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책방에 공부하러 온 초등학교 여자 아이들에게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학교에서 한국전쟁 관련한 만화책을 나눠주고 독후감을 쓰게 했다는 것이다. 올해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0년이 되는 해니까, 학교에서 그런 활동도 하는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아이들에게 만화책에 대해 물으니 '아주 엉뚱한 내용'이라고 했다. 뭐가 그리 엉뚱하냐고 물었더니, 북한 사람들이 이상하고 우스운 그림으로 나온다고 했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 만화책을 좀 보여달라고 했다. 아이들은 지금 갖고 있지 않으니 다음 주에 책방 올 때 가져오겠다고 하고 그날은 일단 헤어졌다.
엊그제(4일) 아이들은 약속대로 만화책을 가져왔다. 제목은 <창이와 숙이가 겪은 6·25>. 표지에는 아이들의 말 그대로 우습게 생긴 북한군인 모습이 크게 그려져 있고 가운데 전쟁고아로 보이는 어린 남매가 물끄러미 이쪽을 보고 있다.
이걸 만든 작가가 누구인가 보니, 표지 오른쪽 밑에 '글·그림 김순욱'이라고 작게 써 있었다. 책 맨 뒷장을 보니 이 책을 발행한 단체는 '6·25 한국전쟁 진실 알리기 운동본부'다. 동명이인이 있는 걸까? 이 단체 본부장은 이제 여든을 바라보고 있는 예비역 해군대령 김순욱씨다. 만화책을 만든 사람 이름과 같다. 만화책 안에는 '김순욱'이라는 작가에 대해서 전혀 소개돼 있지 않기 때문에 본부장이 직접 만화를 그린 것인지, 본부장과 이름이 같은 작가가 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21세기 판 <똘이장군>의 출현?표지부터 예사롭지 않은 만화책을 몇 장 넘겨 읽었다. 예상했던 대로 '아주 재미있는' 내용이었다. 처음부터 초등학생에게 눈높이를 맞춰 제작에 들어간 것인지 총 분량이 20페이지 정도 됐다. 이 책은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부터 3년 후 휴전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간단한 설명과 함께 담고 있다.
만화책을 다 보고나니 한숨이 나왔다. 이걸 초등학생들에게 읽으라고 권하고 독후감 쓰기 이벤트까지 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아이들에게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민족의 아픈 역사를 알려주는 건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편향적으로 만든 만화를 아이들에게 권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역사 전문가도 아니고 한국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젊은이지만 객관적으로 이 만화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 몇 가지를 여기에 써본다.
첫째, 만화에 나오는 북한군인들과 중국, 구소련 사람들은 모두 모습이 추하다. 난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였다) 때 학교에서 반공교육을 받았다. 역시 교재는 만화책이었는데 북한군인들은 사람이 아닌 늑대(여자는 여우)였다. 얼굴이 새빨간 늑대. 그래서 나와 내 친구들은 '빨갱이'라면 말 그대로 얼굴이 붉은 사람들인 줄 알았다.
TV에선 공휴일마다 단골처럼 <똘이장군>이라는 만화영화를 했는데 내용은 똘이라는 꼬마가 북한에 가서 김일성을 죽이고 북한 주민들을 해방시킨다는 것이었다. 그 만화영화에서 김일성은 뚱뚱하고 몸집이 컸는데 가면을 쓰고 있어서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나중에 똘이가 타잔처럼 옷을 입고 쳐들어가 김일성을 죽이면서 비로소 가면이 벗겨지는데 김일성 역시 사람이 아니라 동물, 돼지였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 아이들에게 받은 만화책에 나온 그림 역시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북한, 중국, 구소련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번뜩이는 악당이고 이승만을 포함한 남한과 연합군은 아주 선량하게 생겼다.
단편적인 상황만 가지고 만든 만화, '비교육적'둘째, 역사를 일부 단편만 보여주고 있다. 역사라는 것은 딱 한 가지 상황만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초등학생용이라 그런지 만화 내용은 아주 단순했다. 북한이 남한을 공산화시키기 위해 중국과 소련의 도움을 받아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남한을 선제공격한다. 이것이 한국전쟁의 시작이다. 하지만 이렇게 단편적인 상황만으로 아이들에게 역사를 알려주는 건 좋지 않다.
비전문가인 내가 알고 있기에도 당시 한반도 정세는 중국과 구소련, 미국 등에 의해 위태로운 상태였다. 더구나 해방 이후 한반도는 두 개 나라로 갈라졌고 북쪽엔 좌익성향이 짙은 김일성, 박헌영이 실세로 나서고 남쪽에선 반공정신 투철한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이후로 늘 전쟁의 위험에 떨었다. 게다가 남쪽에선 이승만의 북진 정책에 반대하던 김구가 안두희의 총에 맞아 숨지면서 이승만의 정치적 정적은 정리됐다.
그런 가운데 1949년까지는 휴전선 근방에서 수백 차례나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이 있었기 때문에 언제 전쟁이 나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때였다. 아무리 초등학생용 만화라지만 한국전쟁을 김일성의 단독 행동으로 단정 지으며 그를 악마 같은 존재로 만들다니….
이것 외에도 이승만이 반공포로를 단독으로 석방한 일을 아주 멋진 일로 표현한 것(이건 당시 휴전 협상 진행과 관련하여 설명이 필요하다), 전쟁 중에 인민군들이 민간인을 많이 죽인 것을 말하면서도 국군이나 미군이 민간인을 죽인 것(노근리 사건 같은)은 전혀 말하지 않은 점 등은 이 만화가 얼마나 단편적인 사실로만 가지고 한국전쟁을 그렸는지 보여준다.
은평구청도, 은평구 교육의원도 모르는 만화책마지막으로 가장 큰 문제점은 이 만화책을 은평구 내에 있는 몇 개 학교에 일괄로 지급하고 아이들에게 독후감을 쓰게 했다는 거다. 아이들이 말하길 이 만화를 볼지 안 볼지, 만화를 보고 독후감을 쓸지 안 쓸지에 대해서 선택권이 없었다고 한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이 만화책은 교과부나 교육청에서 내려보낸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 누가 그랬을까?
만화책 표지엔 은평문화원에서 진행하는 '독후감 쓰기 이벤트' 소개 글이 붙어 있었다. 그렇다면 은평문화원을 통해 각 학교로 전달된 것일까?
박인호 은평문화원장은 7일 기자와 한 전화통화에서 "널리 읽혀 한국전쟁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이 같은 일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박 원장에 따르면 문화원에선 은평구 관내 10여개 학교에 만화책을 전달하고 독후감 이벤트를 하도록 권유했다.
실제로 은평구 녹번초등학교는 이 만화를 읽고 독후감 대회를 열었다. 은명초등학교 아이는 이벤트에 참가하기 위해 은평문화원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감상문을 올리기도 했다. 은평문화원은 지난 8월에 독후감 이벤트를 진행한데 이어 올 10월 말까지 우편과 인터넷으로 2차 독후감 응모를 받고 있다.
은평구청에서 지급하는 예산으로 운영되는 은평문화원. 은평구청은 이런 행사가 진행되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은평시민신문>과 함께 확인한 결과 은평구청 문화체육과 문화원 담당자는 은평문화원에서 6·25관련 반공교육 만화책을 구입하고 각 학교에 지급한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걸로 확인됐다.
은평구 최보선 교육의원도 7일 기자와 한 전화통화에서 "그런 사실(반공 만화책이 지급된 것)을 전혀 모른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7일 기자와 한 통화에서 "보통 이런 독후감 이벤트의 경우 학교도서위원회가 있어 책을 결정하지만, 교장의 재량으로 판단을 할 수도 있는 것"이라며 "때문에 문제가 있다면 교장의 판단 잘못이고 교장에게 책임이 있다"고 답변했다.
역사는 중요하다. 특히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는 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역사는 아주 예민한 것이다. 한쪽에 치우쳐서 설명해선 안 된다. 평화로운 통일을 준비해야 하는 마당에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만화책 뒤표지에는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지난 3월 천안함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이 북한이라고 단정하면서 비난하는 장면을 넣었다. 내가 보기에 이 만화는 한국전쟁의 진실보단 북한이 악당이라는 걸 알리기 위한 목적이 더 큰 것처럼 보인다. 과연 누가 이 만화를 많은 학생들에게 읽게 하도록 지시했는지 무척 궁금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은평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