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싱가포르 정부가 현행 인터넷 차단 제도를 존치키로 결정한 후 현지에서는 표현의 자유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이러한 조치는 9월 중순 정부 산하기관인 검열재심위원회가 인터넷 사용과 관련해 국민의 선택권을 확대할 것을 권고한 것과 배치되는 결정이어서 아쉬움을 낳고 있다.
웹사이트 100개 접속 차단... 목록은 안 알려줘 현재 싱가포르 정부에서 접속을 차단하고 있는 웹사이트는 총 100개이다. 주무 부서인 정보통신예술부는 이러한 조치가 아동들을 포함한 국민들의 유해한 웹사이트 접속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실제로 싱가포르 현지에서 플레이보이, 펜트하우스 등을 비롯한 성인용 웹사이트와 하드코어 포르노 웹사이트의 접속은 불가능하다.
이번 발표와 함께 제시된 여론조사도 정부의 조치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모양새이다. 관영 <스트레이츠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싱가포르 국민 67퍼센트가 현행 제도를 지지하며, 38퍼센트는 차단 금지 웹사이트의 숫자를 더 늘려야 한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인터넷 가구 보급율이 한국에 이어 세계 2위라는 싱가포르에서 인터넷 차단은 겉으로만 보면 대다수의 국민들이 동의하는 유익한 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정부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듯이 웹사이트 100개를 접속 금지시키는 것이 상징적인 조치일 뿐이라는 점이다.
기자회견장에서 루이 툭 유(Lui Tuck Yew) 정보통신예술부 장관 대행은 실효성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인터넷 차단 제도를 유지하는 이유가 "인터넷상의 상당한 자료가 적절치 못하고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점을 국민들에게 상기시켜 주는 상징적 조치일 뿐"이라고 밝혔다.
차단의 목적은 '자기검열'? 현행 제도를 유지하는 일이 실효성보다는 상징적 조치라는 싱가포르 정부의 군색한 설명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웹사이트 접속 금지가 목적이 아니라, 상징적인 인터넷 검열을 통해 궁극적으로 국민들의 자기검열을 확대코자 하는 반증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자기검열은 매우 만연해 있습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모호한 법률로 위장된 규제들을 혹시나 위반하지나 아닐까하는 두려움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이자 현지 활동가인 마틴 시(Martyn See)는 이같이 지적했다.
지금까지 싱가포르 정부는 100개의 웹사이트 목록을 일절 밝히지 않고 있다. 이는 검열재심위원회가 9월 15일 권고한 인터넷 규제 제도의 투명성 제고 요구를 묵살하는 것이다.
명목상으로 보면 대다수 국민들이 지지하는 포르노와 인종차별 웹사이트 등의 차단이 중요한 목적인 듯하지만, 늘어나는 반정부 및 사회불만세력들의 웹사이트와 블로그의 감시와 처벌도 그 못지않게 중요해 보인다.
정부 비난글 잘못 올렸다가 폐쇄되는 사이트 속출실제로 2001년에는 정치 토론 웹사이트인 신터콤(Sintercom)이 정부와의 갈등으로 자진해서 문을 닫았고, 2005년에는 대학원생이 싱가포르 정부를 비난하는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가 법적 소송 경고에 놀라 사과와 함께 블로그를 폐쇄하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인터넷 검열은 최근 들어 더욱 강해져서 교사들이 블로그를 통해서 자신을 욕하는 학생들을 색출해 처벌하는 일이 발생하고, 교사노동조합은 이러한 학생들을 처벌할 수 있도록 법률적 지원을 교사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실정이다.
급기야 최근에 개정된 싱가포르 형법은 인터넷 사용자들을 공익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잠재적 범죄자들로 취급하며 정부가 표현의 자유를 규제할 수 있도록 더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다.
이는 비단 싱가포르 국민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지난 7월에는 영국 언론인이자 작가인 알란 샤드레이크(Alan Shadrake)가 사형 제도와 관련해서 싱가포르 사법 제도를 비난하는 책을 출판했다가 현지 경찰에 체포됐다.
익명을 요구한 캐나다인은 얼마 전 블로그에 싱가포르 지하철 시스템의 문제점에 관한 글을 올린 동료가 당국으로부터 '경고성' 연락을 받았다고 밝혔다. "싱가포르 당국에서 그 정도로 인터넷을 감시하고 민감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습니다. 제 친구는 잘못한 일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싱가포르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기 때문에 불편하게 될까봐서 글을 내렸습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표현의 자유와 관련하여 싱가포르에서는 3단계의 검열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첫 번째 단계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이고, 두 번째 단계는 미디어개발청(MDA) 등 정부 기관들에 의한 검열, 그리고 세 번째 단계는 이러한 상황이 만들어 내는 자기검열의 분위기이다.
예를 들어서, 영화법 제33조에 따르면 싱가포르의 정치인 또는 정치적 문제에 대해 왜곡된 견해를 제공하는 모든 영화의 제작, 수입, 배포 및 전시는 범죄행위이며, 혐의가 인정되면 최고 10만 싱가포르 달러(한화로 약 8700만원)에 달하는 벌금형이나 2년의 징역형에 처해진다.
정부에 장악된 언론... 언론자유지수 '133위'현재 싱가포르의 모든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는 정부 소유이거나 정부와 연계돼 있고, 미디어개발청의 지침을 따르고 있다. 알란 샤드레이크의 경우에서처럼 미디어개발청이 직접 경찰에 수사를 의뢰해서 위험인물들을 체포토록 하기도 한다.
마틴 시의 지적처럼 법률 자체가 모호하고 포괄적이며 처벌 수위가 높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는 심각한 제약을 받고 있다. 특히, 명예 훼손과 관련된 처벌이 워낙 엄격해서 정부 여당을 비판한 야당 지도자들이 유죄를 선고받고 파산하거나 박해를 피해서 호주나 미국으로 망명하는 경우도 여러 건 있다.
"정치적인 발언을 할 때 싱가포르 사람들은 익명이기를 원합니다. 그래야만 자기검열을 조금이나마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틴 시는 정치다큐영화 <싱가포르 반역자(Singapore Rebel)>를 2004년에 제작해 발표한 후 15개월간 싱가포르 경찰의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국제 사회의 관심 고조로 경고 조치만 받고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2007에도 재야 정치범에 관한 다큐 영화를 발표했으나 곧바로 상영금지 조치를 당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쏠린 국제 사회의 이목 덕분에 경찰 조사는 면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싱가포르 정부는 겉으로만 제도를 개선하는 척할 뿐이어서 실제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습니다. 정부가 최근에 법을 완화해서 내 영화 <싱가포르 반역자>를 상영토록 허락했지만, 다른 규제들을 다시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정치 다큐 영화에는 극화(dramatization), 애니메이션(animation), 혹은 시위 장면 등이 포함돼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포함됐죠. 약간의 자유를 허락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부가 표현의 자유를 더욱 탄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지적처럼 이번 싱가포르 정부의 결정 역시 검열재심위원회가 제안한 규제 완화 권고를 대부분 받아들인 듯이 보이지만, 표현의 자유의 핵심 문제라고도 볼 수 있는 인터넷 차단 제도 완화라는 알맹이가 빠져 있다. 위원회가 제안한 절충안인 인터넷 필터링 시스템 제도 강화 역시 정부가 거부한 것도 인터넷 접속 금지 조치가 가지는 중요성을 역설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싱가포르의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싱가포르는 1965년 독립 이후 국민행동당(PAP)이 줄곧 집권하고 있으며, 현재는 투표로 당선된 국회의원 84명 중에서 단 두 명만이 야당 의원이다.
싱가포르의 TV와 라디오는 모두 정부 소유이며, 신문 역시 정부가 직간접으로 지배하고 있다. 2009년 국경없는기자회의 발표에 따르면 싱가포르는 언론자유지수에서 175개국 가운데서 133위를 기록했다. 이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선진국들과 중진국들 가운데서 꼴찌이다.
"중국과 사우디아라비아에 비해 싱가포르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덜 제한적일지라도, 시민들의 자기검열은 그에 못지않다"고 마틴 시는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