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6일 저는 자유로를 달려 서울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대형LPG운반 트레일러 트럭 옆으로 짐칸을 쇠창살로 두른 트럭 위에 돼지한마리가 실려 가고 있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나들이일 이 자유로를 달리는 길 위에서 그 돼지는 그저 고요했습니다. 공포인지 체념인지 득도인지 그 표정을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그 돼지는 다음날 삼겹살로 바뀌어 누군가의 술안주로 이 세상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젊음이 가득한 대학로를 돌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검실을 방문했습니다.
서울 한복판에 만난 유골들, 그들의 사연은생명과학관 옆, 재건축을 기다리고 있는 낡은 교사의 1층 부검실 표시판의 화살표 방향 입구를 들어서자 'GoldStar' 상표의 대형 냉장고가 저를 먼저 맞았습니다.
'냉장고 가동 중입니다. 손대지 말아주십시오. 법의학교실'그 냉장고 벽에 붙은 경고문이 저의 언 마음을 더 얼어붙게 했습니다.
부검시 수비 및 제출 서류1. 부검의뢰서 원본2. 부검영장 사본3. 사건 관련자료 가. 변사사건 발생보고서 사본 나. 진술조서(목격자, 피의자 등)사본 다. 현장사진 원본 라. 현장 약도 마. 기타 필요한 서류 사본상기 서류 미비시 부검이 불가 될 수 있음을 양지바라며, 많은 협조바랍니다.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교실부검실 문에는 부검을 받기 위한 구비서류들이 나열되어 표기되어있었습니다. 상기서류가 준비되지 않으면 본인의 의사와 전혀 관계없이 냉장고에 눕혀진 사람은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500 병상의 후송병원 중앙부에서 32개월 군 복무를 했습니다. 수술실과 회복실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근무하면서 진료 5분대기조로 제일 먼저 응급환자를 맞아야 했습니다. 가장 근거리에서 삶과 죽음이 갈리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주검을 대하는 것에도 누구보다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수술실의 문을 여는 것은 제게 항상 알 수 없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제가 수술대 위에 올라야할 당사자가 아님에도…. 부검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은 그 수술실의 문을 밀고 들어서야 했던 그 때보다 더 두려웠습니다.
문을 들어서자 넓은 방 가운데 스테인리스스틸 부검대 위에 엎어진 10개의 흰색 트레이위에 의료용 핀셋이 정연하게 올려져 있었습니다.
실톱과 전기톱, 소줏집의 삼겹살을 자를 때 간혹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가위와 날의 방향이 반대인 칼들이 창문턱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제가 중앙부의 무균살균을 위해 무수히 다루었던 그 수술실의 의료용과는 판이한 것들이었습니다.
천장에는 큰 무영등(無影燈, 목적 부위에 그림자가 생기지 않도록 둥글게 여러 개의 등을 배열한 수술실의 조명장치) 두개가 저의 주체할 수 없는 공포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공포는 부검실 내부의 다른 또 다른 방인 '유골보관실 106-1호'의 문을 열자 경악으로 바뀌었습니다. 1975년 좌파 크메르 루즈 정권이 캄보디아를 장악한 4년 동안의 야만적인 학살에 관한 다큐멘터리 사진에서나 본 장면이 제 눈앞에 펼쳐져있었습니다.
두개골과 쇄골, 상완골과 대퇴골 등 유골이 선반에 가득했습니다.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서울의 도심, 젊음이 넘실대는 대학로의 한 구석에 이렇게 '코리언 킬링필드'의 참혹함이 간직되어있을 줄이야. 그 유골들은 한국전쟁시기에 부역혐의 및 부역혐의가족이라는 이유로 고양의 야산에 방치된 폐광인 금정굴에서 집단학살당한 고양 및 파주지역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역혐의 있으면 무조건 살상"... 고양금정굴학살사건1950년 9·28수복으로 북한군 적극 동조자들인 좌익세력이 서둘러 월북한 수복지역의 치안에 경찰조직과 함께 민간인들로 구성된 태극단, 치안대 등의 경찰보조인력이 가담했습니다. 주로 마을의 30, 40대 장년층 우익단체 소속원들로 구성된 치안대는 부역혐의자 및 불온수상자를 체포하는 절대 권력을 발휘했습니다.
인민군 적극 가담자들이 이미 북으로 도피한 상황에서 그들의 가족과 인척뿐만 아니라 평소 개인감정을 가진 이웃들까지 포함한 양민들에 대한 무차별 폭행과 약탈이 동반됐습니다. 당시 고양경찰서장이었던 이무영은 '부역혐의가 조금만 있어도 무조건 살상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광기가 지배하던 그 야만의 시기에 서장의 이 지시는 경찰보조인력들에게 기름을 붙는 격이 되었습니다. '빨갱이 씨를 말려야 한다'는 이유로 부녀자는 물론 어린아이들까지도 린치를 당하고 잡혀갔습니다.
고양경찰서 유치장과 임시유치창고에 감금된 채 마실 것과 먹을 것을 공급받지 못하고 고문을 당하다 비비선(유선전화선)에 묶여 마침내 폐광굴 위에서 살해당했습니다. 측은지심을 지우지 못했던 자유로 트럭 위의 그 흰 돼지는 차라리 호사스러운 죽음의 여행길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2007년 6월 고양경찰서장 책임 하의 불법 집단살해로 규정되었습니다. 2010년 10월 2일. 제60주기 고양지역 민간인학살 희생자 합동위령제전이 있었습니다. 금정굴 현장에서 제례가 있은 뒤 전통상여행렬 및 노제, 추모행사가 열렸습니다.
그에 앞서 고양아람누리 갤러리 누리에서 '2010 높빛평화예술제 '평화를 상상해요'의 개막이 있었습니다. 윤덕현 감독의 한국전쟁시기 민간인학살 사건을 주제로 한 독립다큐멘터리 <Three Memories>의 세 번째 이야기 '떠돌다-고양금정굴 사건'편이 상영되고 문창길 시인의 추모시 낭독, 금정굴 수직갱도를 영상-오브제 설치작품으로 재구성하여 전시하고 관람객들의 평화의 메시지를 달아 함께 완성해가는 커뮤니티 아트, '함께 만드는 평화의 금정굴'이 설치되었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해원과 화해... 위령시설 등 설치해야
전시 프로그램인 <Imaging for Peace>에서는 다양한 작가들이 회화와 사진, 설치미술작품으로 해원과 상생 그리고 평화를 예술적 상상력으로 풀었습니다(이 전시는 10월 10일까지 고양아람누리 갤러리 누리에서 계속됩니다).
이 자리에는 최성 고양시 시장을 비롯해 김필례 고양시의회 의장, 송영주 민주노동당 경기도의원 등의 정치권 인사들과 유재덕(목사, 고양평화공원추진위원회 준비위원장), 마임순(고양금정굴유족회 회장), 권명애(고양시민회 대표), 박미숙(고양시작은도서관협의회 대표), 김백호(고양단일문화원 원장) 등의 사회단체 장들이 참석해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은 금정굴사건의 치료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아직 적색 공포증이 극복되지 못한 상황에서 이 행사의 참여 자체가 용기일 수 있는 행보입니다. 전시 참여 작가들도 기꺼이 얼굴을 드러냈습니다.
이 치료의 처방에 가장 시급한 것은 서울대학교의과대학 부검실의 유골보관실에 임시 보관되어 부식되고 있는 유해를 영구 봉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권고에 따른 화해와 위령사업을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그 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권고했습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무하고, 지역민과 국민들에게는 역사적 교훈을 남기기 위해 금정굴 지역에 평화공원을 설립하고, 적절한 위령시설을 설치할 것을 권고한다."금정굴을 방문한 날, 금정굴 양민희생자 유족회사무실의 허름한 임시막사 지붕에 뿌리를 내린 푸른 풀들을 등지고 북쪽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한 유족의 휑한 시선이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잘못된 역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규명과 사과와 용서로 화해될 수 있습니다.
유골보관실을 방문했던 날, 서울 도심 곳곳에는 서울 G20 정상회의개최를 알리는 전광판의 카피가 곳곳에서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세계가 대한민국을 주목합니다"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홈페이지 www.motif.kr 과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