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PIFF(부산국제영화제)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예년과는 달리 이번 영화제의 주요 무대는 남포동이 아니라 해운대였다. 하지만 부산은 아직 축제가 끝나지 않았다. 필자는 지난 12~14일 부산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선 부산 국제 영화제뿐만 아니라 2010 부산 비엔날레가 한창 열리고 있었다.... 기자의 말부산국제영화제(PIFF) 폐막을 하루 앞둔 지난 14일, 남포동과 해운대를 비롯해 부산에서 영화제가 열리는 장소는 PIFF를 알리는 현수막과 포스터로 가득했다.
이날, 야외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볼 생각으로 수영만 요트 경기장을 찾았다. 다소 이른 시각이지만 해운대 수영만 요트 경기장은 자원봉사자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다. 티켓박스는 오후 3시 30분부터 티켓을 발매한다고 쓰여 있었다. 영화는 오후 7시 30분부터 시작한다.
지금은 오후 2시다. 영화를 보기까지 5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옆에 있던 사람들이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곳은 바로 옆에 있던 요트 경기장 계측실이었다.
그곳은 임시 미술관이었다. 타이틀은 '2010 부산 비엔날레. 진화속의 삶(Living evolition)'. 목적 없이 찾은 부산은 보는 각도에 따라서 그 모습을 달리한다. 앞선 사람을 따라 생각 없이 미술관으로 들어섰다. 스태프로 보이는 여자 세 명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입구에 앉아 있었다.
"어서 오세요.""관람료는 7000원입니다." "부산시립미술관에 있는 작품도 관람할 수 있어요."나는 엉겁결에 티켓을 사버렸다.
불에 탄 듯한 작품, '오늘이라고 하는 내일'요트 경기장 전시실(계측실)은 천장이 아주 높았다. 그리고 실내는 상당히 밝은 편이었다. 첫 번째 전시실은 3개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양쪽 벽면에 부산 앞바다를 형상화한 거대한 그림과 흑백 사진을 연상시키는 작품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바닥엔 모빌 형상의 식물들이 수많은 벼 이삭처럼 박혀 있었다. 벽면의 작품 중 유독 눈에 띄는 작품이 있었다. 작품의 밑부분이 불에 그을린 것 같았다. 스태프에게 물었다.
"이것은 작가의 의도인가요?""네, 맞아요."하지만 스태프는 전문가가 아닌듯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키가 큰 여자가 내게 다가오더니 작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을 '도슨트'(docent, 전문 안내인)라고 소개했다.
"도슨트가 뭐죠? 큐레이터라고 하지 않나요?""큐레이터가 되기 전 인턴 같은 거예요."그녀는 다시 한번 불에 그을린 작품의 배경을 설명했다. 그때 저만치서 검은색 가방을 멘 여자 한 명이 다가오더니 물었다.
"도슨트 프로그램은 언제부턴 가요?""지금부터."
<오늘이라고 하는 내일>, <검은 들판>, <그리고 부산 앞바다(?)>. 도슨트의 설명은 진지하고 의미심장했지만 나는 그런 예술적인 말투와 몸짓에 익숙지 않았다. 애써 귀를 기울여서 들었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를 흘러나올 뿐이었다.
<검은 들판>이라 명명된 작품은 앞뒤 보는 방향에 따라서 흑백과 컬러였다. 흑백은 전쟁후의 참화, 컬러는 아픔과 고통을 극복하고 솟아나는 강한 생명력, 진화 속의 삶을 갈망했다.
도슨트의 설명에 애써 귀를 기울여 봤지만밝은 분위기의 첫 번째 전시실과는 달리 두 번째 전시실은 상당히 어둡고 암울했다. 도슨트는 먼저 비닐모양의 벌레를 꼬아 놓은 듯한 작품 앞에 섰다. 옆에 있던 여자는 질문의 수위나 나와는 차원이 다른 작품 해석력으로 보아 미술학도이거나 아니면 그와 관련된 직업을 갖고 있음이 분명했다.
"로우 테크닉, 하이테크닉. 20대 초반의 일본 작가는 섬세한 프로그래머 그는 결코 과장하거나 자랑하지 않는 작가예요."도슨트는 우리를 <독신자의 침대>편으로 안내했다. 독신자의 침대는 딱딱하다. 침대 위 막대 혹은 선, 그리고 붉은 레이저가 인상적이다. 도슨트는 구름이라고 했지만 차라리 안개에 가까웠다. 구름이 피어오르면 침대를 가로지르는 선에서 붉은 레이저가 빛을 발했다.
"작가는 한국사람이에요. 그렇지만 독신자가 아니에요."
저 붉은 레이저 아래의 딱딱한 침대는 왠지 내가 누워 있어야 할 것 같다. 작가처럼 나도 진정한 독신자는 아니다.
이번 작품은 <울트라 블랙썬>이다. 내 식대로 말하자면 뿔 달린 거대한 모자편은 흡사 거대한 우주 헬멧 같은 형상이다. 체르노빌 사태를 본 일본 작가의 미래의식은 꽤나 암울한 편이라고 도슨트는 말했다. 종결어미의 끝을 올리는 그녀의 부산 사투리는 들을수록 매력적이었다. 플라스마, 혹은 섬광. 그리고 귀를 찢는 듯한 전자음. 뿔이 달린 거대한 모자 주위로 물이 담겨 있다.
"위험하니까. 관람은 거리를 두고 하세요.""작동은 언제 하죠?""시간 거의 다 됐어요. 놀랄 수도 있으니 귀를 막으세요." 작동 시각은 오후 2시 30분. 몇 분 남지 않았다. 도슨트는 귀를 막았다. 나는 귀를 막지 않았다. 도슨트의 설명과는 달리 소리는 생각보다 작고 빛도 약했다.
"저게 끝인가요?""왜 저러는 거죠?"사람들은 옆에 있던 스태프에게 물었다.
"글쎄요. 원래는 소리도 더 크고 시간도 긴데…."비현실 속의 소년과 현실의 어른이 서로를 본다여기 비현실의 소년과 현실의 어른이 있다. 그리고 여기는 전시장 바깥이다. 소년은 전시장 지붕에 앉아 있다. 현실의 어른이, 아마도 도슨트와 나, 비현실 속의 소년을 올려다 본다. 소년도 현실의 어른을 내려다 본다. 우리는 서로를 본다. 소년을 보는 것만으로도 소년, 혹은 우리 자신의 완성을 증명한다. 하지만 줌인시킨 카메라를 통해서 본 소년은 다리만 있을뿐 몸과 머리는 없다. 그 사실은 카메라를 통해서나 혹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볼 때야 알 수 있다. 비현실의 소년을 설명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건 말이죠.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 나오는 <행복한 도시의 사람들>을 연상시키는 군요.""행복한 도시의 사람들요?""네. 어제 열차에서 읽은 책에 그런 내용이 있었죠." <마이클 센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나온 내용이었다. 그 도시에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다. 오직 그 도시의 중앙 깊은 지하에 갇힌 한 아이만이 불행할 뿐이다.
그 책을 읽는 순간 나는 바로 그 아이가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나를 제외한 모두 행복해 보였으므로. 아이가 불행할수록 그 도시의 사람들은 행복하다. 아이의 불행이 행복한 도시가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다. 만약 아이의 불행을 제거하고 비참한 곳을 나와서 햇빛을 본다면 사람들의 행복은 사라져 버린다.
여기서 센델 교수는 묻는다. 정의란 과연 무엇인가? 행복한 도시의 정의는 무너진 것인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아이의 불행은 영원히 지속되어야 하는 것일까?
"저런, 그 소년은 참 불쌍하군요.""사람들이 행복해질수록….""시립 미술관에 또 다른 소년이 있어요. 가서 한번 찾아 보세요."도슨트는 또 다른 비현실의 소년을 찾으라며 내게 시립미술관을 찾을 것을 권했다. 나는 그녀의 제안을 감히 거절하지 못했다.
부산 시립 미술관, 그곳에서 찾은 비현실 속의 소년그녀는 시립미술관이 정확히 여기서 5분 거리라고 했다. 그것이 걸어서가 아니라 셔틀버스라는 말은 해주지 않았다. 물어 물어 거의 한 시간을 헤맨 후에 겨우 시립미술관을 찾을 수 있었다.
시립미술관에선 수많은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도슨트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따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엔 그녀를 따르지 않았다. 그가 앞의 도슨트보다 키가 작다거나 예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더 매력적이었다.
전시실 한 켠에 도슨트가 말하던 비현실의 소년이 있었다. 옆에 있던 여자는 소년을 보더니 얼굴과 몸이 없다며 깜짝 놀란다. 그녀도 먼저 도슨트의 설명을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오후 7시, 수영만 요트 경기장 앞에 섰다. 영화 시작 30분 전이다. 차갑게, 여기서는 이 표현이 적확할 듯 싶어, 그리고 10월, 해운대의 밤바다는 정말 추웠으므로, 명멸하는 불빛 아래 수십 척의 요트가 떠 있다. 그 앞에선 고가도로 위의 차량들이 빠르지는 않지만 같은 속도로 달린다.
왜 차들은 길 위에서 같은 속도여야 할까? 그것은 현실의 내가 속한 물리 법칙 하에서 그래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했다간 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비현실 속의 소년처럼 때로는 거침 없는 사고나 상상력의 확장은 그런 것도 간단히 무시해 버릴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 나는 비현실의 소년도 현실의 어른도 아니다. 사람들이 행복하도록 홀로 불행을 떠안고 지하에 갇힌 아이도 아니다. 고가도로 넘어 초고층 아파트가 일렬로 서 있다. 내일, 폐막작을 볼까? 연예인도 다수 참석한다는데…. 오늘은 바퀴가 나오는 여인숙으로는 가지 않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2010. 부산 비엔날레
-장소 : 수영만 요트 경기장 계측실(유료), 부산 시립 미술관(유료), 광안리 해수욕장등(무료)
-기간 : 2010년 9월 11일~11월 20일(71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