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서점 숲의 아카리 (1∼5)

 (이소야 유키 글·그림,설은미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10/4200원씩)

 

 1권 겉그림.
1권 겉그림. ⓒ 학산문화사

일본 만화는 일본사람 삶과 문화를 담습니다. 마땅한 노릇입니다. 한국 만화는 한국사람 삶과 문화를 담을 테지요. 그러면 일본 만화가 담는 일본사람 삶과 문화란 어떤 모습일까요. 한국 만화가 담는 한국사람 삶과 문화는 또 어떠한 모습인가요.

 

한국 만화를 보면서 답답하다고 느낄 때가 잦습니다. 만화를 그린 분이 답답해서라기보다 만화를 그리는 분이 살아가야 하는 터전이 더없이 답답하기 때문입니다. 만화를 그리는 분이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제도권 울타리에 갇힌 학교요, 학교를 마치고 사회로 나왔다 할 때에도 제도권 테두리에 막힌 사회입니다. 하나도 홀가분하지 않은 한국 배움터이고 삶터입니다. 조금도 너그럽지 않은 한국 배움마당이요 삶마당입니다. 이런 가운데 나오는 한국 만화란 홀가분함이나 슬기로움이나 생각날개하고는 동떨어지기 일쑤입니다. 우리 삶터부터 홀가분하지 못하도록 얽어매고 슬기로움을 뽐내지 못하도록 짓누르며 생각날개를 활짝 펴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스스럼없이 즐거울 삶일 때라야 스스럼없이 내 하루를 즐기는 만화를 그립니다. 거리낌없이 나누는 삶일 때라야 거리낌없이 사랑을 나누는 만화를 그립니다. 좋은 만화 하나라 한다면 그린이부터 좋은 삶을 좋은 넋으로 일굴 때에 태어납니다. 아름다운 만화 하나라 한다면 만화쟁이부터 아름다운 삶을 아름다운 넋으로 아낄 때에 샘솟습니다.

 

한국땅에서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숫자를 헤아린다면, 돈벌이나 다른 여러 가지를 살피지 않으면서 얼마든지 내 삶을 곱게 일구어 곱게 그리는 고운 만화 하나 내놓을 수 있습니다. 만화잡지에서 안 실어 주든, 만화책 전문 출판사에서 안 내어 주든 아랑곳할 까닭이 없습니다. 만화쟁이 스스로 즐겁게 그리며 두고두고 이어갈 수 있습니다. 만화를 실어 주는 자리가 없다면 밥벌이가 안 될 테고, 만화를 보아 주는 사람이 없다면 이야기 한 자락을 오래오래 잇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누구나 밥을 먹어야 목숨을 잇고, 좋은 읽는이 한 사람 있어야 만화를 그리는 기운을 얻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 모두를 바랄 수 없어요. 다섯 해 배를 곯든 열 해 쪼들리며 살아가든 나부터 좋아하며 즐기는 만화를 사랑하여 그리는 흐름을 지키면 됩니다. 가난하다고 그림을 더 잘 그리지는 않고, 살림이 가멸다고 만화를 한결 부드러이 그리지는 않아요. 무엇보다 그림 한 장 만화 한 칸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이 그림이나 만화를 들여다보는 사람하고 마음을 맞춥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고이 다스리는 일을 먼저 할 노릇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맑으며 밝게 다독이는 일을 노상 이어야 할 노릇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든 사진을 찍는 사람이든 똑같습니다. 애써 쓴 글을 실어 줄 자리가 있다면 참 좋겠지요. 힘써 찍은 사진을 보여줄 자리가 있다면 아주 기쁘겠지요. 그런데 제아무리 잘 쓴 훌륭한 글이라 할지라도 선뜻 실어 주거나 책으로 엮어 주는 일은 드뭅니다. 그지없이 잘 찍은 거룩한 사진이라 하더라도 냉큼 사진잔치를 마련해 주거나 책으로 묶어 주는 일은 거의 없어요.

 

굳이 배곯이 길을 가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부러 밥굶는 길을 가야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배를 곯아도 좋고, 다른 밥벌이 일을 해도 좋습니다. 어떻게 살아가든 맨 먼저 할 일이란 글을 하든 사진을 하든 만화를 하든, '쟁이 한 사람'이 되어 살아갈 마음바탕을 닦고 삶바탕을 다스리는 데에 있어요. 이 다음에 '작품'입니다.

 

일본 만화 <서점 숲의 아카리>를 읽습니다. 4권째 나오고서야 비로소 이 만화가 우리 말로 옮겨지는 줄 깨닫습니다. 이제 한창 자라나는 아이와 복닥이는 삶을 꾸리자니 만화가게 마실이 퍽 버겁니다. 여느 책방 마실 또한 꽤 힘듭니다. 오래도록 제때 찾아가지 못합니다. 제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만화책이 4권까지 나올 무렵에야 겨우 한 번 찾아가는군요.

 

책을 펼칩니다. 제가 썩 안 좋아하는 그림결입니다. 그러나 내가 안 좋아하든 좋아하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그림결이 다르고, 저마다 좋아하는 그림결이 다르니까요. 군데군데 좀 어설픈 그림결이 보입니다. 그렇지만 '책을 말하는' 만화라는 대목이 반갑고, '책방을 다루는' 만화라는 대목이 더욱 고맙습니다. "아카리 씨도 본점으로 온 지 반년이 됐군요. 슬슬 주문 같은 것도 해 보는 게 어때요? 주의할 점은, 본인이 좋아하는 책과 서점에서 잘 팔리는 책은 다르다는 거예요. 좋아하는 책이 팔리면 물론 기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경우는 드물어요(1권 123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어쩌면, <서점 숲의 아카리>에서 다루는 '책'들은 만화쟁이가 아주 좋아하는 책일 수 있지만, 썩 안 좋아하는 책일 수 있으며, 잘 모르는 책일 수 있습니다. 저로서는 <서점 숲의 아카리> 같은 만화를 보면서 일본뿐 아니라 한국 책마을 모습을 톺아볼 수 있다고 느끼지만, 다른 분들은 그냥저냥 재미로 읽는다거나 심심풀이로 보는 만화일 수 있어요.

 

2권으로 접어듭니다. 2권에서는 낱권 하나 통째로 '작은 책방' 이야기를 다룹니다. 만화책 주인공은 한국으로 치면 '교보문고 광화문 지점' 일꾼이라 여길 만한데, 이 '큰 책방' 일꾼이 동네에서 오래도록 뿌리내리며 동네사람하고 어깨동무해 오던 '작은 책방'을 사귀면서 책이라는 읽을거리란 어떠한가를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1947년에 상가로 출발했으니 올해로 꼭 60년이 되나? 이 서점은 상가의 일부입니다. 대형서점은 전국의 고객을 대상으로 코너를 꾸미지요. 하지만 우리는, 반경 500m 안에서 걸어서 찾아와 주는 고객을 소중히 여기며 서점을 꾸려 왔어요(2권 18쪽)." 같은 이야기를 작은 책방 할배한테서 들으며 '책방에서 일하는 매무새'를 곰곰이 되씹습니다. 옷깃을 여민다고 할까요.

 

책을 살짝 덮고 우리네 오늘 모습을 헤아립니다. 우리네 오늘 모습을 헤아려 보면, 큰 책방 일꾼이나 사장님은 작은 책방 일꾼이나 사장님을 살피지 않습니다. 작은 책방이 작은 동네에서 작은 크기로 오래도록 책삶을 이어오는 흐름을 살피지 않습니다. 작은 책방이 동네방네 한두 군데씩은 꼭 있던 지난날 책삶을 살피지 않습니다. 큰 책방은 큰 책방답게 더 많은 매출과 더 많은 이익을 살핍니다. 큰 책방은 온나라 곳곳에 새끼가게를 열 생각에 빠져 있지, 온나라 곳곳에 깃든 자그마한 책방들이 온나라 곳곳에서 그동안 무엇을 하고 어떤 노릇을 했으며 앞으로 어떠해야 하는가를 살피지 않습니다.

 

3권째에 이르니 어린이책 이야기를 펼칩니다. 그래, 어린이책을 다루어야 비로소 책을 다루는 이야기가 될 테지. 어린이책을 옳게 말하지 못한다면 책이 무엇인가를 말하지 못하는 셈이지. 그린이 이소야 유키 님은 책방 일꾼들 목소리를 빌어, "오야마 씨, 그림책은 다른 매장과 다르게 오래된 것일수록 잘 팔리잖아요. 소설은 하드커버가 나오고 문고판이 나오고 장정이 바뀌는 등, 계속해서 변화를 거듭하지만, 그림책은 옛날 그대로예요(3권 35쪽)."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린이책 가운데 그림책은 아직까지 이 나라에서는 '어린 애들이나 읽는' 책쯤으로 여겨 버릇합니다. 그러나 한국이든 일본이든 미국이든 덴마크이든 이탈리아이든 중국이든, 어린이책 가운데 그림책만큼은 겉그림이나 알맹이나 짜임새 어느 하나 건드리지 않습니다. 처음 내놓은 그대로 아이들 앞에 선보입니다. 겉그림이든 속그림이든 매만지지 않습니다. 속종이는 새로 꾸며 볼 수 있겠지요. 겉그림 한켠에 무슨무슨 말을 붙이거나 겉그림 뒤쪽에 무슨무슨 추천글을 더 적어 넣을 수 있어요. 그러나 그림책처럼 '첫 모습 그대로 쉰 해이고 백 해이고 고스란히 똑같이 만들어' 나누는 책이란 없습니다.

 

만화책 <서점 숲의 아카리>는 책과 책방 이야기를 다룹니다. 아마, 책이랑 책방 이야기를 다루는 만화라면 지겹다거나 따분하다고 느낄 사람이 적잖이 있으리라 봅니다. 책을 좀 읽었다는 분들은 '뭐야, 뻔히 다 아는 얘기이잖아'하며 흔하거나 너절한 책으로 여길 수 있겠지요.

 

틀림없이 책과 책방을 다루는 <서점 숲의 아카리>인데, 무대와 줄거리가 책이랑 책방이지, 책 하나로 얽히고 설키는 사람 이야기가 한복판에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맺는 믿음과 사랑이 이 만화에서 한가운데를 차지합니다. 책이란 무엇이고 책방이란 어떤 곳인가를 밝히는 학술책이 아니라, 책 하나를 아끼는 사람 삶을 보여주는 만화책입니다. 책사랑과 책방사랑을 외치는 광고지가 아니라, 책을 품에 안은 책방이 어떻게 따스하며 넉넉한가를 느낀 그대로 들려주는 만화책입니다.

 

앞으로 몇 권까지 나올는지 궁금합니다. 짧게 끝맺는다면 참 아쉬울 텐데, 적어도 10권쯤은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그린이 힘이 닿는다면 20권이나 30권쯤은 그린 다음 마무리를 지으면 더없이 고맙겠습니다. 한국땅에서 한국 삶터를 돌아보며 한국책을 살피는 마음결로 한국사람 사랑과 믿음을 고이 담는 한국 만화 한 가지 태어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양철북,2010)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2010)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2007∼2010)


[세트] 서점 숲의 아카리 1~12 세트 - 전12권

이소야 유키 지음, 학산문화사(만화)(2010)


#만화책#만화읽기#책읽기#삶읽기#만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작은책집으로 걸어간 서른해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