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렵엔 아전이 포흠(浦欠)이란 걸 저질렀었다. 투전은 '마음을 망가뜨리고 재산을 탕진하며 부모와 종족의 걱정거리가 되는 것'이라 했다. 관아의 아전이나 군교가 부정을 저지르는 빌미가 되다 보니 관청 물건을 사사로이 소비하는 건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일으켰다.
홍언학은 숙부와의 기억을 다시 추슬린 듯 세상을 떠난 홍진사에 대한 아쉬움이 얼굴 한쪽에 어려 있었다. 훗날엔 <세시풍요(歲時風謠)>로 사랑 받지만 당시 기방에 떠다니던 이런 노래가 조방꾼의 흥얼거림에 묻어나고 있었다.
자리에 둘러앉아 투전 쪽을 어지럽게 던지니 어조치성(魚鳥雉星)이 노소로 갈리웠구나 자제분들 겨울 석 달엔 뭐하시는가 세시(歲時)엔 팔대가(八大家)로 과제나 풀 일이네유만공(柳晩恭)의 이름으로 자리 잡은 <세시풍요>지만 명나라 모곤(茅坤)이란 이가 엮는 <당송팔대가>를 슬쩍 집어넣었다. 투전이 80장이므로 '팔대가'란 이름이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이다. 홍언학은 마지못해 입을 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의 숙부님께선 투전을 좋아하셨습니다만 늘 불편해 하셨습니다. 도박장을 개설하면 삼법사(三法司)에 의해 중벌이 처해지는 것도 모르진 않습니다만 요즘 들어 숙부님께선 마음자리가 몹시 불편해 보였습니다."
자신으로 인해 패가망신한 여러 사람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근자에 신익희(申翼熙)라는 화원에게 쉰 냥의 돈을 함부로 내어줬다는 점이다. 수표교 아래에 삼칠이 주검이 발견된 게 원인이지만 함부로 작지 않은 액수를 빌려줬다는 것으로 인해 형조좌랑의 은밀한 추궁을 받기에 이른다.
"도박이란 게 그러네. 관직에 있는 지방관도 투전에 빠져들면 부끄러운 줄 모르고 덤벼드는 게 투전이네. 돈이 떨어지면 빚을 내는 건 뻔한 노릇이나 그런 걸 전연 상관하지 않는 게 자네나 내가 할 일 임을 자네가 모르진 않을 거야. 내 말 알겠는가?" 그런 말에 어떤 뜻이 있는질 홍진사가 모를 리 없다. 대비마마의 돈을 관리감독 하는 자가 자기 마음대로 돈을 썼다면 장차 어떤 일이 생길 것인지를 경고하는 말이었다.
형조좌랑의 말이 낯설게 느껴진 건 그의 머리 한 구석에 삼칠이가 죽기 전 자신을 찾아와 했던 말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양반들은 한결같이 가난하고 착한 자를 과녁으로 삼아 먹잇감을 삼네. 내가 투전 기술자로 기방에서 큰소릴 내고 있지만 그건 모두 성상을 위험에 빠뜨릴 자금을 모으는 일이 아닌가. 당장에라도 이 짓을 관두고 고향에 내려가 이제껏 지은 죄를 참회하며 살고 싶네."삼칠이가 이런 말을 한 것은 도박판에 끌어들인 상대방이 완전히 거덜 나 식솔마저 거리로 쫓겨났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빚을 내 투전을 하고 그것을 갚지 못할 경우 입고 있던 옷을 벗어줘야 하고 그래도 부족하면 남을 속여 빚내거나 남의 물건이라도 훔쳐야 하다 보니 투전에 관한 문제는 어전에서도 거론되었다.
문과 교리에 수찬을 역임한 신기경(慎基慶)이 도박의 피해 중 투전을 으뜸으로 꼽으며 이익 취하는 걸 금해야 한다고 차자를 올린 것이다.
"전하, 신이 보기로는 사대부의 자제에서 아래론 시중의 서민들까지 집과 토지 등 재산을 털어바치고, 이로 인해 몸가짐이 흐트러져 도적 마음이 되니 마땅히 투전을 금해야 하옵니다."신기경의 주장처럼 조선사회는 단순한 오락이 꿈틀대는 곳이 아니었다. 역관 장현이 들여온 것이지만 도박의 비합리성은 조선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지금도 도박은 성행한다. 법에선 '심심풀이'를 훈방조치하지만 이것의 한계가 어디까지 인지는 매우 불투명하다. 그렇다면 체제는 도박을 왜 불법화 하는 것일까? 체제를 용인하지 않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어떻게 수익이 큰 장사를 외면하겠는가. 국가는 도박을 독점하기 위해 그들이 허락한 도박 외엔 모두 금지한다.
그 대표적인 게 경마와 복권이다. 고스톱이나 도리짓고땡은 금지하지만 '레저'란 이름으로 경마는 장려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증권은 어떤가? 그 꽃은 흉측한데다 악취마저 풍긴다. 시세차익을 노리는 인간들의 추태가 사기도박과 어우러져 불법거래로 나타난다.
불법이 판을 치는 사회. 삼칠이와 홍진사는 그 점을 보았기에 이제까지의 생각을 바꾸었다. 게다가 반홍이의 기둥서방이란 자가 흘린 말이 귀 따갑게 살아 돋았다.
"그 계집년의 솜씨는 일품이지요. 새는 날아가는 모양새로 품위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지만 기생 년은 나름대로 향기를 풍기며 격식과 모양새를 높이지요. 이런 말을 하면 나으리께선 어떤 생각을 하실지 모르지만 그 년은 나라는 인간을 질색했다니까요. 워낙 돈을 좋아하는 년이었으니 그럴 법도 했지만 가만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잖아요. 그래서 이율 물었더니 한다는 소리가 호흡이 안맞는단 거예요. 뭐 말라빠진 호흡이냐 물었더니 고년 하는 말이 '호흡이 생명인데 그렇게 말하니 더욱 그렇다'는 겁니다.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년이에요. 헌데 갑자기 그림을 그리겠다고 지랄염병이지 뭡니까. 그래서 어떤 그림이냐 물었더니 자신의 자화상을 신익희라는 화원이 그려 홍진사에게 준다지 뭡니까. 미친놈들이 정신없는 짓을 한다 싶어 내버려뒀는데 그렇듯 죽어 나자빠진 꼴로 발견된 겁니다."반홍이의 소지품에서 발견된 건 간단한 서찰이었다. 그것은 홍진사 죽음과 연관이 있어 뵈는 문건으로 서찰을 보낸 자는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내용이 시선을 끌었다.
<···홍진사 나이 쉰에 이르렀는데 윗전의 명을 어기고 자신의 뜻대로 하는 걸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 그렇다고 홍진사에게 재취를 맞아들이라고 권하는 건 꺼낼 얘기도 아니다. 사내 된 자가 긴 세월을 독수공방 해 오면서 계집의 살내음을 그리워 한다는 건 세상 이치가 아니겠는가. 그 자가 부인을 잃은 뒤 독수공방 해온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나 뒤를 이을 후사가 없으니 그 자의 몸과 마음을 움직여 너의 몸을 탐하게 한다면 눈앞의 부귀영화가 뜬구름일 수만은 없잖으냐. 그러니···.>서찰의 내용은 그 후로도 한참 이어졌다. 추려낼 내용이 없는 신변잡기식 얘기였다. 반홍의 방에서 나와 사헌부로 돌아왔을 때 질겁할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낯이 하얗게 질린 채 서과가 더듬거렸다.
"나으리, 해괴한 일입니다. 글쎄 홍진사의 하초에···."
"하초라니?""사내 물건이 잘려 나갔습니다."
서둘러 주검있는 곳으로 다가가 무명천에 덮인 보자기를 걷어내자 과연 홍진사의 주검엔 사내의 양물이 없었다. 사내임을 증명하는 그 자린 반듯하게 베어나갔다. 베어진 흔적이 희미한 것으로 보아 이 일은 아주 오래 전에 생긴 것이 분명했다.
비록 서출이지만 사대부 집안에서 이런 일이 생긴 건 멸손(滅孫)을 뜻한다. 한마디로 집안이 망한 것이다. 젊은 시절 홍진사와 시회를 즐겼다는 최재성이란 거벽(巨擘)을 찾아갔다. 그는 아직도 쉰이 다된 나이에 과거장 주변을 맴돌았다.
"홍진사라···, 그 사람 얘길 하자니 가슴이 뛰는구먼. 과거장에 온 선비들이 글을 짓는 건 고작 10분의 1이오. 나머지는 나와 같은 거벽들이 짓기요."
'거벽'이란 과거장에서 전문적으로 남의 답안지를 지어주는 사람이다. 그가 과시장을 기웃거린 이 무렵은 자신이 답안을 만들면 그 글을 전문적으로 써 주는 이가 있었다. 이른바 '사수(寫手)'다.
다시 말해 과시장에 들어서면 최재성이 답안을 대신 만들고 홍진사가 날렵한 글을 써 주는 사수였으니 재물깨나 있는 응시자는 작문이나 글씨를 쓸 필요가 없었다. 어렵지 않게 장원자를 만들어내면 떠억 벌어진 상차림에 기생 두엇을 태운 놀잇배가 등대된다.
자신들의 노고로 일궈낸 상급이라 기생이 따른 잔술에 산천의 경치와 미인에 취할 무렵이었다. 술도 어지간히 먹었고 해도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이라 돌아갈 차비를 서두르는 데 문득 기생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선비님, 나에게 특이한 재주가 있는데 보시지 않겠습니까?"
"재주? 무슨 재주?"
"춤이지요. 사내 마음을 낚는 춤입니다. 소녀가 춤을 추고 난 후 가격을 말할 것이니 마음에 드시면 춤값을 주십시오."
최재성의 눈가에 회한의 그림자가 어리기 시작했다. 분명 상서롭지 못한 일이 숨어있는 듯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다음 얘기를 꺼내지 않은 채 몇 번이나 헛기침을 토하고 나서 다시 확인했다.
"정작 홍진사 그 사람 죽었단 말입니까?"
"그렇소. 상처 하나없이 그렇게 숨을 거뒀습니다. 잇 사이에 낀 종이가 없었다면 자연사로 처리했을 것이오."다시 얘기가 이어졌다. 이맛살에 내 천(川) 자가 그려지는 것으로 보아 생각하기 싫은 기억을 끄집어내는 듯했다.
"기생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우린 따라갔었소. 술에 취한 것도 연유 중의 하나지만 무엇보다 그 기생의 용모가 빼어났기 때문이오. 기생은 우리를 술청으로 안내하지 않고 무슨 도관 같은 곳으로 데려갔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무속인(巫俗人)의 거처갔았소. 꽃등이 걸려있는 방에 들어가 기생이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참으로 아름다운 춤이었소. 덩실덩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선녀가 하강한 듯한 착각이 일어났으니까. 그런데 춤을 보기 시작하면서 우리들 마음에도 충동이 일어났소. 주체할 수 없는 정욕이 일어났다고나 할까. 나는 문밖으로 나가 정신없이 밖으로 내달렸소. 어떤 계집이든 만나기만 하면 속사정을 말하고 한번만 안을 수 있도록 부탁할 참이었소. 그러나 그것은 생각뿐이고, 나는 몇 걸음 못가 몽둥이를 맞아 정신을 잃었소."다음날 두 사람은 아주 처참한 상태로 만났다. 반 죽다시피한 최재성은 정신이 들자 어제 저녁에 갔던 도관으로 달려갔다. 거기엔 아랫도리가 피범벅이 된 홍진사가 쓰러져 있었다. 한기를 느끼며 깨어난 그에게 계집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네 놈이 놀기 좋아하는 양반들 자식에게 과시를 치러줘 합격시킨 바람에 내 혈육이 많은 공부를 하고도 떨어졌으니 네놈 꼴이 우습더라도 너무 섭섭해 말거라. 네 놈이 다시 살아난다면 부디 옳은 일에 힘을 기울여라."
새라는 놈도 죽을 때에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더니 그 말이 옳은 것 같다. 조사를 해보니 홍언학은 제 숙부가 혼자 사는 이유에 대해 몹시 궁금하여 반홍이란 기녀를 시켜 숙부의 젊음을 찾아주려 했었다. 그러나 그는 주색에 관해선 전문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주]
∎포흠(浦欠) ; 관아의 물건을 사사로이 소비하는 것
∎거벽(巨擘) ; 과거장에서 전문적으로 남의 답안지를 써 주는 사람
∎사수(寫手) ; 과거장에서 글을 써 주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