덕혜옹주는 연보라색 가는 비단실로 짠 지리멘 소재의 후리소데에 보라색으로 커다란 장미가 그려진 (하략)" (70쪽) ②"1925년 3월 27일 오전 10시 30분, 경성역에 특별열차가 마련됐다. 많은 사람들이 옹주의 유학을 전송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히노데 초등학교 교장과 100여 명의 학생들도 환송을 나왔다. 환하게 웃으며 전송하는 그들의 눈빛에서 황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이 엿보였다. 연보라색 일본식 비단옷을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은 덕혜가 사람들을 향해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영락없는 일본 여학생의 모습이었다. 시종장 한창수, 개인교사 스미나가, 나인 두 명, 비서 두 명 등 모두 여섯 명이 그 열차에 올랐다." (129쪽~130쪽) 윗 부분은 혼마 야스코가 발굴한 곤도시르스케의 <이왕직비사>에 나오는 대목이다. 곤도시르스케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왕적을 관리하던 직제인 이왕직의 비서관을 지냈다. <이왕직비사>는 이왕직 비서관을 지낸 그의 회고록이다. 그래서 <이왕직비사>는 <덕혜희>에서 비중 있게 인용됐다. 소설 <덕혜옹주>에서는 이러한 출처는 밝히지 않았다.
일반서술을 대화내용으로 바꾸기도 혼마 야스코는 지난달 25일 <한겨레> 기고글에서 "내 책의 내용을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무단차용하면서도 표현을 바꾸는 식으로 저작권법상의 그물망을 피하려 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가 독자적으로 취재·조사한 내용을 표현만 조금씩 바꾸어 표절 문제를 피해가려고 했다는 얘기다.
①"다케유키가 대마도로 갈 때 어머니가 준 돌아가신 아버지의 그림 속에 한 장의 색종이가 있었는데, '성실이란 모든 일의 처음과 끝이요, 성실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라는 <중용>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121쪽) ②"그에 비해 대마도는 늘 쓸쓸한 곳이었다. 백작의 아들로 부러움 없이 살기는 했지만 몸에 밴 진한 추억이 없었다. 그를 지탱해준 것은 어머니가 남겨놓은 아버지의 글이었다. '성실이란 모든 것의 시작이며 끝이요, 성실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 다케유키는 늘 그 말을 품고 살았다." (257쪽) ①"가을에 학교가 시작되어도 가고 싶지 않다며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서 식사하러 나오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밤에는 심한 불면증으로 어떤 때는 갑자기 밖으로 튀어나갔는데, 놀라서 찾으려고 하면 뒷문에서 아카시카미츠케 쪽으로 걸어가고 있던 적도 있기 때문에, 보통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정신과 선생에게 왕진을 부탁하였습니다. 간호사를 붙여 당분간은 오이소 별장에서 정양하게 했습니다. (중략) '빨리 건강해지셔서......'라고 침대 머리맡에서 무릎을 꿇고 몇 번이나 눈물을 흘리며 말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마침내는 '조발성 치매증'으로 진단받았습니다." (101쪽~102쪽) ②"중얼대거나, 울거나, 지쳐 있거나, 낙담해 있거나, 평온한 표정을 짓는 날이 거의 없었다. 때로는 밤이슬을 맞고 사라지는 날도 있었다. 덕혜를 가엾게 여긴 마사코가 정성을 다해도 차도가 없었다. (중략) 영친왕은 덕혜를 정신병원에 데려가 보기로 결단을 내렸다. 덕혜는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따랐다. 조발성 치매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의사는 정양하기를 권했다. (중략) 영친왕은 의사의 권고를 받아들여 덕혜를 오이소 별장으로 보냈다. (중략) 간호사 한 명과 함께 덕혜는 저택을 떠났다." (192쪽) 덕혜옹주의 '조발성 치매증' 발병과 오이소 별장에서 휴양한 것 등은 혼마 야스코가 독자적으로 취재·조사한 내용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소설 <덕혜옹주>는 어떤 출처표시도 하지 않았다.
또한 혼마 야스코는 "소설 <덕혜옹주>가 <덕혜희>에서 서술한 대목의 일부를 대화내용으로 바꾸는 수법을 동원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소 다케유키의 소년시절을 묘사하는 대목이 대표적이라는 것이다.
①"쿠로다 다케유키가 입학한 것은 당시 화족이 다니는 학습원이 아니라 (중략) 소학교 5학년이 되던 때에 일본 세이비학교로 전학하였다. 일본 세이비 학교란 소 다케유키가 <세이비의 정신>이라는 제목을 붙인 문장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이 학교에 대하여 '도쿄의 서쪽 근교, 호리노우치의 조사당에서 걸어 내려가는 길 오른쪽에 日本濟美學校라 쓴 굵은 글씨의 문표가 보인다. 단풍나무와 벚나무, 떡갈나무를 섞어서 조림한 수풀을 지나 작은 개천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면, 왼쪽에 청명못의 수면이 반짝거린다. 짧고 급경사가 진 언덕을 오르면 언덕 일대에 잘 정돈된 소나무 숲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목조의 하얀 학교 건물, 교장 선생님의 사택이 있는 학생들의 기숙사 (중략)'라고 쓰고 있듯이, (하략)" (113쪽) ②"'나는 열한 살 때 대마도로 건너갔소. 부모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이었지. 그곳에서 키비하라 초등학교에 다녔고, 그 전에는 도쿄의 세이비학교에 다녔는데 그 후로도 늘 그곳이 그리웠소. 단풍나무와 벚꽃이 무척 아름다운 곳이었지. 돌다리를 건너면 잔잔한 호수가 있고 야트막한 언덕길을 오르면 솔밭 사이로 교장선생님의 목조사택이 보였소. 그 옆에 기숙사가 있었고......'" (256쪽)
'눈에도 구부러지는 대나무' vs. '눈에도 휠 것 같은 대나무'소설 <덕혜옹주> 239쪽과 241쪽에는 '고젠사마'라는 이름이 나온다. 이는 덕혜옹주가 소 다케유키와 결혼한 후 사용된 호칭인데, 혼마 야스코의 취재로 처음 밝혀낸 내용이다.
①"소학교 담임은 코메다 타카타라는 선생으로 '자세에 대해서만 주의를 주셨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케유키 소년은 키가 훤칠하게 커서 등이 굽은 듯했다. 히라야마 타메타로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별명을 잘 붙였는데 다케유키에게는 '하얀 눈에도 견디지 못하고 구부러지는 대나무 도련님'이라 했다고 한다. 자세 이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성적이 우수한 아이였던 것 같다." (120쪽) ②"'나는 대마도에서 7년을 보냈소. 초등학교 땐 강마르고 자세가 좋지 못해서 선생님의 꾸중을 자주 들었소. 똑바로 앉으라고 말이오. 친구들은 나를 눈에도 휠 것 같은 대나무 같다고 놀렸지.' 덕혜가 쿠쿡대고 웃었다. '하지만 공부는 아주 잘했다오.'" (257쪽) 혼마 야스코가 취재·조사과정에서 단독으로 발굴한 <히라야마 타메타로 일기>에는 덕혜옹주 부부가 쓰시마를 방문한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소설 <덕혜옹주>는 출처표시 없이 비슷한 내용을 서술해놓았다.
①"11월 1일 (중략) 일장 연설이 있었다. 덕혜 부인의 기념 식수도 있었다. 식수한 나무 가운데 하나는 내가 기증한 것으로, 옛날 다케유키 사마와 세이치를 데리고 시라타케야마에 올라 캐가지고 와서 집에 심었던 오엽송 4그루 가운데 하나이다. 오래오래 번영하기를 기원한다." (165쪽~166쪽) ②"다케유키는 대마도 여학교에서 연설을 했고 덕혜는 기념식수를 했다. 잘 생긴 오엽송이었다. 다케유키는 그 나무가 잘 자라도록 마음 속으로 빌었다." (260쪽) 또한 여자학습원의 1년 선배인 소마 유키카의 <마음에 놓은 다리>라는 책에는 '토모에갓센'이라는 놀이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음은 <덕혜희>에서 인용한 대목이다.
"빨강·흰색·노란색의 어깨띠를 메고 상대방의 깃발을 빼앗는 놀이입니다. 그런 놀이도 같이 해보자고 권유하였지만 교실에 그냥 앉아 계셨습니다." (77쪽) 이 대목이 소설 <덕혜옹주>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변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 그래 덕혜님도 같이 하자고 하자.' 덕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토모에갓센은 빨강, 흰색, 노란색의 어깨띠를 메고 상대방의 깃발을 빼앗는 놀이였다." (150쪽)이와 동일한 사례가 더 있다. 혼마 야스코가 <덕혜희>에서 인용한 소마 유키카의 회상이 거의 그대로 소설 <덕혜옹주>에 옮겨졌다.
①"내가 덕혜님에게 '내가 당신 입장이라면 독립운동을 하고 있을 텐데, 왜 당신은 하지 않나요?'라고 물어도 가만히 계실 뿐이었습니다." (77쪽) ②"그들 중 한 명이 어느날 덕혜에게 물었다. '도쿠에히메, 당신은 왜 여기 있나요? 내가 당신이라면 조선에 가서 독립운동을 했을 거예요.' 덕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153쪽)
그밖에도 ▲태평양전쟁 이후 다케유키의 생활상 ▲동경공습 시 다케유키 저택 안의 모습 ▲덕혜옹주를 입원시켜야 했던 패전 직후의 상황 등을 묘사하거나 ▲덕혜옹주가 이혼한 뒤 성이 바뀐 경위를 서술한 대목도 '무단도용' 의혹을 받고 있다.
"독보적으로 발굴한 소 다케유키 시들도 무단도용... 심지어 오역도"혼마 야스코의 <덕혜희>에는 소 다케유키의 시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 시들은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혼마 야스코는 그 가운데 '한회'(閑懷)라는 시를 일본 <고사기(古事記)>에 나오는 내용과 연관지어 해석했다. 그런데 이것이 통째로 소설 <덕혜옹주>에서는 다케유키가 덕혜옹주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 변주됐다.
①"어느 날, 야마사치 히코(호호데미-편집자주)는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싶어져 형의 낚시 바늘을 빌려 바다로 나갔지만 결국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귀한 낚시 바늘까지 잃어버렸다. 그런데 낚시 바늘을 되돌려주지 못하는 것을 형인 우미사치 히코가 아무리 해도 용서해주지 않기에 걱정하던 나머지 야마사치 히코가 바닷가에서 울고 있자, 시오쯔치의 신이 와서 까닭을 묻고는, 악어를 따라 바다 속 궁전으로 가서 문 옆의 나무에 올라가 기다리라고 가르쳐 주었다. 야마사치 히코는 가르쳐 준대로 바다 속 궁전 문 가까이에 있던 샘 옆의 향나무 위로 올라가 물 길러 온 시녀의 물통에 가지고 있던 구슬을 던졌다. 그렇게 해서 토요타마히메와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사랑으로 맺어진다. 토요타마히메는 해신의 딸로 야마사치 히코는 해신의 사위가 되어 3년을 보내지만, 잃어버린 낚시 바늘을 찾은 후 지상으로 돌아가 그를 괴롭혔던 형 우미사치 히코를 복종시키게 된다. 그곳에 그의 아이를 가진 토요타마히메가 출산을 위해 해변으로 올라와 무사히 남자아이를 낳지만, 남편인 야마사치 히코가 아이 낳는 산실을 들여다보지 말라는 금기를 어겼기 때문에, 그녀는 갓난아이만 남겨두고 해궁으로 돌아와 버린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는 이별로 끝난다." (192쪽~193쪽)②"아주 먼 옛날, 호호데미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지. 형의 낚시바늘을 빌려 바다로 나간 호호데미는 오히려 낚시바늘만 잃어버린 채 돌아왔지. 형은 불같이 화를 냈고, 호호데미는 바닷가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었소. 그때 신이 나타나, 악어를 타고 바닷속 궁전으로 들어가서 문 옆의 나무에 올라가 기다리면 낚시바늘을 찾을 수 있다 일러주었소. 그런데 호호데미는 그만 그곳에서 물 길러 오는 시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고 말았지. 그녀가 해신의 딸 토요타마히메라는 것도 모른 채. 그녀에게 눈멀어 3년 동안 사랑을 나누던 호호데미는 어느 날 잃어버린 낚시바늘을 떠올리게 되었소. 그는 해신의 도움을 받아 지상으로 잠깐 오게 되었지. 그때 그의 아이를 가진 토요타마히메도 출산을 위해 해변으로 갔소. 그녀가 남편에게 말했지. 절대로 자신이 아이 낳는 모습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그렇지만 너무도 궁금했던 호호데미는 그 약속을 어기고 말았소. 그를 닮은 남자아이를 낳은 토요타마히메는 분노하여 갓난아이만 두고 해궁으로 돌아가 버린다오. 그들의 사랑이 끝난 것이지. (하략)" (381쪽~382쪽) 또한 소설 <덕혜옹주>는 혼마 야스코가 발굴하고 해석한 소 다케유키의 시를 무단으로 사용했다. '한회'라는 시의 일부를 언급한 대목이 대표적인데, 원문에 있는 '붉은 서까래에'라는 표현을 '붉은 서까래 아래'로 조금 바꾸었을 뿐이다.
①"그리운 아내여, 해궁의 회랑에도 바닷물 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 (중략) // 당신은 외딴집 붉은 서까래에 / 내가 준 하얀 진주를 걸어놓고 홀로 한숨짓고 있는가" (191쪽~192쪽) ②"그리운 아내여. / 해궁의 회랑에도 바닷물 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 당신은 외딴집 붉은 서까래 아래 / 내가 준 하얀 진주를 걸어놓고 홀로 한숨짓고 있는가" (380쪽) 시 '내 꿈은 대마도로 이어진다'와 '사미시라'는 소 다케유키가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면서 무단도용됐다는 것이다.
①"<내 꿈은 대마도로 이어진다>라는 제목의 시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안개가 걷혀온다 / 아소만의 포구마다 / 고기잡이 어선들이 지금 막 돌아오고 있다 / 새벽하늘은 장밋빛으로 / 시라타케 산을 일찍이도 물들이고 있다 // 내 꿈은 대마도로 이어진다 / 남풍에 실려온 쿠로시오 큰 물결 파도소리가" (131쪽) ②"'제목은 내 꿈은 대마도로 이어진다라오. 음...... 안개가 걷히는 아소만 포구. 고기잡이 어선들이 돌아오고 있다. 새벽하늘은 장밋빛, 시라다게 산을 물들이고 있다. 내 꿈은 대마도로 이어진다. 남풍에 실려온 쿠로시오의 큰 파도소리......'" (259쪽) ①"7. 사미시라는 영혼과 비슷해서 / 사람의 숨결로 타고 온다 한다. / 한번 사람 맘 속에 들어가면 / 오래 눌러 앉아 나가지 않는다 한다." (199쪽) ②"'제목은 '사미시라'라고 해두었소.' '사미시라 (중략)' '사람 마음 속으로 들어와서 오랫동안 나가지 않는 존재를 뜻한다오. 영혼처럼 사람의 숨결을 타고 와서 머무는 존재요.'" (272쪽~273쪽) 심지어 소설 <덕혜옹주>가 소 다케유키의 시를 잘못 번역했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덕혜희>와 <덕혜옹주>에 인용된 '한회'라는 시는 상당히 다르게 번역돼 있다.
①"바람이 갑자기 인다. 그 해궁의 문 옆 향나무 가지에. // 파도가 쳐 올라온다. 내 배가 있는 곳간 밖까지. / 바다 위로 흰 구름이 북쪽을 향해 흘러간다. / 밀물도 북쪽으로 서둘러 흘러간다. / 그리운 아내여, 해궁의 회랑에도 바닷물 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 많은 새들이 무리지어 날개치고 있는가. / 당신은 외딴집 붉은 서까래에 / 내가 준 하얀 진주를 걸어놓고 홀로 한숨짓고 있는가. // 그리운 아내여, 이젠 오갈 길마저 끊어져 / 사랑하는 아이를 나는 그저 안고 내내 서있을 뿐이오." (191쪽~192쪽)②"바람 불지 않는 계수나무 가지에 / 파도 치지 않는 선창의 바깥 / 구름은 바닷속을 파고들고 / 물살도 급히 흘러가는데 // 사랑스런 아내요, 울려요. 수많은 새들이 날갯짓을 하는구려 (중략) / 사랑스런 아내여 / 떠나지 말아줘요 / 사랑하는 자식들을 우리가 품어야 되리" (390쪽) 혼마 야스코측 "상업주의로 덕혜의 삶 왜곡"... 출판사측 거듭 "표절 없었다"이은우 변호사는 "<덕혜희>는 혼마 선생이 직접 취재하고 발굴하는 공을 들여 만든 저작물"이라며 "하지만 소설 <덕혜옹주>는 저작권법으로 봤을 때도 인용의 허용범위를 훨씬 넘어섰다"고 지적했다.
이 변호사는 "작가와 출판사측이 <덕혜희>를 1차 사료로 썼다고 해명하는 것은 표절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소설 <덕혜옹주>는 (표절의) 양과 질에서 모두 문제가 되는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이 변호사는 소설 <덕혜옹주>가 사실을 왜곡했다는 주장도 내놓았다. 그는 "일본에서 산 삶을 지옥으로 보거나 조선인 방식을 강요해 딸과 사이가 안 좋은 것으로 묘사했다"며 "이는 민족감정을 이용해 덕혜옹주의 삶을 왜곡한 상업주의"라고 지적했다.
이 변호사는 "심지어는 수면제를 먹여 한국으로 탈출시키려고 했다거나 한국으로 탈출하기 위해 스스로 미친 척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이것은 덕혜옹주 가족들에게 매우 모욕적인 것이고 명예훼손이 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혼마 선생은 저작권 침해뿐만 아니라 상업적 책에 의해 덕혜옹주의 삶이 왜곡되고 온전하게 드러나지 못한 것에 크게 상심하고 있다"며 "자신의 취재에 응한 분들에까지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소설 <덕혜옹주>를 펴낸 다산책방의 한 관계자는 혼마 야스코의 '표절 검토 자료'와 관련해 "저쪽에서 그걸 가지고 소송한다고 하니까 소송이 진행되면 우리도 그걸 반박하기 위한 자료를 (법원에) 제출할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며 "'표절은 없었다'는 우리의 의견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한편 소설 <덕혜옹주>는 덕혜옹주의 결혼식에 참석한 시노다 차관을 '죠다 차관'으로, 미우라 여사를 미우라 공사로 잘못 표기했다. 또 도쿄공습을 피해 피난 간 '시오바라'라는 지명을 '시오하라'로 잘못 적었다.
혼마 야스코측은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작가 권비영씨가 제대로 취재나 조사를 하지 않은 채 혼마 선생의 책을 표절했다는 증거들"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