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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안면도항쟁 당시의 모습 정부의 밀실행정으로 안면도에 핵폐기장을 유치하려던 계획에 대항해 일어섰던 11.8안면도항쟁이 오는 8일부로 20주년을 맞는다. 제2의 광주항쟁으로 일컬어지는 안면도항쟁의 주역들은 기념사업회를 발족해 20주년을 계기로 기념관과 기념비 건립 등을 추진해 항쟁의 정신을 후손들에게 계승시킨다는 계획이다.
11.8 안면도항쟁 당시의 모습정부의 밀실행정으로 안면도에 핵폐기장을 유치하려던 계획에 대항해 일어섰던 11.8안면도항쟁이 오는 8일부로 20주년을 맞는다. 제2의 광주항쟁으로 일컬어지는 안면도항쟁의 주역들은 기념사업회를 발족해 20주년을 계기로 기념관과 기념비 건립 등을 추진해 항쟁의 정신을 후손들에게 계승시킨다는 계획이다. ⓒ 안면도항쟁 기념사업회 제공

 

"전남도청을 사수하라."

 

1980년 5·18당시 광주시민으로 구성된 시민군에게 내려진 특명이다. 시민군들은 광주시민들의 자존심인 전남도청을 사수하기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내던졌다. 비록 계엄군의 총칼 아래 수많은 광주시민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역사는 5·18을 '광주민주화항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정부의 밀실행정에 대항해 삶의 현장을 사수하려 했던 사건이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태안에서도 있었다. 역사는 이를 '11·8 안면도항쟁'으로 기록하고 있다.

 

안면도항쟁의 원인은 정부의 핵폐기장 건설

 

안면도 주민들은 천혜의 자연경관을 간직하고 있는 안면도를 사수하기 위해 시민군에 버금가는 핵폐기장 건설 결사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해 상황실까지 설치하며 조직적으로 정부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였다. '제2의 광주항쟁'이라 일컬어지는 7일간의 안면도항쟁을 되짚어보자.

 

안면도 주민들은 항쟁 6일 전이었던 1990년 11월 2일 정부의 안면도 고남면 일대 핵폐기물처분장 건설 계획을 듣고는 비분강개했다. 더군다나 타당성 조사 시 거론되던 경북 영덕, 영일, 울진군을 제쳐두고 뜬금없이 안면도를 후보지 개발계획 안에 포함시킨 탓에 주민들의 저항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연육교를 폭파합시다."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었다. 1990년 11월 7일 밤 안면도 핵폐기장건설 결사반대투쟁위원회 집행부는 비밀리에 결사 항전 계획을 수립했다. 이는 '제2의 광주항쟁'이라 불리는 '11·8 안면도 반핵항쟁'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주민들이 연육교를 폭파하면서까지 목숨을 걸고 안면도를 사수하려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안면도는 해안국립공원을 비롯해 20여km에 이르는 깨끗한 모래사장과 소나무숲, 해수욕장 그리고 아름다운 섬에 이르기까지 천혜의 자연 자원이 분포돼 있었다.

 

하지만 정부가 원전 등에서 발생하는 방사성 폐기물을 영구보존하기 위한 핵폐기장을 안면도 일대에 건설한다는 방침을 세웠고, 이 소식을 접한 안면도 주민들이 폭발한 것이다. 특히, 전문가들 조차 핵폐기물 처분장은 핵발전소와 인접한 곳에 건설하는 것이 상식임에도 멀리 떨어진 안면도를 적지로 택한 이유에 대해 이해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정부는 이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부지 매입 등 막무가내식으로 핵폐기장 건설을 추진했다.

 

이에 주민들은 물론 도민과 각종 단체, 국회의원에 이르기까지 다각적인 채널을 통해 반대 투쟁이 진행되었고, 주민들은 결사반대투쟁위원회를 구성해 목숨을 건 사투에 들어가게 된다.

 

11·8항쟁은 '안면도 신화'의 끝이 아닌 시작

 

11·8 안면도항쟁의 시작은 11월 2일 정부의 안면도 핵폐기장 건설계획이 발표되면서 부터였다.

 

정부의 건설안이 발표되자 다음날인 11월 3일 대책기구로서 '서산태안 공해추방운동협의회'가 결성되었다. 이는 핵폐기장 설치 결사반대의 뜻을 표명하고 효율적인 대처를 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4일에는 '안면도 핵폐기물처분장결사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해 상황실을 설치하는 등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위한 결사항전의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특히, 이날 정부에서는 주민들의 거센 반발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강행할 방침을 밝혀 '불난 집에 기름 부은 꼴'로 만들어버렸다.

 

이에 주민들은 5일 핵폐기물 추방 결의대회를 열고 건설계획을 즉각 취소하라며 검은색 리본을 달고 가두시위를 벌였으며, 안면도 일대 마을 단위 청년 100여명은 6일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하게 된다.

 

특히, 이날 안면도내 초중고교생은 등교 거부를 했고, 안면고 학생 전원은 수업을 거부하고 반대집회에 참가했다. 목숨을 건 투쟁에 학생까지 가세해 '제2의 광주항쟁'의 불꽃이 타오르는 순간이었다. '핵폐기장 결사저지대회'로 이름 붙여진 이날 주민과 학생 5천여 명은 안면연육교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경찰의 묵인하에 집회허가 없이 이루어진 이날 집회는 큰 충돌없이 단순한 항의로 끝날 뻔 했지만, 시위 도중 공사를 강행하기로 했다는 정부의 발표로 인해 흥분한 주민들과 경찰간 몸싸움이 벌어지고 최루탄이 발사되는 등 과격 양상으로 돌변하게 된다.

 

11월 7일 항쟁 전날 학생들의 등교거부가 계속되고 학생 3000여명까지 동원된 대규모 궐기대회가 열렸다. 또한, 주민 200여명은 안면읍 광장에서 안면도에 대한 정부의 각종 개발계획을 취소하라며 연좌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조직적인 반대투쟁을 벌이던 안면도 주민들은 연육교 투쟁에서 보여준 정부의 불신을 마음에 담은 채 항쟁의 아침을 맞게 된다.

 

경찰과 무력충돌, 안면도는 아비규환

 

시위 6일째. 항쟁의 아침이 밝자 주민들은 화염병과 대나무봉, 최루탄에 대비한 물안경 등으로 무장을 한 뒤 장기전에 대비하게 된다. 또 학생 3000여명을 포함해 주민 1만5000여명은 안면읍 광장에 집결해 '핵폐기물처분장 설치 결사반대 궐기대회'를 열게 된다.

 

안면읍 사무소 점거, 안면공화국 플래카드 등장 등 안면도를 사수하기 위한 주민들의 본격적인 사투가 시작된 것이다. 전경과의 결투, 안면지서장 승용차 방화, 군청직원 감금, 자연휴양림 공사현장사무실 및 굴착기 방화 등 사태는 극으로 치달았다.

 

특히, 경찰이 주민저지선을 뚫고 안면읍에 진입하자 주민들은 시가전에 나섰고, 경찰이 쏘는 최루탄으로 인해 안면도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부상자가 속출함은 물론, 안면지서 등이 불에 타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듯했지만 투쟁위원회가 부상자들에 대한 긴급치료를 요청해 구급차가 들어왔다. 이후 날이 어두워지면서 주민들이 귀가하기 시작하자 전경들도 연육교 방향으로 후퇴함으로써 상황은 일단락 됐다. 이날 저녁 정부는 텔레비전을 통해 최종적으로 핵폐기물처분장 건설 강행방침을 철회하겠다고 발표했다.

 

핵폐기장 백지화의 일등공신 최규만, 박주훈

 

하지만, 이로써 안면도 핵폐기장 건설 계획이 완전히 철회된 것은 아니었다. 안면도항쟁 이후 정부는 안면도 핵폐기장 건설을 포기한 듯 보였지만 1991년 12월 서울대 연구 용역 결과에 다시 충남 태안을 협의대상 지역으로 포함시키면서 다시 문제가 불거졌다. 이는 정부가 안면도 핵폐기장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정부의 발표만을 믿고 안심하고 있었던 당시 안면도의 반핵운동은 크게 약화돼 있었다. 오직 고남면 투쟁위원회만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이 때 투쟁위원회를 이끌었던 인물이 바로 핵폐기장 백지화의 일등공신 최규만씨다.

 

최 위원장은 2003년 히말라야 등반 도중 실종된 박주훈, 편진범, 김종익, 전재진과 함께 이른바 '5·16 현대장 여관 사건'을 일으켜 비밀리에 작업하던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설 원자력환경연구센터의 핵폐기장 유치 관련 서류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둔다.

 

1992년 5월 16일 오후 10시께 벌어진 이 사건으로 인해 박주훈은 구속, 최규만은 불구속 기소되는 등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결국 이 사건은 김영삼 정부로부터 "안면도는 원자력위원회 제227차 회의에서 철회한 지역이므로 주민 90%이상 찬성하지 않으면 핵폐기물처분장을 설치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이끌어 낸다.

 

주민의 단합된 힘 보여 준 안면도항쟁

 

지난 2007년 12월 사상 최악의 기름유출 사고를 겪기도 한 태안군은 지난 20년 동안 수많은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지역주민들과 태안군은 희망을 놓지 않고 슬기롭게 대처해 굳건히 일어섰다.

 

안면도 항쟁 역시 '제2의 광주항쟁'으로 기록될 만큼 고향을 지키겠다는 주민들의 단합된 힘을 보여 준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는 8일이면 11·8 안면도항쟁이 발생한 지 20여 년이 된다.

 

안면도 항쟁에서 보여준 주민들의 조직적이고 단합된 힘은 주민들이 하나로 똘똘 뭉치면 그것이 외압이건 공권력이건 간에 능히 이겨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문득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학생까지 (시위에) 나서면 나라의 근간이 무너지는 거야"라며 학생들이 시위에 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장면이 기억이 난다. 하지만, 학생들은 결국 시위에 나섰고, 계엄군의 총칼에 목숨을 잃은 학생들도 많지만 그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 오늘날을 살고 있다.

 

안면도항쟁 역시도 수천 명의 학생들이 정부의 부당한 정책에 봉기해 학생 고유의 의무인 학업을 뒤로 하고 거리로 나왔다. 지금은 어엿한 성년이 돼 사회인으로서 생활을 하고 있겠지만 안면도 항쟁의 주역으로서, 산 증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천혜의 자연을 간직하고 있는 고향 안면도를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편, 11·8 안면도항쟁 기념사업회는 오는 8일, 20주년 행사를 기점으로 삼아 기념관과 기념비 건립을 추진해 현재의 아름다운 안면도를 있게 한 안면도항쟁의 정신을 후손들에게 계승시키기 위한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덧붙이는 글 | 비슷한 내용이 태안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안면도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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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의 지역신문인 태안신문 기자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밝은 빛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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