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에 체결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둘러싼 밀실 재협상 논란이 거센 가운데, 자동차 분야에서 연비와 배출가스 등 환경과 안전 규정 등에서 미국쪽 요구를 대폭 수용하는 쪽으로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미국쪽 요구대로 자동차 환경과 안전 기준 등이 바뀌게 될 경우 국민 환경권을 담보로 FTA 재협상을 타결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기존 협정문에도 없는 자동차 관세환급 등 미국쪽 요구가 받아들여질 경우, 협정문 수정 뿐 아니라 한미FTA 이익의 균형이 심하게 훼손될 것이라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국내 시민사회단체 뿐 아니라 민주당 등 야당에서는 이번 협상을 두고, '졸속 퍼주기 협상'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어 향후 국회 비준 과정에서도 논란이 예상된다.
10분 만에 회견 정리한 김 본부장..."쇠고기 협의 하지 않고 있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8일 오후 외교통상부에서 가진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미국측에서 자동차의 안전기준, 연비, 온실가스 등 환경기준에 대해 많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면서 "자동차 부문에서 제일 깊이있게 많은 시간을 할애해 가며 (협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부터 미국 론 커크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통상장관회의를 하고 있는 김 본부장은 "미국산 자동차가 국내 시장 점유율이 1%도 채 안되는 낮은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안전, 환경 기준이 시장진입의 장벽이 되지 않을까하는 우려의 모습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특히 국민적 관심사인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개방에 대해선, "이미 밝혔듯이 쇠고기 수입 개방과 한미FTA와는 무관하다"면서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그는 또 "현재 쇠고기 문제에 대해선 아직까지 미측과 논의가 되지 않고 있다"면서, 언론들의 쇠고기 협상설(說)을 부인했다.
하지만 김 본부장은 이날 회견자리에서 자동차 협상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선 언급을 꺼렸다. 김 본부장은 "현재 협상이 진행중에 있으며, 상황이 유동적"이라며 "(협상 내용에 대해) 소상히 말씀 드리는 것은 오히려 불필요한 오해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또 이번 협상 시한이 오는 11일로 예정돼 있는 한미 정상회담에 맞춰 있는지에 대해선, "양국 정상회담이 오는 목요일에 예정돼 있다"면서 "협상 시한에 제약돼 있기보다 내용이 중요하다는 점에 유념하고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이날 공개 회견은 한미FTA 재협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난달 7일 프랑스 파리 회의 이후 처음이다. 하지만 김 본부장은 "협상 진행중"이라는 이유를 들어, 10분 만에 회견을 끝내고 자리를 떠났다.
국내 자동차 연비·배출가스 등 환경·안전 규정까지 모두 미국 요구 따라
김 본부장이 이날 회견자리에서 구체적인 협상 내용은 밝히지 않았지만, 정부 관련부처를 중심으로 일부 협상 내용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김 본부장이 밝힌대로, 현재 한미간 협상의 중점은 자동차 분야에 집중돼 있다. 이 가운데 미국쪽은 자동차 연비와 배출가스 등 환경기준과 안전기준까지 큰 폭의 양보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동차 연비의 경우 환경부가 지난 9월에 입법예고한 고시안을 보면, 10인승 이하 승용승합차(총중량 3.5톤 미만)에 대해 2009년 현재 리터(ℓ)당 14.8km인 평균에너지소비효율을 2015년까지 17km/ℓ로 맞춰야 한다. 만약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게 돼 있다.
하지만 미국은 이같은 기준이 자국의 기준(현재 ℓ당 11.7㎞인 승용차 연비 기준을 2016년부터 ℓ당 16.km로 강화)보다 강하다면서, 자국의 연비 기준을 충족하게 되면 법적 제재를 받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배출가스 역시 현재 환경부 고시안에 따라 2009년 현재 킬로미터(km)당 159g인 배출가스 기준을 2015년 km당 140g으로 총 12.2%(연평균 2.1%)까지 줄일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미국은 자국 기준인 2016년부터 139.8g/km까지로 맞춰달라는 것이다. 정부는 현재 연비와 배출가스 등에서 미국쪽 요구를 거의 수용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김종훈 본부장도 이날 회견자리에서 "사실 이같은 기준은 우리 국민 안전과 세계 관심사인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해 건전한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방향"이라며 "그럼에도 과도한 시장진입 장벽이 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게 과제"라고 밝혔다.
이는 결국 국내 자동차 안전, 연비, 온실가스 등에 대한 기준을 완화해 달라는 미국쪽 요구를 수용할 용의가 있음을 시사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같은 미국쪽 요구가 관철될 경우 사실상 국민의 환경권을 담보로 협상을 타결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백일 울산과학대 교수는 "기존 협정문에서도 우리나라는 미국의 자동차시장 관세 철폐에만 치중한 나머지, 자동차 연비와 배출가스 등에 대해서도 상당부분 양보를 했었다"면서 "이번 미국쪽 자동차 환경부문 요구는 사실상 국민 환경권과 미국차에 대한 완벽한 특혜가 맞바꿔지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협정문에 없는 관세환급 문제까지 거론..."이익 균형 심각한 침해"
이와함께 자동차 협상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관세환급 부분이다.
관세환급이란 국내 자동차 기업이 제3국에서 부품을 수입해서 만든 완성차를 미국에 팔 때 부품 수입 때 낸 관세를 되돌려받는 것이다. 관세환급은 지난 한-유럽연합(EU) FTA 때 거론이 됐고, 미국은 이를 근거로 관세 환급분의 상한선을 두거나, 관세환급 제도 자체를 없애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EU FTA에선 협정 발효 5년 뒤부터 본래의 관세액에 상관없이 환급액을 5%로 제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한미 FTA 협정문 원안에는 따로 규정을 두지 않고 있다. 현재 정부에선 EU와의 FTA 협정 수준에서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는 알려졌다.
백일 교수는 "관세환급 부문은 기존 협정문에도 없는 부분"이라며 "어떤 형식으로든 이같은 내용이 반영될지는 모르지만, 이는 기존 협정문 내용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 역시 "관세환급 부분은 유럽연합과의 FTA에서도 예외조항에 해당되는 것"이라며 "만약 이 부분이 반영된다면 기존 국내 업체들의 미국시장 관세철폐 효과가 상당부분 상쇄될 것이고, 국내 자동차 부품 업체 등은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또 "현재까지 나와있는 언론보도만 본다면, 미국이 연비와 배기가스 등 환경과 안전기준까지 모두 자국의 기준에 맞추라는 것"이라며 "이는 사실상 국내 자동차 환경과 안전 기준이 모두 깨지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정부는 이날 오후 9시께부터 외교통상부 청사에서 한미FTA와 관련해 관계부처 장관회의를 연다. 이 자리에는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을 비롯해 청와대, 기획재정부, 지식경제부, 환경부, 농림수산식품부 등 관련부처 장관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론 커크 미 USTR 대표와 가진 회의 결과를 설명하고 정부의 입장을 조율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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