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천주교 신자로 신앙생활 연륜도 긴 편이지만 <가톨릭신문>과 <평화신문>을 접하며 산 세월도 꽤나 긴 편이다. <가톨릭신문>은 '가톨릭시보'이던 시절부터 접했고, 1982년 '일요한담' 칼럼에 참여하면서부터 구독을 시작했다. 이듬해 소설을 연재한 적도 있어서 인연이 깊다. <평화신문>은 1980년대 후반 창간 당시부터 구독을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두 개 신문을 오랜 세월 구독하고 있는 것은 교회 소식을 접한다는 단순한 이용의식을 넘어 하느님 사업에 동참하고 협력한다는 내 나름의 적극적인 기준 때문이다. 그런 생각으로 평신도 개인에게 이윤이 귀속되는 <가톨릭다이제스트>를 제외한 교회 잡지 거의 모두를 구독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언론을 대표하는 두 개 신문 모두 대사회적 관심은 매우 미약하다. 사회적 고민이 거세되었다는 극단적인 생각마저 갖게 한다. 교회소식지 또는 홍보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두드러진 성격이 때로는 너무 답답해서 구독을 끓어버리고 싶은 마음도 울컥울컥 들지만 막상은 그러지 못하고 일반적인 교회소식과 교리적인 얘기들이나 접하며 별 애착 없이 대하곤 한다.
<평화신문>, 충실한 교회소식지로 자리 잡아
1980년대 후반 <평화신문>이 창간될 당시 많은 신자들이 <가톨릭신문>의 한계를 지적하며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이런저런 지적들 가운데는 <가톨릭신문>이 대구대교구에서 발행하는 신문이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영남의 지역정서와 부합하는 측면도 있고, 대구대교구의 '교구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들이 분분했다.
당시 <평화신문> 창간 배경에는 우리나라의 언론 상황이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극심한 언론자유의 위축과 어용언론의 확장 속에서 참 언론에 대한 소망이 매우 간절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시민주식에 의한 <한겨레신문>인데, <평화신문>의 탄생은 <한겨레신문>의 태동과 일정 부분 맥을 같이 한다. 언론자유가 심히 위축되어 있는 현실 속에서 한국 민주화의 견인차였던 가톨릭교회에서만이라도 참 언론의 몫을 다하는 신문을 만들어보자는 취지가 <평화신문>의 창간 배경에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사회문제에 대한 <평화신문>의 관심은 치밀하고 예리하며 광범위했다. 하지만 이미 중산층화 되어 가고 있는 교회의 속성상 <평화신문>의 그런 편집 방향은 역풍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 역풍은 매우 심대해서 편집기자들의 농성 사태까지 빚어졌지만 끝내는 그 역풍이 성공을 거두어서 <평화신문>은 그 후 충실한 교회소식지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당시 사장으로 부임하여 <평화신문>의 '정리정돈'을 담당했던 박신언 신부는 그 후 몬시뇰 칭호를 받게 되고 명동성당 주임으로 있다가, 얼마 전 학교법인 가톨릭학원 상임이사로 갔는데, 명동성당 주임 시절 4대강 문제와 관련하여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기도를 하는 사제들을 물리적 방식으로 몰아내면서 "그러게 기도는 골방에서 해야지"라는 길이 남을 말을 남겼다.
<평화신문>보다 <가톨릭신문>이 더 언론자유 누린다
오늘날 교회언론들은 신자 500만 명 시대와 보조를 맞추어가는 중산층화 현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교회의 위용과 어울리는 빛나는 이야기들이 지면을 채운다. 교회 소식들만으로도 기사가 넉넉해서인지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은 매우 미약하다.
지난해 용산참사 문제로 수많은 사제들이 참여하여 매일같이 용산참사 현장에서 미사가 거행될 때도 교회언론들은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4대강 파괴 문제가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큰 화두가 되어 있는데도 교회언론들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가끔 소개 형식의 단편적 기사만을 싣는다. 교회는 사회문제와 별개라는 고답적인 인식이 지면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은 양상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24면을 발행하는 <가톨릭신문>이 28면을 발행하는 <평화신문>보다 사회문제에 관해 조금은 더 신축성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제는 <가톨릭신문>이 <평화신문>보다 언론자유를 좀 더 많이 누리는 것 같다는 말도 듣는다.
지난 3일(연중 제27주일)치 <가톨릭신문>과 <평화신문>을 보면 명확하게 비교되는 점이 발견된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 이용훈 주교) 환경소의원회에서 시행하는 제5회 '가톨릭환경상'에 '4대강사업 저지를 위한 천주교연대'가 대상을 받은 것을 <가톨릭신문>은 1면에 비중 있는 기사로 다룬 반면 <평화신문>은 23면에 배치했다. 조악한 비교일지 모르지만 두 신문의 이런 편집 태도는 상당한 차이를 지닐 것으로 생각된다.
대사회적 활동 때문에 천주교 신뢰도가 1위라고 하니...
<가톨릭신문>은 과거 '대구대교구보'라는 시각에서 거의 벗어난 양상인 반면 <평화신문>은 '서울대교구보' 형태가 좀 더 짙어지는 느낌이다. 서울대교구가 가장 큰 교구이니만큼 자연 서울대교구 관련 소식이 많을 건 당연지사겠지만, 단순히 기사의 비율만을 가지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교회의 중산층화와 연관하는 사회적 관심의 미약성 등을 두고 하는 말이다.
최근 시사주간지 <시사IN>은 만 19살 이상 성인남녀 1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가톨릭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종교 1위로 꼽힌 사실을 밝혔다. 시사IN은 이명박 정권 들어 '촛불정국'과 노무현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 서거 정국을 거치면서 구독자 수가 무섭게 확장된 주간지이다(필자도 <시사IN> 구독자이다). <시사IN>은 이번 설문조사 결과에 대해 '가톨릭 신자 수의 꾸준한 증가와 더불어 가톨릭의 활발한 대사회적 활동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런 <시사N>의 발표를 교회언론들에서도 접합 수 있었다. 그런데 조금은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가톨릭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종교로 꼽힌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가톨릭의 활발한 대사회적 활동'이라면 이 사실과 교회언론들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생긴다는 점이다. 교회언론들로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사항이 가톨릭을 한국사회에서 가장 신뢰 받는 종교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기이한 괴리 현상을 교회언론들은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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