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애국동지대표회에 이상설은 연해주 지역대표였다. 박용만은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부터 그를 익히 알고 있었다. 1904년 여름 박용만이 한성감옥에 갇히게 된 건 보안회(輔安會) 사건 때문이었다. 일본이 전국토의 3활이나 되는 황무지의 개척권을 달라고 강요하자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저항한 사건이었다. 그때 이상설은 상소를 올려 고종을 만류했다.
각 지역들을 대표해서 처음 모이는 애국동지대표회에 이상설은 무게를 실어주었다. 이승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무게였다. 이상설은 대한제국의 고위 관리를 지냈고 헤이그에 세 밀사가 파견됐을 때 정사(正使)였다.
그는 박용만의 결의형제인 정순만과 친밀한 사이였다. 1906년 4월 이상설이 망명을 떠났을 때 정순만도 동행했다. 간도의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세울 때도 힘을 합했고 정순만은 서숙의 운영을 맡았다. 나이는 이상설이 세 살 더 많았다.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준과 합류했을 때도 같이 가 뒷바라지를 했다.
정순만은 미국에 가 있는 박용만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그의 아들 양필과 이승만의 아들 태산을 미국에 데려온 사람이 박용만이 아니던가.
세 밀사가 헤이그로 가야 하는데 걸리는 게 많았다. 여비도 모금을 해야 했고 국제무대에서 흉잡히지 않을 영어실력도 문제였다. 정순만은 박용만에게 도움을 구했다. 박용만은 미국에 있는 윤병구와 송헌주를 추천했다. 그러나 그들이 기일을 맞추기란 불가능했다.
윤병구가 이상설을 만난 것은 나중 뉴욕에서였다. 이상설과 이위종은 헤이그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자 8월 1일 미국으로 건너왔다. 박용만의 권유로 윤병구와 송헌주는 이상설을 만나 다시 유럽으로 건너갔다. 반 년 동안 네 사람은 영국을 비롯 유럽의 현지 언론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이상설은 초대형 사고를 친 사람이었다. 이상설 때문에 고종은 왕위를 내놓아야 했다. 대한제국의 군대도 해산됐다. 일제는 1908년 8월 9일 궐석 재판에서 이상설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유럽에서 두 번째 미국으로 건너와 있을 때였다. 일본은 세 밀사가 만국평화회의장에 나타나 세계의 열강 앞에서 일본을 모욕했다고 특단의 가혹한 보복조치를 취했다. 일본 외무대신이 건너와 고종을 끌어내리는 만행도 주저치 않은 것이다.
1908년 3월 윤병구와 함께 뉴욕으로 돌아온 이상설은 스티븐스 저격사건과 애국동지대표회의 진행과정과 1909년 2월 1일의 대한인국민회의 창립과정을 지켜보았다. 그 사이 박용만과도 교감을 자주 나누었다.
애국동지대표회 연해주 대표였지만 밀정의 보고에 의하면 유고가 있어 회의에는 불참했다. 어딜 가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그는 어른으로 대접 받았다. 샌프란시스코에 주로 머물면서 대한인국민회 제1차 이사회도 참여했고 만주와 러시아에 국민회 지회를 확산하는 계획을 세워 그 실천에 들어갔다.
이상설은 원래가 조용한 사람이었다. 아무 때나 나서는 사람이 아니었다.
"동지들은 합심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광복을 못보고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고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을 남김없이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버리고 내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이상설이 남긴 유언이었다. 자괴의 흔적을 깡그리 지워버리고 싶은 게 그의 심정이었다. 1917년 그가 우수리스크에서 병으로 죽자 동지들은 화장한 재를 강물에 뿌렸다. 공중으로 흩어지고 강물에 흘러간 그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2001년 우수리스크의 수이푼 강가에 유허비가 세워졌다. 연해주에 있는 우수리스크는 1870년 이래 한인들이 이주해서 개척한 곳으로 이상설, 안중근, 이동녕, 이동휘, 박은식, 신채호 등 우국지사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이상설은 27세 때 성균관 관장에 올랐다. 오늘날로 치면 국립대학 총장이 된 셈이다. 영어, 불어, 노어, 일어를 공부하고 국제정치와 법률을 연구했다. 그처럼 실력이 탄탄했기에 고종의 특명을 받지 않았을까. 그는 '산술신서(算術新書)'라는 한국 최초의 수학책도 펴냈다. 일본의 우에노 기요시가 저술한 '근세산술(近世算術)을 번역 편집한 것이었다.
그가 의정부 참찬으로 있을 때 을사5조약이 체결됐다. 체결을 막기 위해 회의장으로 들어가려다 저지를 받았다. 그는 막아서는 헌병지휘관의 어깨를 지팡이로 후려쳤다.
"(전략) 대저 그 조약이란 인준해도 나라는 망하고 아니해도 나라는 또한 망합니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야 나라를 위해 순사(殉死)할 것을 결의하시어 단연코 거부하시옵소서. 원하옵건대 성상께옵서 일본과의 조약체결에 참여한 제 대신들을 모두 징계하시어 국권을 바로 잡으시고 조약인준을 엄히 거절하시어 천하 만세에 성심이 있는 바를 바로 알게 함이 옳을 것입니다."이것은 을사5적이 1905년 11월 17일 늑약을 체결한 이틀 후 이상설이 고종께 올린 상소문의 일부다. 이듬해 봄 그는 망명길에 올랐다.
'서전서숙(瑞甸書塾)'은 간도 일대에 독립지사가 세운 최초의 교육기관이었다. 이상설이 5천원, 이동녕이 3천원, 정순만이 5백원을 내 용정에 설립했다. 인근의 한인 청소년 22명으로 시작된 학교는 나중 70 명으로 늘어났다. 이상설은 자기가 펴낸 '산술신서'를 가지고 산술을 가르쳤다. 그 외 역사, 지리, 국제공법, 헌법 등의 과목들을 가지고 근대교육을 실시했다.
학생들은 수업료를 내지 않았고 침식도 무상이었다. 교원들의 봉급과 학교의 운영자금은 이상설이 지급했다. 이듬해인 1907년 5월 그가 헤이그 밀사가 돼 떠나자 '서전서숙'은 10개월 만에 폐교됐다. 그러나 그 이후 이곳저곳에서 유사한 학교들이 세워져 민족의식이 들불처럼 번져 갔다.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간 건 1909년 4월. 국민회는 농지를 개간하고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기 위해 그 전 해 가을 블라디보스토크에 '아시아실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북미지방총회장 정재관이 해삼위로 가게 됐고 이상설도 동행했다. 가망을 찾아 유랑도 마다하지 않는 독립운동 지사들의 그 치열한 삶. 오늘날 어찌 유례를 찾을 수 있으랴.
이상설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항카호 남쪽 봉밀산에 토지를 구입 한인 1백여 가구를 이주케 했다. 최초의 독립운동 기지라고 할 수 있는 한흥동이 건설된 것이다. 그리고 노령과 만주에서 북미국민회 인사들의 노력으로 13곳의 새로운 국민회 지회들이 탄생했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후손이 꾸민 명작 카페)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