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정부와 여당은 올해 국회에서 치료행위를 제외한 나머지 의료서비스에 대해 국민건강보험 적용을 선택적으로 배제할 수 있는 '건강관리서비스법'을 제정하고, 원격의료를 전면 허용하는 '의료법 개정안'의 통과를 추진하고 있다. 정부의 이러한 계획에 삼성이 부합하면서 법안 추진이 가속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의료민영화 저지 및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위한 범국민운동본부'(범국본)는 지난 6일 서울 정동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의료민영화의 토대를 확보하려는 삼성경제연구소의 용역 보고서를 공개했다. 그 골자는 2020년까지 23조3000억 원을 투자해 태양전지, 자동차용 전지, 발광다이오드 등 친환경 사업과 바이오 제약, 의료기기 사업과 같은 의료사업을 '신수종 사업'(미래 유망한 사업)으로 육성하기로 한 것.
범국본에서 공개한 보고서는 삼성의 신수종 사업에 대한 계획, 특히 의료사업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보고서는 지난해 11월 삼성경제연구소가 보건복지부에게 수의계약으로 용역을 의뢰받아 지난 8월 완성한 것이다. 범국본은 이를 두고 '의료민영화 제 2라운드'라고 명명했다.
고령화로 인한 의료비 증가를 이윤창출 기회로 보는 삼성
곽정숙 민주노동당 의원으로부터 '미래복지사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산업 선진화 방안'이라는 문제의 보고서를 입수한 범국본은 "삼성이 사실상 이명박 정부에게 의료민영화 방안을 제안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보고서에서 현재 공적 영역과 산업적 영역이 복합돼 있는 제약, 의료기기 분야뿐만 아니라, 국민건강보험, 예방·치료·재활·건강상담 등의 의료서비스와 환자개인질병정보까지 의료분야 전체를 'HT(Health Technology)'라는 새로운 산업적 영역으로 지정·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보고서에서 특히 강조된 건강관리서비스의 시장화와 원격의료의 도입은 노인인구 급증으로 인한 고령화 사회를 기반으로 한다. 삼성경제연구소는 고령화로 인해 발생하는 의료비 증가를 새로운 이윤 창출의 기회로 본다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보고서를 통행 예방 및 재활의학·건강검진 등 정부가 제공하던 서비스를 민간 영역으로 넘겨 기업이 대신할 수 있게 하고 IT기술을 기반으로 원격 진료를 도입해 환자들의 질병 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 하자고 제안했다. 이를 위해 정부가 HT산업의 활성화를 위해 규제를 완화하고 지원을 늘려야 한다고 제안하며 병원의 연구투자에 건강보험 재정을 지원하고 세금을 감면하는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삼성경제연구소는 또 'HT' 육성을 위해,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산하에 'HT전략위원회' 설치하는 제1안과 보건복지부, 지식경제부, 교육과학기술부가 합동으로 '부처합동 HT 추진위원회' 설립하는 제2안 등을 제시하면서 사실상 '의료민영화 범정부추진기구'를 제안하기도 했다.
"의료민영화에 대한 정부, 삼성 연결 상태 보여주는 보고서" 삼성경제연구소의 이러한 제안은 정부가 추진하는 계획과 잘 맞아떨어진다.
범국민운동본부는 이날 기자회견문에서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는 한마디로 보건의료체계의 총체적 의료민영화를 위한 추진계획"이라며 "삼성이 말하는 '성장 동력 산업으로의 HT'는 미화된 표현일 뿐 본질은 의료민영화"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이명박 정부가 밀어붙이는 건강관리서비스법이 국회에서 통과된다면, 정부가 국민에게 제공해야 할 예방 및 재활, 건강교육 및 상담 등의 건강관리서비스가 국민건강보험에서 제외되고, 영리기업이 마음대로 의료비를 책정하게 된다"며 "결국 당연히 의료비는 폭등하게 되고, 이 또한 국민들의 의료비 부담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들은 또 "원격의료는 그 안정성과 비용, 효율성이 확인된 바 없다"며 "유독 한국 정부는 시기상조라는 전문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삼성 및 재벌들의 IT 산업 돈벌이에만 주목해 의료법 개정안을 통해 원격의료를 허용하려고 하고 있다"며 "원격의료에 따른 안전성 문제는 국민들에게 돌아갈 위험이고, 그 비용도 결국 국민들이 부담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박원석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정부가 추진하는 의료민영화의 방향이 삼성과 긴밀한 연결 상태라는 것을 보여주는 종합보고서"라며 "국가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공적 서비스의 영역을 이윤을 목표로 하는 기업이 잠식하는 것은 국가영역에 대한 도전"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공적 서비스 영역까지 재벌에 의해 잠식당하면 우리사회가 경제적으로 심각하게 왜곡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은 "영리병원 허용 등 의료민영화 계획이 '촛불'에 의해 저지되니까 우회로를 택한 게 이번 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에 나온 건강관리서비스 시장화와 원격의료 도입"이라며 "삼성은 원격의료를 최대의 돈벌이 포인트로 잡았고 이 부분을 지원하는 것들을 합리화 하는 것이 정부가 추진하는 의료법 개정"이라고 지적했다.
임준 가천의대 교수는 "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에 나온 'HT' 개념은 제약과 의료기기 분야뿐만 아니라, 보건·의료 분야의 전반을 산업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며 "보건의료산업의 발전방향은 의료민영화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공공성을 전제로 새로운 정책과 기술을 어떻게 도입할지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범국본은 이날 향후 국회에서 논의 될 '건강관리서비스법'과 '의료법 개정안'을 저지하면서 국민건강보험법, 의료법, 보충적 민영의료보험법, 지역거점병원법 등 대안입법을 추진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