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윤석 선생은 <이재난고> 등 300여 권의 저서를 남긴 대 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조 영조 5년인 1729년, 전북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에서 출생을 하였다. 63세에 일생을 마친 선생은 '군자는 한 가지 사물이라도 알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평생을 다양한 학문을 연구한 분으로 유명하다.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에 있는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5호인 황윤석 생가는, 선생이 출생한 집으로 부친 황전이 세운 집이다. 높은 축대 위에 7칸으로 된 안채를 비롯하여, 사랑채와 문간채, 사당 등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초가로 된 안채와 그 앞에 사랑채, 그리고 문간채, 광채가 남아있다. 사랑채와 문간채는 불타버렸던 것을 1909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초가의 기품을 지닌 사랑채
한 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마련한 사랑채는 모두 4칸으로 꾸며졌다. 이 중 사랑채를 바라보면서 좌측의 한 칸은 앞으로 돌출이 되게 해, 정자방으로 꾸몄다. 툇마루 역시 앞으로 돌출이 되었으며, 마루방을 비롯한 모든 방은 창호를 달아냈다. 덤벙 주추 위에 네모난 기둥을 세운 사랑채는 그저 학자의 집처럼 화려하지 않은 소박한 기품이 엿보인다.
사랑채와 문간채 사이에는 쪽문인 일각문을 판자문으로 두어 안으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채와 대문으로 이어진 대문채는, 사랑채와 합해 ㄱ 자 형으로 되어있다. 대문채는 두 칸의 방을 드렸으며, 흔히 보이는 헛간채 등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불에 탄 것을 복원을 하면서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은 축대 위에 세운 안채안채는 7칸으로 꾸며졌다. 높은 축대를 쌓고 그 위에 7칸의 집을 - 자로 지었다. 안채를 바라보면서 동쪽의 맨 끝은 마루를 놓고, 이어서 한 칸의 방과 두 칸의 대청, 그리고 안방과 부엌의 순으로 나열을 하였다. 대청의 북쪽 벽 위에는 평해황씨 선조의 위폐를 모신 곳이 있다고 하나, 문이 굳게 닫혀 있어 볼 수가 없다.
안채는 동쪽에 툇마루를 놓았는데 방의 끝까지 이어지도록 하였다. 예전에는 꽤나 운치있는 집으로 꾸며진 듯하다. 모든 문이 걸려있어 안을 확인할 수가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부엌문을 열고 들어서니 시원하게 판자벽 위에 까치구멍을 내었다. 문을 열면 부뚜막 옆에 커다란 독을 묻어놓았다. 아마 물독인 듯하다.
안채의 뒤편에는 예전에는 사당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빈 터만 남아있다. 안채의 동쪽에는 2단의 축대 위에 지은 광채가 있다. 5칸으로 꾸며진 광채는 양편에 문을 달고 판자벽으로 꾸몄다. 마루를 깐 광채는 땅에서 10cm 정도를 높여 습기를 막았다. 광채의 문에는 쇠고리를 달았는데, 이 집의 역사만큼이나 고풍스럽다.
이 집에서 황윤석 선생은 당대의 대유학자인 김원행의 문하에서 실학을 접하였다. 그리고 조선 후기 호남 실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10세부터 63세까지 54년간의 일상을 기록한 <이제난고>를 비롯하여 <역대운어>, <이수신편>, <성씨운휘> 등 30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문학, 경제, 예학, 사학, 종교, 천문, 지리, 언어, 예술, 의학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 박학한 지식을 갖춘 선생이 태어났다는 이곳 생가. 집안 곳곳에 배어있는 겸손이 눈에 띄는 듯하다. 화려하지 않은 집이 그저 선생의 기품을 닮은 듯하다. 집을 돌아보면서도 뒤꿈치를 들고 조용히 걷는 것은, 행여 선생의 학문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