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의 야경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5~6년 만에 경남 진주를 찾았다. 진주성 앞에서 내려다보이는 남강 물은 유등축제 때문에 띄워놓은 장식물들과 더불어 루미에르 축제를 뽐내는 듯 찬란한 빛의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물론 수년 전에 새로 들어선 높은 아파트 건물들이 고전적인 분위기의 촉석루와 부조화를 이루어 풍경을 망쳐 놓았다. 하지만 진주성 옆에 서 있는 변영로의 논개 시비는 여전히 도도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거룩한 분노는종교보다도 깊고불붙는 정열은사랑보다도 강하다아 강낭콘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 변영로, <논개> 일부수주에 대한 추억이 있다. 대학 강사시절 가르치던 대학 교양과목 <국어> 책에 수주의 '酩酊40년'에 수록된 수필 '백주에 소를 타고'라는 유명한 글이 있었다.
술을 좋아하는 수주 변영로와 친구들인 염상섭, 오상순 등이 동아일보 편집국장 송진우가 준 돈 50원으로 성균관대학교 뒷산 계곡에서 술을 마시다가 술에 취해 호기를 부리며 옷을 찢어 버리고 농부가 소나무 밑에 묶어놓은 소를 타고 명동을 향해 가는 우리나라 최초의 스트리킹 풍경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그러한 수주가 촉석루에 놀러왔다가 의암과 논개의 사당인 '의기사'를 보고 지은 시가 바로 <논개>다.
진주여행은 10월 초가 좋다. 왜냐하면 이 무렵에 남강 유등축제와 개천예술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유등축제는 '癸巳殉義'와 연관성이 있다. 1593년 진주대첩에서 이긴 다음 해 6월 왜군 10만 명의 침입에 의해 진주성이 함락되고 약 7만 명의 진주백성들이 나라를 지키다가 죽었다. 계사순의 이후로는 당시 순절한 사람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남강에 유등을 띄었다. 이러한 전통에서 현재의 남강 유등축제가 열리게 된 것이다.
1592년 10월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약 3800여 명의 조선군은 2만 여명의 왜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펼쳐 결국 왜군을 물리치는 역사적인 진주대첩의 승전고를 울렸다. 금년에도 10월 1일부터 12일까지 초혼점등, 소망등 달기, 유등 띄우기, 전통등 전시, 세계 풍물등 및 한국등 전시 등의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질 예정이다.
또 10월 3일부터 10일까지 '개천예술제'가 열린다. 개천예술제의 역사는 해방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9년 진주에서는 정부수립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제1회 영남예술제가 개최되었고, 1959년부터는 개천예술제로 명칭을 바꾸어 매년 열리고 있다.
1983년부터는 경상남도 종합예술제로 승격되어 개제식, 가장행렬, 예술경연(국악부, 시조부, 문학부, 무용부, 음악부, 연예부, 미술부, 연극부, 사진부), 퓨전 콘서트 '신드럼', 실버페스티벌, 진주실크패션쇼, 진주와광대 공연, 진주 ․ 삼천포 농악 축제, 진주가요제 등이 펼쳐진다. 올 행사의 피날레는 10월 8일 진주성 특설무대에서 진행되는 '진주성 전투 재현행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올해는 제91회 전국체전이 10월 6일부터 12일까지 진주종합운동장 등 62개 경기장에서 열려 더욱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 것으로 생각된다. 우연히 특강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하러 간 남강 둔치 근처의 식당가 골목에는 몰려드는 인파와 그들이 타고 온 자가용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유를 알아보니 <콘서트 7080>(KBS 1TV) 야외공연이 제91회 전국체전을 기념하여 남강둔치에서 열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녁식사로는 광어회와 별미인 전어회를 먹었다. "집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전어회를 바닷물이 좋기로 소문난 통영, 거제도와 가까운 진주에서 먹게 될 줄이야. 사실 전어는 9월 말에 먹어야 가장 맛이 좋다고 한다. 보통 전어는 산란기가 봄에서 여름까지인데 산란기에는 지방성분이 적어서 맛이 덜하기 때문에 산란기가 끝나는 가을이 되어야 제철이라고 한다. 또한 전어는 고등어나 다른 생선에 비해서 지방의 양이 많은 편이 아니라서 비만 걱정을 덜해도 되고 지방의 상당수가 DHA나 EPA와 같은 오메가-3 지방산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웰빙 식단으로 최고라고 말한다.
역시 9월의 별미, 전어 맛은 최고였다. 저녁식사 도중에 제자들 중 한 명이 <콘서트 7080> 표를 보여주면서 식사를 마치고 구경하자고 제안을 하였다. TV 야외공연은 첫 경험이라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모두들 함께 식사 후 참여하기로 했다. 그래서 총 12명의 20~40대의 문학소녀들이 약 1만 5천 명으로 추정되는 구름처럼 운집한 관중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진주인구가 대략 27만 명이라고 하니, 1만 명이 넘는 중년층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은 대단한 광경이라고 생각되었다.
녹화는 당일인 9월 25일에 했지만, 방영은 일주일 후인 10월 3일(일)에 한다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유명한 횟집에서 저녁을 먹고 출발을 했으므로 이미 야외공연은 중간쯤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남강 둔치 길거리 위의 경찰과 주최 측이 동원한 경호원들이 통제하는 줄에서 공연장을 내려다보니 엄청난 인원들이 현란한 조명 불빛 아래에서 공연을 관람하고 있었다. 인파를 뚫고 공연장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뒤쪽으로 입장을 할 무렵 가수 남궁옥분의 목소리가 대형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입장하는 일련의 사람행렬을 뒤따라 들어가자 그녀가 1980년대 초에 불러 크게 인기를 끌었던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가 귓전에 들려왔다. 관중들은 모두 박수를 치고 손을 흔들며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앞쪽으로 계속 걸어 들어가 빈자리를 찾아 자리를 잡자 가수 이동원과 테너 임산이 정지용의 시를 작곡한 노래 <향수>를 불렀다. 이동원은 러시아풍의 모자를 눌러쓰고 통기타를 뜯으며 그의 80년대 히트곡인 <가을편지>, <가을남자, 추남> 등을 연속해서 불렀다.
MC 배철수의 요청에 의해 이동원은 가을에 어울릴 만한 시 한 수를 낭독했다. 그 유명한 김기림의 현대시 <길>이었다. 서울음대 박인수교수와 함께 정지용 작시, 김희갑 작곡의 <향수>를 멋지게 불렀던 가수 이동원은 '음유시인'이라는 별명에 맞게 멋진 목소리로 <길>을 외워서 낭송했다.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 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혼져 때 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줏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다녀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 김기림, <길> 일부이동원에 이어 추억의 가수 '둘 다섯'이 등장하여 <밤배>, <얼룩 고무신>, <긴 머리 소녀> 등을 열창했다. 10여 년 전에 분당에 살 때 거주하던 아파트 옆 상가에 '둘 다섯' 중 한 명이 운영하는 노래카페가 있어서 그들의 노래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그곳에서 외국인들도 자주 찾아와 통기타 가수와 필리핀 등 외국인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를 경청하며 흥겹게 술잔을 기울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진행 MC인 배철수가 나와서 벌써 마지막 가수를 소개하고 있었다. 그는 "진주에서 맞이하는 가을, 상당히 멋진데요? 10월이면 전국체전도 열리고…. 대개 팬들은 가수들의 나이, 성별에 따라 나누어지는데, 이 가수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면서 가수 박상민을 소개하였다. 그는 특유의 중절모를 쓰고 검정 선글라스에 검정색 수트 차림으로 춤을 추는 행색의 몸동작으로 입장을 하여 히트곡들인 <나 하나의 사랑>, <무기여 잘 있거라>, <청바지의 아가씨> 등을 연이어 열창하여 관중석을 들썩거리게 했다.
공연이 끝나고 MC 배철수씨와 만나 인터뷰를 시도했으나 사설 경호원들에 막혀 접촉이 실패했다. 그 대신 녹화 도중에 보조 MC를 봤던 신현진씨와 함께 사진촬영을 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입장을 하여 사고 위험이 있어 보조MC의 멘트에 따라 앞과 뒤로 나눠서 분산퇴장을 했다. 퇴장하면서 참여기념으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영락없는 10대 소녀들(?)이었다. 제자일행과 장소를 옮겨 맥주 몇 잔을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진주 서문시장 안에 있는 유명한 비빔밥 집을 찾아가 식사를 했다. 불행하게도 아침에는 비빔밥을 하지 않고 해장국만을 한다고 했다. 그런데 조그만 식당의 입구에 차려놓은 간이식탁에도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1층과 2층에도 빈자리가 없었다. 10여 분을 기다려 겨우 다른 사람일행과 합석하여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마침 일본과의 17세 이하 여자축구 결승이 열리고 있어서 식사하는 사람들 모두의 눈이 TV로 쏠리고 있었다. 식사 도중에는 한국은 2대 1로 약간 밀리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국은 일본을 연장전(3 : 3)과 승부차기 끝에 5대 4로 이겨 한국축구사상 FIFA 주최대회 첫 우승을 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사실상 진주의 명동인 길거리에는 아침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주로 할머니들이 자신이 재배한 야채와 과일 등을 들고 나와 팔고 있었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패션명품상점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재래시장은 부조화 속에서 앙상블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방금 따온 것으로 생각되는 오미자와 싱싱한 마가 눈에 들어왔다.
차를 타고 진주성으로 갔다. 아침 9시부터 문을 열기 때문에 근처의 조형물 앞에서 사진촬영을 했다. 남강 유등축제를 위해 이미 각종 조형물을 남강 위에 띄어 놓고 있었다. 또 형평사 사건의 기념탑도 인상 깊었다. 형평사 운동을 기념하여 세계인권 선언일인 1996년 12월 10일에 세운 기념탑은 1923년 일제 강점기 당시 최하층민이었던 백정들의 신분해방과 인간 평등의 염원이 담겨있는 역사적인 상징물이었다. 특히 이 운동이 진주에서 출발하여 그 불길이 서울로 올라간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운동이 촉발된 계기는 진주에 사는 백정 이학찬의 아들이 학부형과 학교 측의 반대로 입학이 좌절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진주성 성문을 들어가면 정면에 '矗石樓'가 보인다. 촉석루는 논개의 왜장과의 투신으로 유명하지만, 사실은 밀양의 영남루, 평양의 부벽루와 더불어 한국의 3대 누각으로 이름을 떨쳤다. 남원의 광한루와 삼척의 죽서루도 이들과 같은 반열이다. 밀양강 위의 높은 절벽에 자리 잡은 영남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이층 팔작집으로 '영남제일루'라는 편액을 11세의 이증석이 썼고, '嶺南樓'라는 편액을 7세의 이현석이 썼다고 하여 관심을 모았다.
영남루가 밀양군 객사의 부속건물로 관원들이 손님을 접대하거나 주위 경치를 감상하며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사용한데 비해, 촉석루는 고려말 진주성을 지키던 主將의 지휘소로 애초의 축조 목적이 달랐다. 최초는 고종 28년(1241년)에 창건되었는데, 임진왜란 때는 왜적이 침입하자, 총지휘는 물론 남쪽 지휘대로 사용하였으므로 '남장대'로 불리기도 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김주가 영남루를 중건할 때 촉석루를 본보기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영남루 건축의 모델로 삼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촉석루도 정면 5칸, 측면 4칸의 누각으로 되어 있다. 안타까운 것은 해방 직후인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소실되어 경남 문화재 자료 8호로만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부벽루는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 모란봉 동쪽의 깎아지른 청류벽 위에 서있는 정자로서 원래 393년에 창건한 영명사의 부속 건물로 지어졌다. 따라서 애초의 이름은 '영명루'였으나, 12세기 무렵부터 '대동강의 맑고 푸른 물위에 떠있는 듯한 정자'라는 뜻에서 浮碧樓라고 고쳐 불렀다. 필자는 운이 좋게 3곳의 누각을 모두 탐방했다.
영남루 중간쯤에서 남강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유명한 논개의 사당인 '義妓祠'와 논개가 왜장을 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순절했던 '의암'이 자리 잡고 있다. '의기사'는 논개의 사당으로서 1593년 그믐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이 함락하자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한 의로운 기생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셔 놓은 사당이다.
다산 정약용의 중수기, 매천 황현시판, 진주기생 산홍의 시판이 걸려있어 관광객들이 반드시 찾아 탐방하면서 그의 애국애족의 충성스런 마음을 기리는 곳이다. 마침 의암을 찾은 날은 남강 유등축제 때문에 강 한가운데 논개의 조형물을 만들어 놓아서 더욱 논개의 정신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논개의 고귀한 넋을 위로하기 위해 남강 다리 밑에 논개가 왜장을 포옹하며 손에 끼웠다는 금가락지를 매달아놓아 오가면서 그것을 보게 되는 후세 사람들에게 민족애를 심어주고 있었다.
그 외에도 진주에는 김유신장군이 산신령으로부터 삼국통일 위업의 가르침을 받은 곳이라는 '남악서원', 훌륭한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신 진주향교, 고려 말 대사헌을 지낸 우곡 정온의 정자였던 우곡정, 청곡사 등의 가 볼만한 역사적 명소가 많으며, 진양호의 석양도 여행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아름다운 곳이다.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살은 촉석루 옆 소나무에 걸려 있었다. 드높은 푸른 하늘의 흰 구름과 초록빛의 남강 물은 논개의 붉은 마음과 함께 도도히 흘러가고 있었다. 진주 남강은 새롭게 탐방객의 객수를 자극했다.
덧붙이는 글 | 운이 좋게 평양의 부벽루 등 한국의 3대 누자를 모두 탐방했다. 다른 두곳이 풍류를 목적으로 건축되었다면, 촉석루는 전시의 지휘소역할까지 떠맡아 와서 역사의 비장미를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 특징이다. 가을 지역축제도 찾아보고 웰빙 요리인 전어회와 전어무침을 맛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