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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은 연기암 문수보살
붉은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은 연기암 문수보살 ⓒ 최오균

이곳 지리산에도 일주일 내내 짙은 안개가 끼었다. 안개는 지리산을 돌아 태극마크를 그리는 섬진강을 따라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하다. 19번 도로와 화엄사로 가는 길에는 뽀얀 안개 속에서 단풍나무도, 전봇대도 희미한 실루엣처럼 가물거린다.

그래 인생이란 안개 속을 더듬어 가듯 불확실성 속에 살아가는 거다. 운전을 하다가 한 눈 팔면 아차 하는 순간에 사고가 나고, 발을 헛디뎌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도 하는 것이 인생살이다.

"안개 속을 헤매면 이상하여라!/숲이며 돌은 저마다 외로움에 잠기고/나무도 서로가 보이지 않는다/모두가 혼자다/나의 인생이 아직 밝던 시절엔/세상은 친구들로 가득했지만/이제는 안개 내리어/보이는 사람도 없다/……/안개 속을 헤매면 이상하여라!/인생이란 고독한 것/서로가 모르고 산다/모두가 혼자다(헤르만 헤세:안개 속에서)"

 안개 속에서는 모든 것이 희미한 실루엣처럼 보인다.
안개 속에서는 모든 것이 희미한 실루엣처럼 보인다. ⓒ 최오균

헤세의 시처럼 지나간 일주일은 그랬다. 그런데 8일 월요일 아침부터 갑자기 날씨가 추워진다. 안개는 더 이상 끼지 않지만 날씨는 변덕스럽다. 바람이 윙윙 불며 낙엽을 때린다. 바람이 울 때마다 낙엽은 맥을 못 추고 떨어져 내린다. 추풍낙엽(秋風落葉). 폴(fall). 가을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떨어져 내리는 계절이다. 단풍은 바람 앞에 맥을 추지 못하고 지상으로 휘날리며 떨어져 내린다.

 변덕스런 날씨에 햇빛이 천지창조의 빛처럼 구름사이로 드러난다.
변덕스런 날씨에 햇빛이 천지창조의 빛처럼 구름사이로 드러난다. ⓒ 최오균

천천히 물들고 더디 떨어지는 지리산 단풍

지리산의 단풍은 천천히 들고 더디게 떨어진다. 화엄사 계곡에 들어서니 빨간 단풍나무들이 시리도록 눈부신 마지막 빛을 발하고 있다. 날씨는 더욱 변덕스러워져 비가 내렸다가 개이기를 반복하며 요술을 부린다. 구름사이로 간간히 눈부신 햇살이 부챗살처럼 내리 꽂히기도 한다.

그 모습이 마치 천지창조의 한 장면처럼 신비하다. 단풍나무 아래는 빨간 융단처럼 낙엽이 수북이 쌓여있다. 낮은 계곡에는 아직 노랗고 빨간 단풍이 곱고 싱싱하다. 그러나 역시 바람이 불면 낙엽이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화엄사 입구 단풍은 아직 눈이 시리도록 곱다
화엄사 입구 단풍은 아직 눈이 시리도록 곱다 ⓒ 최오균

 화엄사 입구 노란 단풍
화엄사 입구 노란 단풍 ⓒ 최오균

"오메, 단풍 다 떨어져 내려뿌네잉~!"

단풍이 휘날리는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아주머니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아쉬운 감탄사를 연발한다. 아깝다. 가을은 아무래도 너무 짧은 것 같다. 좀 더 가을이 길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옷깃을 여미며 연기암으로 가는 화엄사 옆길로 들어선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웅장한 화엄사가 아직은 노란 단풍에 둘러싸여 있다. 지리산 제일가람 화엄사.

 아직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단풍나무
아직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단풍나무 ⓒ 최오균

 단풍이 떨어져 융단을 이루고 있다.
단풍이 떨어져 융단을 이루고 있다. ⓒ 최오균

"이 산은 백두산의 정기가 흘러 내려와서 이루어진 산이라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 일컫는다니 좋은 이름이외다. 헌데 빈도가 이 산에 처음 닿았을 적에 삼매에 들어보니 문수대성께서 일만보살대중에게 설법하시는 것을 친견하였으니 이 산은 분명히 문수보살이 항상 설법하는 땅 임에 틀림없소. 그러니 만큼 산 이름도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의 이름을 택하여 지리산 화엄사(智利山)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화엄사 창건 설화 중에서).

인도에서 온 연기조사가 지리산 화엄사를 창건했다는 설화 중의 한토막이다. 연기조사는 천축국에서 연을 타고 날아왔다고 한다. 그는 이 산의 주봉을 반야봉이라 이름 지었다. 반야(般若)란 지혜를 뜻한다. 문수보살은 지혜제일보살이다. 주위가 팔백리나 되는 웅장한 지리산은 산 그대로가 문수의 몸이다. 그러니 지리산은 지혜의 산이다.

노란 황금물결이 넘실대는 연기암 가는 길

 연기조사가 창건했다는 구례 화엄사의 단풍
연기조사가 창건했다는 구례 화엄사의 단풍 ⓒ 최오균

피아골 단풍이 좋다지만 화엄계곡을 따라 연기암으로 가는 길에 든 단풍은 나름대로 독특한 특색이 있다. 붉은 단풍만이 단풍이 아니다. 이 길은 그야말로 황금숲을 이루고 있다. 또한 연기암으로 가는 꾸불꾸불한 비포장도로는 산책을 하기에도 너무 좋다. 왕복 8km를 족히 넘을 비포장도로는 노란 황금물결 그대로다.

봄인가 가을인가? 가늠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노란 생명의 물결이 출렁거리고 있다. 때죽나무, 비목나무, 생강나무, 노란단풍나무, 서어나무, 자작나무 등의 노란 색깔이 가을의 찬가를 부르고 있다. 아니 봄에 갓 돋아난 연두색 색깔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는 잎이 아니라 노란 생명이 빛이다. 잎은 가을에 똑 떨어져야 봄에 다시 샛노란 싹을 틔울 것이 아닌가? 노란 연두색의 단풍들은 갈색의 참나무 단풍들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노란 단풍이 황금숲을 이루고 있는 연기암 가는 길
노란 단풍이 황금숲을 이루고 있는 연기암 가는 길 ⓒ 최오균

 연기암 가는 길
연기암 가는 길 ⓒ 최오균

2년 전 가을, 심장이식을 기다리며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아내와 함께 이 길을 걸으며 절망의 노래를 불렀던 곳이기도 하다. 심부전증으로 내일을 기약 할 수 없었던 아내를 붙들고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걸었던 기억이 새롭다. 매일 기도로 밤을 새우며 함께 붙들고 울었던 세월이었다.

지리산 문수보살의 가피력을 입었는지 아내는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심장장기를 기증 받아 기사회생으로 살아났다. 제3의 인생을 살아가는 아내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분에게 숙연한 마음으로 항상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아내와 함께 연기암으로 가는 길을 걸어가다니! 꿈만 같다.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생명을 버릴 때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가? 인생이란 낙엽과도 같은 것이다. 알 수 없다. 인생이란…. 그러니 언제나 찰나의 순간을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 살아있음 자체가 경이로운 것이 아니겠는가?

"오메, 바람에 아까운 단풍 다 떨어져 내리네!"

 노란 황금 융단길을 이루고 있는 연기암 가는 길
노란 황금 융단길을 이루고 있는 연기암 가는 길 ⓒ 최오균

사각사각 낙엽이 쌓인 길을 걷다보니 어느 듯 연기암이다. 연기암은 연기조사가 창건을 한 화엄사의 본찰이라고 한다. 연기암은 문수보살 성지다. 그는 문수보살께 화엄사상을 널리 펴겠다는 원을 세우고, 이곳 지리산으로 와서 화엄사상을 널리 펼쳤다. 지리산은 화엄의 세계다.

연기암에는 2008년도에 세운 높이 13m의 문수보살이 오색 단풍 속에 자비로운 모습으로 중생을 굽어보고 있다. 바람이 불자 오색 단풍이 백색의 문수보살상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그 모습이 마치 중생에게 내려주는 금은보화처럼 보인다.

 13m의 문수보살 상위로 낙엽이 황금비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다.
13m의 문수보살 상위로 낙엽이 황금비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다. ⓒ 최오균

 연기암에서 바라본 지리산 단풍
연기암에서 바라본 지리산 단풍 ⓒ 최오균

"오메, 단풍 다 떨어지네!"

아내가 그 모습을 보고 탄성을 지른다. 떠날 때는 미련 없이 가라는 가르침인가? 인생도 낙엽처럼 질 때를 알고 다시 돋아날 때를 알아야 한다. 도(道)를 이룰 때까지 끝없는 윤회의 사슬이 반복되는 것이 인생이다. 어리석은 중생은 생로병사의 고뇌를 끊지 못한다. 그래서 부처는 첫 가르침으로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를 설하셨을까?

 오색단풍으로 둘러싸인 연기암
오색단풍으로 둘러싸인 연기암 ⓒ 최오균

연기암에서 바라보는 지리산은 마지막 단풍들로 활활 타오르고 있다. 산허리 밑으로는 아직 만산홍엽(滿山紅葉) 그대로다. 그러나 허리 위로는 은발의 노인처럼 앙상한 가지가 허옇게 드러나고 있다. 떨어진 낙엽이 바람에 뒹굴어 어디론가 굴러간다. 아마 이번 주가 지나면 나뭇가지에 달린 단풍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변덕스런 날씨에 바람이 더욱 세차진다. 산동네의 겨울은 빨리 온다. 동장군이 슬슬 기세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오메, 바람에 아까운 단풍 다 떨어져 내리네!"

 연기암으 아름다운 단풍도 이번주면 다 질것 같다
연기암으 아름다운 단풍도 이번주면 다 질것 같다 ⓒ 최오균


#지리산 화엄사 단풍#연기암단풍#지리산#구례#섬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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