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노벨문학상은 라틴 아메리카 문학 대표작가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74)에게 돌아갔다. 며칠 전부터 외신들도 올해는 2000년대 초부터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고은 시인이 가장 유력하다고 보도해서 희망을 걸었는데 참으로 아쉽다.
그러나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수상 가능성이 활짝 열려 있음을 전제로, 매년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다는 자체가 한국문학의 세계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고은 시인에게도 영광이요, 필자도 축하하고 싶다.
'애주가 시인' 고은을 만나던 날 고은 시인을 지난 7월 31일 아침 전북 김제역에서 만났다. 태어나서 처음 대면이었다. '2010 전북 도민 해변 문예대학'이 열리는 부안군 변산 해양수련원에서 특강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인에게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었다.
아침도 거르고 김제역에 도착, 약간 흥분된 마음으로 기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새벽안개가 얕게 깔린 오전 8시 56분, 광주에서 올라오는 열차가 역 구내로 미끄러지듯 진입했다. 2~3분 지나니까 중절모를 눌러쓴 고은 시인이 지하도에서 올라오더니 인사할 틈도 주지 않고 고운 손을 내밀었다.
지인이 운전하는 차에 동승했다. 10분쯤 달렸을까. 고은 시인이 갑자기 운전석을 향해 "야이, 순창 최가야, 고추장이나 먹던 촌놈이 출세했어. 군산에 와서 조기매운탕이랑 먹으니까 출세한 거지"라며 "나도 본래 옥구 촌놈이야. 올데갈데 없는 촌놈이었지, 그런데 군산에서 학교도 다니고 했잖아. 그러니까 나도 출세한 거지…"라고 했다. 김제까지 마중 나온 후배의 성씨와 고향이 들어간 농담으로 둘 사이 관계가 끈끈함을 과시했다.
고은 시인 고향은 전북 군산이다. 시군이 통합되기 전 옥구에서 태어난 그는 1년에 한두 번쯤은 고향을 찾는다며 올 때마다 새롭게 느껴진다고 했다. 그는 첫 대면인 필자에게 이름도, 나이도, 직책도 묻지 않았다. 고향에서 누군가와의 만남, 그 자체가 마냥 반갑고 즐거운 모양이었다.
2008년 9월 등단 50주년 기념 시집 <허공>을 내놓은 시인 고은은 틈틈이 그려온 그림을 모아 첫 전시회까지 열어 오래된 화가의 꿈도 이뤘다. 그래서일까, 팔순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언어와 몸짓에서 활력이 넘쳐났다.
고은 시인의 본명은 '고은태', 그의 생애는 파란만장하다. 1933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소년기를 보냈고, 군산중학교 재학 시절 한국전쟁을 겪었다. 정규교육을 작파하고 입산, 스님이 됐다가 시인이 되어 환속하고, 결혼도 했다. 생의 일부를 민주화 운동에 바치기도 했다. 그도 광기와 질풍노도의 삶이었다고 자평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김제-부안 국도에서 '비득치'라고 적힌 이정표를 보더니 "이름이 참 좋구나! 좋아. 비득치, 비득치, 야~ 이거 적어둬야겠어!"라고 하더니 수첩을 꺼내 메모했다. 그는 이름이 심상치 않다며 메모를 하고도 몇 차례 되뇌었다. '시는 마음으로 써야 한다!'는 자신의 지론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물안개 자욱한 끝이 보이지 않는 새만금방조제와 하늘과 구별하기 어려운 서해바다, 녹색이 짙어가는 들녘, 변산반도의 빽빽한 소나무 숲 등을 보며 감탄사를 쏟아내던 애주가 시인은 도저히 못 참겠는지 술 이야기를 꺼냈다.
"부안까지 왔으니까 인사는 드려야지, 소주 한 병은 마셔야 하지 않겠어? 고수레는 해야 예의이고 인사이니까. 지신(地神)에게 경배도 드려야 하고, 괘씸한 나그네 소리는 듣지 말아야 하니까 말이지. 생선 국밥하고 한 잔 걸치면서 하면 되지 않겠어?" '애주가 시인'다운 제안이었다. 김제·부안은 '바지락죽'이 유명하다고 했더니 "이야, 침이 꼴깍 넘어가네!"라며 식당이 어디에 있느냐고 어린아이가 보채듯 물었다. 예술가들은 술에서 젊음과 열정, 쾌활한 낙천주의, 섬광같이 번쩍이며 내려오는 영감을 구한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애주가 시인' 고은 "내가 그걸 모르는 거야, 내가 사기당하는 거지..."
바지락죽 전문 식당을 찾아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곧바로 안주와 소주를 주문했다. 소주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붉어져 낮술을 피하는 필자는 '술을 자꾸 권해오면 어쩌나!'하고 걱정했다. 특강을 취재해야 하는 처지기 때문이었다.
고은 시인은 예상대로 술잔을 권해왔다. 사정을 얘기하니까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는 "음, 음 알았네"하더니 입술이라도 맞추라며 술잔을 필자 앞에 내려놓았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술자리 매너 굿(Good)이시군요!" 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오려고 했다.
전날 새벽 2시까지 술을 마셨다는 고은 시인은 30분도 채 안 되어 소주 한 병을 거뜬히 비우더니 "이제야 세상이 제대로 보이네, 저 산에 심어진 소나무들도, 자네들 얼굴도···"라며 껄껄 웃었다. 인간이 좋고, 술이 좋아 환속했다는 그의 말이, 변명이 아님을 입증하고 있었다.
고은 시인은 식당을 나서며 만족스러워했다. 그는 "어제도 마시고 오늘도 마시니까 속은 쓰린데, 내가 그걸 모르는 거야, 내가 사기당하는 거지···"라고 했다. '사기당한다'는 표현은 자리를 함께했던 필자와 지인에게 대접받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구수한 입담은 생명력이 넘쳤고, 노년의 멋이 묻어났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재미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그는 17년 연하이고 초면인 필자를 친구처럼, 사랑하는 후배처럼 편하게 대해주었다. 딱딱한 이론보다는 살아온 이야기, '꼴깍'처럼 누구에겐가 많이 듣고 자주 사용하던 낱말로 마음을 끌어당겼다.
차가 변산 해양수련원에 도착하기까지 고은 시인은 주변 음식점 간판에 적힌 조개구이, 생선탕, 칼국수 등 음식 메뉴를 모두 읽으면서 먹는 방법까지 나열했다. 고향에 내려오니까 보이는 게 모두 옛날에 먹던 음식이요, 소꿉동무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필자는 특강이 끝나고 곧바로 오느라 제대로 인사도 못했다. 해서 애주가 고은 시인과의 만남은 네 시간 정도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필자 가슴에 각인된 그의 다양한 이미지는 두고두고 삶에 자양분 역할을 할 것으로 믿는다.
내년 이맘 때는 '201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고은'으로 호명되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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