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고리에 낀 숫자를 수소문해 봤지만 직접적으로 상관있는 건 나타나지 않았었다. 가게의 물건을 넣어두는 창고도 두 곳 뿐이었고 육씨 성을 쓰는 거래처나 '6'이란 숫자와 관련있는 상대방도 없었다. 그런데도 정약용이 쉽게 생각을 접지 못한 건 열쇠를 낀 '6'이란 숫자를 신환수 역시 처음 본다고 고개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나상희는 죽기 전, '6'이란 숫자를 열쇠에 끼웠다는 얘긴데···, 무슨 뜻인가. 죽은 자 곁에 있던 토끼나 닭은 뭐에 쓰는 물건인가?'고개를 갸웃대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데 출입문 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나이가 예순은 더돼 보이는 늙수그레한 사내가 문 안으로 들어서는 손님을 향해 구걸하고 있었다. 한 사내가 행색이 꾀죄죄한 사내를 향해 물러서며 핀잔을 줬다.
"영감님! 갑자기 달려들면 어떡헙니까!"
"아이고 죄송합니다. 늙은 것이 눈이 어두워 그리됐으니 용서하십시오."
짜증을 부리는 사내를 한쪽으로 밀치며 상노로 뵈는 젊은이가 꼬깃한 지전 한 장을 노인의 손에 쥐어주었다.
"요기라도 하십시오."
"아이구 이런 호사는 처음일세. 마음이 선한 자는 어디서든 표시가 난다니까. 더러운 놈들은 아무리 재를 뿌려도 냄새가 나지요. 나야 잿속에서 여러 해를 살았는데 어찌 모르겠는가. 나중에라도 궁금하면 내가 있는 백송(白松) 가까이 오시게. 나는 손가락이 여섯 개라네."
노인은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흘리며 선술집 무명천이 바람에 휘날리는 곳을 향해 부리나케 달려갔다. 힐끗 고개를 내민 신환수가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에잉, 늙으면 죽어야지 저게 무슨 꼴이야. 저렇게 침을 질질 흘리며 거지꼴로 돌아다니니 어느 누가 지전에서 일했다고 믿겠소. 에잉!"
이런 일이 자주 있었던 탓에 준비해 두었는지 신환수는 소금을 한사발이나 출입구 쪽에 뿌리고 돌아섰다. 그 말을 들으니 섬광처럼 스쳐가는 게 있어 정약용은 노인이 사라진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육(6)! 그래 육손이야. 나상희가 가리킨 건 육손이야. 지전의 비밀을 육손이가 알고 있다는 뜻으로 열쇠꾸러미에 6이란 숫자를 끼워 넣었어.' 정약용은 재동으로 걸음을 옮겼다. 재동은 수양대군이 충신들을 참살한 계유정난의 발원지였다.
어린 단종이 누님 경혜공주의 집에 간 것을 틈타 좌의정 김종서 집을 급습해 일가족을 참살하고 영의정 황보인 등을 궁으로 불러 모조리 학살했다.
그 당시 충신들이 흘린 피가 천지를 진동했고 낭자한 선혈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한명회 등은 피비린내를 없애고자 재를 뿌렸으므로 처음엔 잿골이라 하다 나중에 재동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재동엔 조선 중기 이후 '7대판서 터'를 비롯해 '풍양 조씨 터' 등이 있다. 그렇게 보면 이곳은 항상 세력의 구심점에 있었던 성씨들의 터였다. 정약용의 걸음이 백송 가까이 이르자 육손이 노인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참으로 영특하신 분이십니다."
노인은 고갤 숙이며 예를 차리더니 잠시 주위를 살핀 후 낡은 판잣집으로 안내했다. 평소 사람이 머물지 않는 듯 곰팡이 냄새가 사방에 떠돌았지만 노인은 나무 의자를 정약용 앞에 밀어놓으며 자신은 건너편에 자릴 잡았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행수 어른과 유명을 달리한 상희 아가씨의 죽음엔 의문이 많습니다. 소인의 무능한 재간으론 그것을 밝히지 못하지만 나으리께서 밝혀주리라 믿습니다. 소인이 나으릴 뵙고자 한 것은 육의전 일 때문입니다. 소인도 행수님 살아생전엔 지전의 서사(書寫)였습니다만 어른이 가신 후 현직에서 밀려나 지금껏 지전 주위를 떠돌며 살아왔습니다."
"지전 운영에 대해 아시는 게 있습니까?" "도중(都中)으로 있는 신환수는 예전 왈자패에서 떠돌던 자라 들었습니다. 그 자가 지전에 들어와 행수 어른의 눈에 들기 위해 여러 일을 처리한 공으로 지금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여러 일이라니오?""지전에선 나라 안에 필요한 여러 종이를 준비해 놓습니다만 한 해 전에 신환수가 들어와, 요즘 날씨가 좋지 않으니 아무래도 더위가 사나워질 것이라 하여 부채 만드는 농선지(籠扇紙)를 전라도 진안의 용담 땅에서 대량으로 구입하게 했습니다. 헌데, 날씨는 더위가 오는 게 아니라 장마가 오는 통에 자금 압박이 심했지요. 그동안 빚쟁이들 독촉이 심하던 중에 아가씨가 꾸려나갔지만 그 대부분은 신환수가 처리했지요. 요근래엔 무슨 일인지 시전의 질서를 잡는다고 평시소(平市署)에서 조사를 나와 뒤적거린 판에 아가씨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가씨께선 광희문밖 집터가 예사롭지 않다는 소문을 들으신 것입니다. 소인에게 은밀히 조사하란 당부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왜 그랬을까요?""세상을 떠난 행수 어른이 집을 담보로 돈을 빌린 모양입니다. 아가씨께선 신환수가 행수 어른의 눈에 들기 위해 일했을 뿐 지전 발전과는 상관없다는 걸 알고 계셨어요. 그에 대한 방책을 마련하는 길에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방책을 마련했어요?""그랬기 때문에 아가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사헌부에 이 일을 알린 것입니다."
"정작 신환수가 행수나 아가씨 눈에 들기 위해 일했다는 것입니까.""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태도를 돌변할 까닭이 없잖습니까. 아가씨가 돌아가신 후 지전의 거래장부를 말살하고 남아있는 물건들도 처분해 돈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자가 빼돌린 재물은 금점(金店)을 통해 운반하기 좋은 금붙이로 바꿔놨다는 소문입니다. 지전이 문 닫는 건 시간문제니 부스러기 몇 푼만 놔두고 몽땅 긁어갈 심보겠죠."
육손이 노인은 여러 장의 편지글을 내놓았다. '부모님 전상서'를 비롯해 '남아있는 사람에게 드리는 글'과 여러 형태의 숫자에 대한 연습이었다. 몇 장을 뒤적이던 정약용이 놀란 표정으로 눈을 치떴다. 거기엔 대여섯 장의 글씨가 스스로 목을 졸라 죽은 나상희의 유서와 같은 내용이 적혀있었다.
"노인장,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 묻습니다.""말씀하시지요."
"노인장이 모시던 나행수는 세상을 떠나기 전 닭을 사 왔습니다. 살아있는 닭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번에 세상을 떠난 나상희란 분은 죽기 전 토끼 한 마릴 사왔습니다. 무슨 이유로 닭과 토끼를 사왔을까요?"그 말을 들은 육손이 노인의 눈에선 구슬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말을 잇지 못하고 훌쩍이다 감정을 추슬린 건 한참만이었다.
"모두가 박복한 이놈의 죕니다. 내가 조금만 서둘렀어도 살 수 있었는데 너무 게으름을 피웠어요."
노인은 고갤 주억거리더니 천천이 입을 열었다. 차마 남에게 밝히기 두려운 사연은 일단 말문이 열리자 거침없이 쏟아졌다.
"내가 두 분께 항상 죄송하게 생각한 게 그거였습니다. 사고가 나기 전엔 나도 행수님과 살았습니다. 그때 나는 옻나무를 구하기 위해 관악산에 들어갔지요. 개옻나무는 군데군데 보였지만 참옻나무가 보이지 않아 연주대쪽으로 올라가다보니 시간이 꽤 지체되었고 내가 돌아왔을 땐 행수님께선 돌아가신 후였어요."
"그럼, 그 닭과 토끼는 옻나무와 함께 먹기 위한 것입니까?""그렇습니다. 행수님이 세상을 버린 후 나는 아가씨와 살지 않았지만 때때로 참옻나무를 구해 아가씨께 갖다드렸습니다. 약에 쓰시라고요."
"약이라고요?""그렇습니다, 아가씬 어른을 닮아 심장이 몹시 허하신 탓에 심허증(心虛症)을 앓으셨습니다. 그러니 평생 홀로 사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른이 생존해 계실 때엔 어떻게든 아가씰 치료해 도중(都中)과 짝을 맺으려 했지만 그게 여의치 않았지요. 온갖 치료를 해 봐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자 어른께선 도중을 불러 마음을 접으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한 달이 채 못돼 행수 어른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육손이 노인은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던지 조각난 자료들을 가져왔다. 거기엔 심허증 치료에 효험있는 여러 사례들이 적혀 있었다.
심허증은 두 가지 형태였다. 하나는 심장의 허(虛)로 인해 잠을 못 자거나 심할 경우 전연 잠들지 못하는 증세며, 다른 하난 잠을 잔 것 같은데 자고 나도 전연 잔 것 같지 않은 증상이다. 이것은 모두 심허의 증상인데 심장이 안정을 가질 수 없는 경우 혼수상태에 빠지고 계속되면 혈액이 고갈돼 생명을 잃는다. 육손이 노인이 넌지시 말을 얹었다.
"행수 어른을 닮아 아가씨도 심장이 나쁘셨습니다. 이러한 심장병을 치료하는데 가미수첩산(加味手帖散)이란 게 있습니다만 민간 의약엔 옻닭과 옻토끼를 복용해 효험을 얻기도 합니다. 그런 이유로 닭과 토끼가 있었습니다. 한 가지 이상한 건 아가씨가 전혀 심장이 약한 것 같지 않았거든요. 내가 가져간 옻나무와 닭, 또는 토끼는 끼니를 못때우는 사람에게 줬으니까요."
"다른 얘긴 없었습니까?""아가씨께선 저를 부르신 후 이런 얘길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태조 대왕이 어떤 집에 들어가 서까래 셋을 지고 나온 건 왕(王) 자를 뜻하며 일천 집의 닭이 꼬끼오 우는 것은 고귀위(高貴位)라는 것으로 아주 귀한 자리에 오른다는 뜻입니다. 복사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박살난 것은 '화락종유실(花落終有實) 경파기무성(鏡破豈無聲)'으로 꽃이 떨어지면 마침내 열매를 맺고 거울이 깨어지면 어찌 큰소리가 없겠느냐는 몽참(夢讖)입니다."
이것은 나상희가 자신의 죽음을 천하에 알려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자신의 집터에 쏟아지게 한 것이다. 이렇다 보니 어느 누구건 함부로 오명계 터에 대해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그 터는 안방과 대문, 부엌의 방위가 다른 모습으로 바뀐 채 새로운 주인이 나타나길 기다릴 참이었다.
[주]
∎농선지(籠扇紙) ; 부채를 만드는 종이
∎평시서(平市署) ; 시전의 상행위를 감독하던 관청
∎몽참(夢讖) ; 꿈에 나타난 조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