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에게 거액의 현금을 맡겼는데 그 다음 날 애인이 돈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면 그 돈을 맡긴 사람은 어떤 생각이 들까.
십중팔구 애인이 돈을 들고 도망쳤다고 의심할 것이다. '내 애인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어!'라는 생각도 들지 모르지만 돈 몇 푼 때문에 부모자식간에도 등을 돌리는 세상 아닌가.
거액의 돈을 챙길 수 있다면 그리고 무사히 어디론가 잠적할 수만 있다면 사랑을 저버리는 것쯤이야 일도 아닐 것이다.
특히 당사자가 돈에 쪼들리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돈에 눈이 뒤집히면 조직폭력배들의 추적도 쉽게 따돌릴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기 쉽다.
1억 엔과 함께 사라진 르포작가
기리노 나쓰오의 1993년 데뷔작품 <얼굴에 흩날리는 비>에서 르포작가 요코도 돈을 들고 달아난다. 아니 겉으로는 도망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어떻게 된 것인지는 당사자 말고 아무도 모른다.
요코는 몇 권의 책을 발표한 작가지만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스러운 생활 때문에 늘 돈에 쪼들리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에 애인이 무려 1억 엔이라는 거금을 들고와서 며칠만 맡아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1억 엔이라면 지금도 큰돈이지만 1993년이라면 더욱 그렇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런 거액이 눈앞에 나타나면 어떤 기분이 들까. 소심한 사람이라면 왠지 모르게 겁이 날지도 모르겠다. 돈이 있는 곳에 문제도 있는 법이니까.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돈을 들고 외국 어딘가로 잠적하자고 결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요코에게 돈을 맡겼던 남자 나루세는 요코가 사라지자 요코와 평소에 친하게 지냈던 무라노 미로를 찾아온다. 미로는 요코가 돈을 들고 없어졌다는 말에 큰 충격을 받는다. 몇가지 미심쩍인 부분이 있지만 요코는 자발적으로 사라진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요코의 방에서 여권과 여행가방도 없어졌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미로는 평소에 자신의 친구 중에서 요코가 가장 현명하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다니.
충격도 잠시 나루세는 미로에게도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혹시 요코와 함께 작당해서 돈을 처리한 것 아니냐고. 그 돈은 나루세 개인의 돈이 아니다. 폭력조직하고 연관이 있는 듯한 돈이라서 제때 돈을 찾아내지 못하면 어떤 보복이 있을지 모른다. 나루세와 미로에게 주어진 시간은 일 주일. 그 안에 요코의 행방을 밝히고 돈을 찾아야 한다. 최악의 경우 돈만이라도 찾아내야 한다.
기리노 나쓰오의 '무라노 미로 시리즈'
이런 식의 실종은 이후에 살인사건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살인범의 입장에서는 사람을 죽인 다음에 경찰과 주변 인물들에게 피해자가 '실종'된 것처럼 보이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다. 그렇게 깔끔한(?) 범죄를 위해서는 몇가지가 필요하다. 우선 시체가 발견되지 않아야 하고 실종 당시의 정황이 그럴듯해야 한다. 실종 전후로 해서 살인범이 알리바이를 조작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나루세와 미로도 어쩌면 살인으로 발전할지 모를 '요코 실종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뛰어다닌다. 주변 인물들을 만나보고 요코가 실종 전에 썼던 원고의 내용을 들여다 보기도 한다. 요코가 평소 돈에 쪼들렸지만 돈을 가지고 달아날 만큼 벼랑 끝에 몰렸던 것은 아니다.
아무리 벼랑 끝에 몰리더라도 돈을 들고 달아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은행에 한꺼번에 거액을 입금한다면 당연히 흔적이 남으니 추적 당하기 쉽고, 그렇다고 커다란 가방에 잔뜩 돈을 담은 채로 계속 이동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 상태에서 외국으로 달아나도 마찬가지다. 평생 '도망자'로 숨어지내야 하고 여태까지 일해왔던 경력도 산산조각난다.
<얼굴에 흩날리는 비>는 기리노 나쓰오의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첫 번째 편이다. 요코의 실종은 미로에게 충격이었지만 미로는 그 충격을 딛고 일어서서 탐정으로 변한다. 일본의 밤거리, 그 범죄의 세계를 누비고 다닐 매력적인 여탐정이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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