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2(금) 허리 통증이 계속되고 있다. 좀 더 심해졌다. 상체를 일으킬 때마다 허리를 무언가 날카로운 물건으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진다. 자연히 몸을 일으키고 숙이는 동작이 점점 더 느려진다. 그러면서 덩달아 자전거 타는 속도까지 느려지고 있다.
오늘 아침, 허리 통증을 줄이는 갖가지 방법을 강구했다. 우선 등짐을 벗어 자전거 짐받이 위에 올려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허리에 무리가 갈 수도 있는 모든 행위를 중단하거나 교정했다. 너무 높거나 긴 언덕을 만나면 자전거에서 내려서 무조건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페달을 밟는 힘 역시 허리에 무리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기어비를 평소에 사용하는 것보다 한 단계 더 낮추기로 했다. 왼발에 큰 힘을 줄 때마다 오른쪽 허리가 더 아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왼발에 힘이 들어가는 일체의 동작을 오른발에서 시작하는 걸로 바꿨다. 틈틈이 허리 운동을 하면서 충분히 쉬어가기로 했다.
이렇게 하고도 허리 통증이 나아지지 않으면 대책이 없다. 원인도 모르고 제대로 된 처방도 없이, 길 위에서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여행을 중도에 그만두어야 하는 일만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래저래 여행 기간이 한없이 늘어지고 있다. 11월 중순에 여행을 끝내기로 했던 계획에 수정이 불가피해 보인다.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불고 있다. 장흥 수문포해수욕장에 낙엽이 쌓인다. 낙엽이 내려 쌓이면서 파도소리보다 낙엽이 바람에 쓸려 모래사장 위를 굴러가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가을 바다, 높고 푸른 하늘, 찬바람에 바스락거리는 낙엽들. 가슴 한구석이 휑한 듯 쓸쓸해지는 풍경이다.
길 위에서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수문포해수욕장을 나서면 바로 보성군이다. 예전에도 자전거를 타고 이 지역을 한 번 지나간 적이 있다. 그때는 국도를 따라 보성다원으로 가는 길고 높은 언덕을 올라 산을 하나 넘어갔다. 그래서 이번에 해안 길을 달릴 때도 높은 산 한두 개쯤은 반드시 넘어가야 할 걸로 각오했다. 그런데 다행히 언덕은 있어도 높은 산까지 넘어야 할 일은 나타나지 않는다.
원산마을까지 바닷가 길이 계속된다. 자전거 타기에 비교적 수월한 길이다. 바람만 불지 않으면, 자전거 타는 재미를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내 몸 상태로는 이 길마저도 벅차다. 시도 때도 없이 걸어간다. 언덕에서도 걷고, 몸이 무겁다 싶으면 평지에서도 걸어간다. 경치 같은 게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온 신경이 허리에 쏠려 있다.
원산마을 앞을 지나 비봉리 공룡알화석지까지 가는 길에 높고 긴 언덕이 가로놓여 있다. 예전 같았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자전거를 타고 올랐을 언덕이다. 그 언덕을, 공룡알화석지에 무언가 볼 것이 많았으면 하는 기대를 안고 넘어간다. 그곳 박물관 소파에 앉아 차라도 한 잔 마시면서, 어느 정도 기운이 되살아날 때까지 충분히 쉬어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화석지가 수 킬로미터 해변에 뻗어 있다니, 천천히 걸어서 샅샅이 훑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상상이 너무 지나쳤다. 화석지에 도착해 보니, 내가 걸어서 둘러볼 수 있는 공간이 채 100미터도 되지 않는다. 박물관 같은 건 눈을 씻고 봐도 없다. 더더구나 그곳에서 무엇이 공룡알이고, 어디가 공룡알둥지인지를 찾아내는 일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이렇게 힘들여 찾아오기에는 무언가 한참 부족한 곳이다. 결국 쉬어가고 싶은 마음만 남겨두고 다시 이곳을 떠난다.
물론 비봉리의 공룡알화석지는 내가 보고 온 게 전부가 아니다. 이곳은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대규모 공룡알화석지다. 그 가치는 단지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로는 제대로 재단하기 힘들다. 그 사실을 우리 눈으로 확인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공룡알화석지에서 언덕을 하나 더 넘어가면, 바닷가를 앞에 두고 그 이름에 걸맞은 거대한 '공룡공원'이 들어서고 있는 공사 현장을 볼 수 있다. 한반도는 한때 공룡들의 낙원이었다. 공룡공원 조성 공사가 끝나고 나면, 그 사실을 좀 더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만남은 우연히 이루어졌다 득량만방조제 위에서 잠깐 휴식을 취한다. 이곳은 방조제 아래로 드넓게 펼쳐진 갈대밭이 인상적이다. 가을이라서 더 풍성하고 더 넉넉한 느낌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한다. 사방에서 바람이 부는 데다 가만히 서 있기에는 햇살이 너무 따갑기 때문이다. 어디서건 편안히 쉬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간절해진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방조제를 건너 안남어촌체험마을(신기 거북이마을)을 향해 가는 길에 도로 위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우리나라 해안여행>이라는 제목의 책자를 만든 작가들 중에 한 사람이다. 앞에서도 얘기한 바와 같이 이 책에는 바닷가 길을 따라 자전거여행이 가능한 길을 표시한 지도가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은 물론 지도가 전부가 아니어서, 한국 해안의 어촌체험마을을 중점적으로 소개하면서 그 외 해안에서 가까운 명승지와 관광지도 두루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을 보면서 나는 이 책을 만든 사람들은 누군지, 그리고 이 책을 만든 배경과 과정이 궁금했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단점을 놓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만든 사람들 역시 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고 한다. 자신들이 만든 책을 가지고 실제 여행에 나선 사람을 처음 보았고, 그것도 혼자서 전국을 일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남은 우연히 이루어졌다. 자동차 한 대가 옆으로 다가오더니, 나를 불러 세웠다. 가끔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나한테 길을 묻는 자동차 운전자들이 있어, 그도 그런 어처구니없는 사람들 중에 하나인 줄 알았다. 그런데 운전자가 카메라를 꺼내들더니, 대뜸 사진을 좀 찍을 수 없겠냐고 묻는다.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만남이 이뤄졌다. 사진을 찍기 전에 그가 내 이름을 듣고 먼저 놀랐고, 나도 그가 누군지를 알고는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나?
그 후에 안남어촌체험마을에서 한 사람을 더 만났다. 그들은 <우리나라 해안여행>을 제작한 이후에 다시 어촌체험마을 관련 홍보물을 제작하기 위해 이곳에 내려온 참이었다. 마침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뻘배타기와 물대포쏘기 체험 등의 행사를 막 끝낸 뒤였다. 그래서 한동안 책과 관련해 긴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몇 가지 궁금증이 해소됐다. 책은 모두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제작됐다. 서해, 남해, 동해로 나누어 각 부분마다 다른 작가들이 참여했고, 그 세 부분이 모여서 하나의 책이 만들어졌다. 책 표지에 지은이가 농림수산식품부와 한국어촌어항협회로 되어 있지만, 실제 원고를 작성하는 작업에는 여행 작가들이 참여했다. 그런데 제작 기간이 너무 짧았다. 콘텐츠 제작에 겨우 한 달 반 정도가 소요됐다. 이 책이 갖는 의미와 여러 가지 장점에도 불구하고, 편집상 몇 가지 흠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나 역시 편집을 업으로 해온 사람이어서 그들이 어떤 애로를 겪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개정판을 내는 건데, 지금은 그런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이 책을 실제로 사용하면서 알게 된 거지만, 개정이 필요한 부분이 여러 군데다.
애초 책이 잘못되어서 개정이 필요한 게 아니다. 자전거여행자들치고 이 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다. 그래서 더욱 완벽한 책, 더욱 사용하기 편한 책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책을 사용하는 데 유의할 점, 그리고 이 책에서 어떤 부분을 어떻게 개정하면 좋을지는 나중에 이 여행이 끝난 후에 한 번 더 정리를 해볼 생각이다.
가슴 뜨끔한 질문... "혹시 집에서 쫓겨난 거 아니냐?"유쾌한 만남이었다. 덕분에 안남어촌체험마을에서 준비한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됐고, 그날 밤을 마을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면서 한국 어촌의 발전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게 됐다. 이곳에 오기 전에도 수없이 많은 어촌체험마을을 지났고 체험객들도 많이 보았지만, 그 마을의 '체험'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그 사람들 중에는 마을 주민은 물론이고, 공무원도 있고 학자도 있다. 그들의 노력과 지혜가 모여서 마을마다 다양한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행사 주최자와 참가자들 사이, 행정 주체와 객체 사이에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로 인해 고민도 많아 보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그만한 갈등과 고민거리로 마을의 미래와 희망을 포기할 리 없다. 그들이 어촌에 품고 있는 깊은 애정이라면 그처럼 소소한 문제들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다. 비록 하루 저녁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많은 걸 배우고 깨달을 수 있었다. 꽤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무엇보다, 때마침 쉬어가고 싶던 터에 맘 놓고 주저앉을 수 있어서 좋았다. 오늘 달린 거리는 45km, 총 누적거리는 2582km다.
이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마을 주민 한 분이 날 보고 "실례지만, 혹시 집에서 쫓겨난 게 아니냐?"고 물어서 좀 당황했다. 웃자고 한 말이다. 그런데도 방심중에 그 말이 내 가슴을 예리하게 파고 들었다. 뜨끔했다. 집을 나선 지 벌써 40여 일째다. 아닌 게 아니라 이쯤 되면 내 발로 나왔든 등 떠밀려 나왔든 집에서 쫓겨난 거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마을 앞 바닷가에 신기한 돌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내일 아침 6시 30분에 그 돌을 보러 가기로 했다. 오전 6시 30분에 출발해야 한다는 게 조금 부담스럽다. 그러려면 6시경에는 일어나야 한다는 얘긴데, 내가 과연 그 시간에 일어날 수 있을까? 바닷물이 가득 들어온 뒤에는 그 돌을 볼 수 있는 해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그래서 늦어도 아침 6시 30분에는 출발해야 한다고 한다. 내가 언제 또 다시 그 돌을 볼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내일 아침, 무슨 일이 있어도 6시에는 눈을 떠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