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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지러워라// 희고 창백한 얼굴로 등굽혀 무릎 세우고 잠시 내려 앉았다/저 나한상의 손등위로/ 다시 맨발로 대웅전을 가로 질러 돌탑으로 날아/ 석등에 불 밝히더니/ 칼을 버리라 상처를 버리라 내내 첫 사랑의 발자국처럼/ 탕탕 가슴을 치받더니 가슴을 에리더니/ 한 순간 풍경소리로 처마에 걸려 바람을 흔든다. -이하 생략-

강릉출신 김경미 시인의 "나비날다"의 1연과 2연이다.

노랗게 익은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가로수 길을 따라 가을이 먼저 온 걸 안다는 예향 강릉에는 지금 강릉예술제가 한창이다. 사진전, 미술전, 국악공연, 시화전이 모두 한 곳에서 열리고 있다. 강릉예술관 전시실과 대공연장, 소공연장에서 다채로운 문화예술 행사가 시민들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다.

가을시화전 시화전 풍경 아래서 가을 햇살을 받으며 누어서 시를 읽고 싶었다
가을시화전시화전 풍경 아래서 가을 햇살을 받으며 누어서 시를 읽고 싶었다 ⓒ 김남권

가장 먼저 발길이 멈추는 곳은 예술관 앛 뜨락에 자리 잡은 시화전 풍경이다. 강릉지역 문인 70여 명의 시가 단풍에 붉게 물들어 펄럭이며 바람결에 시어가 그림을 품은 채 가슴 속으로 들어 오는 걸 느낄 수 있다.

소를 팔러 북평장에 간 아버지는/소 값이 똥값이라며 북평우체국 앞 대폿집에서/ 해거름을 안주 삼아, 연신 막걸리만 한나절이다/ 꼬까신 갖고 싶은 내 맘 아는지 모르는지/ 소 팔아야 느늘 오래비 학비 부칠텐데/ 다 퍼드러진 메밀묵이 울먹인다 -이하 생략-
이애리 시인의 북평장날 중에서

 온통 환하다/ 겸허히 버리는/ 가을 숲/ 나는 무엇을 버려/ 님 가시는 그 길에/ 등불 밝힐 수 있을까/ 버려야 할 것 버리지 못하고/잊어야 할 것 잊지 못하고/ 아집으로 버틴 회한의 언덕 -이하 생략- 최숙자 시인의 가을 숲길에서 1연

당신이 내게 무엇으로 사느냐고 물으신다면/ 마음 감시 시스템이 설치완공중이라고 할래요/ 당신이 내게 미움을 아느냐고 물으신다면/ 미움은 4차원을 넘나드는 미소였다고 말할래요/ 당신이 내게 슬픔을 아느냐고 물으신다면/그것은 물독을 채워가는 두꺼비였다고 말할래요/ 당신이 내게 몸체를 아느냐고 물으신다면/ 세웠던 칼날 무디어져 터 닦는 쟁기로
변했다고 말할래요 -이하생략- 권오선 시인의 당신이 중에서

시인의 시가 내밀한 그리움으로, 애타는 눈빛으로 가을 바람 속에서 말을 걸어 오고 있다.
그 그리움이 단풍으로 들어 오고 낙엽으로 지기 전에 감나무에 노랗게 익어가고 단풍이 피빛으로 붉게 물든 사이에서 펄럭이는 시화전으로 들어가 가을 햇살이 노랗게 익어 가는 뜨락에서 시의 물결에 빠져 보는 것은 계절의 더 없는 감동이 될 것이다.

같은 시각 원주 치악예술관에서는 현수막에 시와 그림을 넣은 야외 전시가 아닌 작은 액자에 수채화와 어우러진 예쁜 시화전이 대공연장 로비에서 시민들과 만나고 있다.

역시 원주예술제의 일환으로 열리는 이 행사는 사진전, 국악공연, 클래식공연과 연극공연등과 함께 다채로운 행사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원주지역 시인 82명중 56명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오탁번 시인의 초대시 [밤]은 가을의 고향풍경을 생각나게 한다.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 밤나무 밑에는/ 알밤도 송이밤도/ 소도록 떨어져 있다.
밤송이를 까면/ 밤 하나하나에도/ 다 앉음앉음이 있어/ 쭉정밤 회오리밤 쌍동밤/ 생애의 모습 저마다 또렷하다.
한가위 보름달을/ 손전등 삼아/ 하느님도/ 내 생애의 껍질을 까고 있다.

토지문학관장 고창영 시인은 가을을 이렇게 노래했다.

메밀전에 청국장/ 돼지고기 두루치기가 맛있는/ 흥업면 기와 집// 가을 비 오시는 날/ 따끈한 구들방에 앉아/ 추녀 끝에 떨어지는 가을을/ 소주잔에 기울이다가// 눈 딱 감고/ 사랑하다 죽겠다는 / 그 사내/ 따라 나서고 싶은, -가을 전문
권순형 시인에게도 가을은 아프다, 그리고 시리게 다가온다.
이렇게 좋은 날/ 까페에 혼자 앉아 있다는 것이/ 외로움이다//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이/ 슬픔이다//가을이라서/ 가슴이 이리 허전한 거겠지라고/ 까페 주인은 혼잣말을 한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커피만 마신다// 이렇게 좋은 날이/ 이렇게 슬플 줄 몰랐다
-가을 한 잔을 마시며 전문

우리 집 아그배 엉큼도 하지./ 나비도 모른 채,/ 꿀벌도 나 몰라라,/ 아침나절 스쳐 간 휘파람새에 마음 팔려,/ 바람소리 날 때마다 꽃잎 흩날린다.
꽃잎 편지 봄바람에 부쳐 놓고/ 하마나 올까 휘파람새 기다리며/ 밤에도 온 마을이 환한/ 분홍 꽃 등불 -김정희 시인의 아그배나무 꽃 전문

시인들의 가슴은 가을을 태우고 슬픔도 태우고, 사랑도 태우면서 그렇게 온 몸으로 시를 쓴다. 때로는 엉큼하게 자기만의 상상으로 사랑하고 연애하고 풀도 나무도 꽃도 모두 시인의 포로로 만들고 만다.

이 가을이 시인에게 시를 못 쓰고 못배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시인들의 시어를 가슴에 담아 가고 그들의 감성에 못내 뛰어들 수 있는 시화전이 해마다 단순하게 열리는 연례행사로만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안타까운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중복게재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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