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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여덟 시 무렵, 사진기 하나를 어깨에 걸치고 배다리 헌책방거리 한켠 <삼성서림>을 찾아듭니다. 지난 유월까지는 배다리 헌책방거리에서 도서관을 꾸려 왔기에, 이곳 헌책방들을 이웃집 드나들듯 찾아다녔습니다. 이제는 우리 집살림을 충주 산골마을로 옮겼고, 도서관 또한 9월 4일에 짐차를 불러 옮겼기 때문에 더는 이웃집 드나들듯 찾아다닐 수 없습니다. 도서관 책짐을 마저 싸고 짐을 나르려고 인천에 와 있기에, 맨몸에 사진기 하나 홀가분하게 들고 헌책방으로 찾아갑니다. 아침 일찍부터 신나게 놀며 낮잠이고 저녁잠이고 들지 않던 아이는 겨우 새근새근 잠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녁 여덟 시 무렵이면 배다리 헌책방거리는 조용히 잠들 무렵입니다. 우리 아이도 잠들고 헌책방도 잠듭니다. 헌책방 일꾼은 하나둘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불을 끄고 쇠문을 내릴 즈음 아쉬움 달래듯 찾아들어 책 몇 권을 만지작거립니다. 아이하고 함께 살아가는 동안 책방마실이 이토록 만만하지 않음을 다시금 새삼 느낍니다. 아이하고 있어야 하고, 아이하고 어울려야 하며, 아이한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손을 잡아야 합니다. 모처럼 책방마실을 했다 하더라도 아이를 잊고 홀로 책바다에 빠질 수 없습니다.

 책방 골마루
책방 골마루 ⓒ 최종규

'오늘은 책 한 권조차 구경하지 못하고 돌아서야 하는가? 나도 아이 곁에서 까무룩 잠이 들어야 할까? 무릎이 시큰거리고 눈이 따가우니, 책 구경일랑 생각하지 말고 푹 쉰 다음 나머지 짐을 마서 싸야 할까?'

사진 한 장조차 못 찍고 돌아서야 할 판입니다. 쓰겁게 입맛을 다시며 돌아서야겠다고 헤아리는데, '올컬러한국위인특대전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이승훈>(학원출판공사,1988) 하나를 봅니다. 책마다 글과 그림을 누가 담았을는지 궁금한데, <이승훈>은 어린이책이나 어른책 사잇그림을 무척 많이 그린 이우경 님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자그마치 64쪽에 이르는 두툼한 그림위인전이니, 책 하나에 깃드는 그림은 무척 많습니다. 이렇게 길이가 긴 그림위인전에 그림을 넣자면 퍽 힘이 들 테지만, 힘이 들기에 앞서 그림결 흐름을 제대로 붙잡거나 잇기가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우경 님은 제법 긴 그림책이지만 그림결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그려야 할 대목을 찬찬히 잘 그리고, 이야기를 담아야 할 대목은 알맞게 이야기를 담습니다.

 쌓인 책과 꽂힌 책.
쌓인 책과 꽂힌 책. ⓒ 최종규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는 창작 그림책이 제법 나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림책을 그리는 수많은 그림쟁이 작품을 곱씹는다면, 이우경 님이 이룩하던 틀과 맛과 멋과 매무새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이와 같은 그림책을 그려내지 못합니다. 무슨무슨 대학교를 나왔다거나 무슨 미대를 다녔다거나 누구한테서 배웠다는 이름쪽을 내미는 그림쟁이는 많으나, 정작 눈물나거나 웃음나는 그림을 산뜻하게 내놓는 그림쟁이는 손가락으로 꼽기 어렵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이우경이라는 큰 그림쟁이 한 분이 있어 앞으로도 오래오래 기리고 즐길 만한 멋진 그림 이야기 하나 물려줄 수 있습니다. 다만, 이우경 님 숱한 그림책을 알아보는 손길은 아주 적고, 이우경 님 살가운 그림결을 읽어내며 받아들이는 마음길은 더욱 적습니다. 더욱이, 이우경 님처럼 스스로 제 그림결을 튼튼히 세우며 알차고 아름다이 그림누리를 펼치는 그림쟁이는 너무나 적습니다.

나라밖에 에즈라 잭 키츠나 앤서니 브라운이나 윌리엄 스타이그나 고미 타로나 누구누구가 있음은 알거나 이런저런 이들을 비평하는 전문가는 꽤 있습니다. 그런데 나라밖 그림책과 그림쟁이는 이야기하면서, 정작 나라안 좋은 그림책과 그림쟁이는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눈높이와 눈썰미를 북돋우는 살가운 그림책을 일구려는 손길이 모자랍니다.

.. 그(이승훈)는 여기서도 그의 독특한 개화주의 운동을 폈다. 그는 교회에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용동 마을 사람들에게 하던 것처럼 민족주의 고취와 민족성 개조에 대한 말을 잊지 않았다. "모두들 아침에 일어나는 대로 집 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거리를 비로 씁시다. 깨끗한 환경에서는 병도 덜 생기고 무엇보다 마음이 밝아져 하는 일이 잘 될 것입니다." … "여러분! 집을 깨끗이 치우는 일과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일, 부지런히 일하고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서로 도와주는 일, 그것이 바로 나라를 위하는 일이며 개화입니다." … "아니외다. 걸레질하며 이것도 겨레 위해 하는 일이라 생각하니 나는 오히려 마음 편하다오." ..  (28∼31쪽)

1권 동명성왕, 2권 광개토대왕, 3권 을지문덕부터 28권 윤이상, 29권 이태영, 30권 정주영까지 담은 '올컬러한국위인특대전집' 서른 권입니다. 헌책방에서 가끔가끔 짝 잃은 한 권씩 만나는데, 언젠가는 서른 권 한 질을 통째로 만나는 날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권마다 어느 분이 어떠한 틀로 어떤 이야기를 담아냈는가를 즐거이 어루만질 날을 맞이해 보기를 손꼽아 봅니다. 뜻과 돈이 있는 출판사에서 그림쟁이 이우경 님 그림책을 '모두 모은 책묶음'으로든 '가려뽑은 책묶음'으로든 내놓아 주면 얼마나 기쁘고 고마운 일이 될는지 꿈을 꿉니다.

일본 '이와사키 쇼텐' 출판사에서 1983년에 내놓은 어린이책 전집 가운데 하나를 옮긴 '컬러판 자연의 탐구' 가운데 몇 권을 봅니다. 모든 짝이 다 있지는 않고 여섯 권을 봅니다. 1권 <파리지옥>, 7권 <감나무의 1년>, 9권 <나무 눈의 겨울나기>, 18권 <소금쟁이의 생활>, 3권 <송사리의 탄생>, 23권 <종자와 싹트기>를 들춥니다. 계몽사에서 1987년에 우리 말로 옮기는데, 계몽사 판본을 살피면 이 책이 일본에서 엮고 만든 책임을 제대로 밝히지 않습니다.

책 끄트머리 간기 맨 아래 자리에 잔글씨로 "1987년 일본의 이와사키 쇼텐 사와의 출판 계약에 의하여 본 도서에 대한 일체의 한국내 출판권은 주식회사 계몽사가 독점 소유함"이라고만 적습니다. 책마다 누가 글을 쓰고 사진을 찍었는지, 이 책묶음을 어떠한 뜻으로 기획을 해서 내놓았는지, 이 책에 글을 쓰고 사진을 담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따위는 알 길이 없습니다.

계몽사에서는 외려 '한국 감수자' 이름을 가장 큼직하게 책 앞뒤에 새겨 놓습니다. 간기 자리에는 감수자 소개를 달아 놓습니다. 그나마 일본책을 우리 말로 옮긴 사람이 누군가마저 밝히지 않습니다. '창작자'와 '번역자' 이름은 없는 알쏭달쏭한 책입니다. '감수자' 이름만 대문짝만 하게 달아 놓은 아리송한 책입니다.

 헌책방 일꾼 손. 여든 넘은 할배 손입니다.
헌책방 일꾼 손. 여든 넘은 할배 손입니다. ⓒ 최종규

책은 참 훌륭합니다. 사진이 좋고 글이 알찹니다. 틀림없이 훌륭하다고 느끼어 우리 말로 옮긴 일본책일 테지요. 틀림없이 괜찮다고 여겼기에 우리 말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했을 테지요.

어쩌면 잘 팔릴 만하다고 보면서 우리 나라 창작 책인양 껍데기를 씌워서 팔아치우려 했는지 모릅니다. 그냥저냥 많이많이 팔아치우면 그만이라 보면서 내놓았는지 모릅니다.

계몽사는 1987년에 '컬러판 자연의 탐구'를 옮기면서 돈을 얼마쯤 벌었을까요. 이 책을 내놓으며 번 돈으로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살며 마주할 한국 삶터 이야기를 한국사람 손으로' 일구는 책을 나란히 내놓아 주는가요. 1980년대에는 아직 우리 힘으로는 모자라다면 2010년대에 이르렀어도 아직 우리 힘이 많이 모자랄는지요.

<감나무의 1년>을 넘기고 <파리지옥>을 들추며 <소금쟁이의 생활>을 들여다보며 속이 아립니다. 참 아무것 아니라 할 흔한 우리 자연 삶터 이야기를 책 하나로 묶은 일본 책쟁이입니다. 우리가 즐겨먹고 흔히 먹는 감 한 알이 어떻게 나무에 맺히고, 봄부터 겨울까지 어떻게 지내는가를 찬찬히 들려주려 하는 일본 책쟁이입니다. 물가에서 으레 볼 뿐더러 비오는 날이면 길거리 곳곳에서 쉽게 만나는 소금쟁이 한 마리를 알뜰살뜰 책 하나로 여미는 일본 책쟁이입니다.

<송사리의 생활>을 읽으니, 송사리는 장구애비나 물방개한테 잡아먹히는데, 송사리는 장구벌레 새끼를 잡아먹습니다. 삶은 돌고 돕니다. 파리지옥은 파리며 갖가지 작은 벌레를 잡아먹는데, 사마귀는 파리지옥 잎사귀를 갉아먹으며 빠져나오려고 용을 쓰며, 달팽이는 파리지옥에 걸려들지 않습니다. 개미 또한 파리지옥에는 잡히지 않습니다. 목숨이란 남다릅니다. 삶이란 대단합니다.

아이들은 개미 한 마리를 보면서 몇 시간이고 보낼 수 있는데, 이 나라 책쟁이들 가운데 "개미 한 마리 삶"을 그림책이나 사진책이나 글책 하나로 묶으려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은 있을까 궁금합니다. 노랑나비이든 범나비이든 흰나비이든, "나비 한 마리 이야기"를 살가이 엮으려 마음을 쏟는 사람은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나마 나비 그림책은 몇 가지 나왔습니다. 제비 그림책도 더러 봅니다. 참새 그림책도 한두 가지 보았습니다. 비둘기 그림책 또한 없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우리 곁 고운 목숨이자 삶인 '자연벗'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일구어 낸 그림책이나 작품은 퍽 드뭅니다. 깊이 좋아하지 못할 뿐더러 널리 헤아리지 못하는 우리 나라 사람들입니다. 자전거를 타며 즐기는 하루를 이야기책으로 꾸미지 못하는 이 나라 사람들입니다. 자전거 타는 사람은 많아도, 자전거 정비와 자전거로 살피는 과학이나 잘 빠진 자전거로 멋부리기라든지 산 타는 자전거로 놀러다니는 삶 이야기에서 맴돕니다. 자전거랑 오순도순 사귈 뿐 아니라, 자전거를 고운 살붙이로 껴안는 이야기는 도무지 만나지 못합니다.

 헌책방 <삼성서림>.
헌책방 <삼성서림>. ⓒ 최종규

"내가 지금 들어가는 시간이라서 미안해요. 다음에는 좀 일찍 와요." "아니요, 미안하시기는요. 잠깐이라도 돌아보고 이렇게 몇 권 사 가니까 고맙지요."

끈으로 묶어 놓고 가득가득 쌓아 둔 책 옆에 서서 오늘 장만한 그림책들에 묻은 먼지를 닦습니다. 집 앞에, 또는 집 옆에, 또는 집 가까이에 언제나 홀가분하게 찾아들던 헌책방하고 멀리 떨어지자니 서운합니다. '살림집 앞 텃밭'처럼 '살림집 앞 헌책방'이란 더없이 고마운 책쉼터인데, 이제는 이런 좋은 책쉼터를 즐길 수 없으니 아쉽습니다.

그러나 헌책방 가까이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꽤 많다지만, 가까이에 있는 헌책방을 제대로 알아보거나 눈여겨보는 사람은 참 적습니다. 언제라도 즐겁게 나들이하며 찾아오면 되는데, 언제라도 즐겁게 헌책방마실을 하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가까운 내 삶터 둘레에서 좋은 이야기감을 얻지 못하는 이 나라 사람들이듯, 가까운 내 삶터 둘레 좋은 책쉼터를 사귀지 못하는 이 나라 사람들이겠지요. 가까운 살붙이, 가까운 벗, 가까운 삶터, 가까운 골목, 가까운 들판, 가까운 냇물, 가까운 바다, 가까운 멧부리, 가까운 마을하고는 좀처럼 가까이 지내지 못하는 이 나라 사람들일 테지요.

덧붙이는 글 | ― 인천 배다리 <삼성서림> / 032) 773-8448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양철북,2010)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2010)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2007∼2010)



#헌책방#삼성서림#책읽기#삶읽기#배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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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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