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서쪽으로 팔달산(八達山)을 낀 새로운 장지는 낮은 구릉의 평지가 깔린 동으론 평산성(平山城)이 있었다. 이곳의 읍치소(邑治所)는 송산리에 있었으나 두 해 전인 정조 13년, 장헌세자가 묻힌 원(園)을 화산으로 옮기며 수원을 화성(華城)이라 고쳐불렀다. 이것은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주관으로 성역에 착수한 일이었다. 그러나 영우원에 누운 사도세자의 유골이 쉽게 옮겨진 건 아니었다.

누운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좋은 터를 골랐으나 유해를 운구하는 가장 어려운 수순이 남아 있었다. 천장(遷葬)의 방법이나 시기를 놓고 호조참판 간옹(艮翁) 이헌경(李獻慶)이 방책을 올린다.

"전하, 도로에 관한 일로 말하면 지난번 연석에서 하교한 일이 있나이다. 처음엔 임시로 별전(別殿)에 모셨다가 서빙고에서 강을 건너 무궁한 슬픔을 조금이나마 부치려 했으나 그리할 경우, 자궁(慈宮)께서 몸소 왕림하시려 할 것이니 이를 위안해 드림이 급하다고 보았나이다. 아직 갈 길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원소에서 편리한 길을 모셨다가 발인할까 하나이다."

발인을 늦추자는 호조판서 이헌경의 상소는 수원으로 가는 천장 행렬이 한강을 부교(浮橋)로서 건너는 게 가능하다고 밝혔다.

상감은 그가 올린 상소와 <부교행>이란 시를 기쁜 마음으로 접수했다. 거기엔 강을 건널 시기를 11월로 잡고 있었다.

"경의 걱정은 얼어붙은 얼음을 어찌 깰 것인가를 말했으나 이에 대해서는 근신들이 여러 차례 헤아린 바 있다. 하여, 이번엔 선창을 쓰지 말고 임진강의 예에 따라 부교(浮橋)를 만들라고 이미 유사에게 명을 내린 바 있다."

간옹 이헌경은 세종대왕의 11대손으로 영조와 정조 시대엔 4대문장가로 손꼽는 인물이다. 실학의 영향으로 문체가 간결해진 간옹은 아버지 형조참판 이제화와 자식들이 실학에 빠졌음을 아쉬워했는데, 흥미로운 건 그의 가계(家系)다.

간옹의 6대조는 선조 때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파곡 이성중이고 경상감사를 지낸 이명웅이 고조부이며 정도태가 외조부다. 바로 사암 정약용의 고조부였다.

천장행렬이 부교를 이용해 마무리 된 지 어언 두 해가 지났다. 수원부는 이후 성역이라 개칭한 전하의 명에 따라 후일에 세워질 장안문의 홍예(虹霓)와 팔달문의 누각, 장락당(長樂堂), 낙남헌(洛南軒)이나 서장대(西將臺) 공사에 합류했었다.

그렇다보니 상감이 파견한 풍수사들이 어디서 뭘 하는지는 판관(判官) 최정오(崔廷吾)의 보고로만 듣고 있었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성지를 받든 감여들은 제각기 맡은 바 일에 충실하여 왕실이 겁난에 빠지는 걸 막고 있다 하옵니다."
"왕실이 겁난에 빠져요?"

"전하께서 마음에 두신 수원의 천장지는 누군가가 손을 쓴 것으로 보인다는 보고가 있나이다. 감여들은 그 지역을 둘러보며 해괴한 이상이 생긴 연유를 찾는다 하옵니다."
"어허, 갈수록 모를 소리! 무슨 이상이 있다는 것인가?"

"겉으로 보기엔 별 것 아니라 하나, 전하의 생부이신 장헌세자께서 잠드신 곳이니 추호도 허물이 있어선 아니 되기 때문이옵니다."

"허면, 감여들이 연락할 때까지 연유도 모른 채 기다리란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마마."

보고를 받고 나서 두 해가 지난 지금까지 일체의 연락이 끊겨 판관 최정호가 전하의 명으로 탐문에 나선 것이다.

실마리는 그들이 도성을 떠날 때 지닌 간룡척(看龍尺)이 죽은 자에게서 나타났다는 사헌부 검안에 촉각을 곤두세운 것이다. 최판관은 유시 어림에 정약용을 찾아와 이 일의 심각성을 일깨우고 있었다.

"사암을 청요직(淸要職)에 올릴 건 전하의 각별한 총애가 있기 때문이라 보고 하는 말이오. 나는 관상감의 판서 최정옵니다."

판관이면 정5품이니 정약용보다 품계가 높다. 그런 그가 굳이 전하의 총애를 혀끝에 올리며 상대를 높인 것은 '청요직'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수찬행렬(修撰行列)>이란 그림엔 북촌 골목을 말 타고 의기양양 지나가는 한림(翰林) 행차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한림은 실록을 기록하므로 사관이라 부르지만 좁은 의미론 예문관 전임관원인 봉교·대교·검열을 나타낸다. 또 한림8원은 춘추관 기사관으로 사관이 된 자들로 입시(入侍)·숙직(宿直)·사초(史草)·시정기(時政記)를 작성하거나 실록편찬을 보관하는 일을 맡았다.

홍문관·사간원·사헌부 등의 삼사(三司)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수찬(修撰)은 궁중의 사적(史籍)을 관리하고 왕의 자문에 임했다.

정약용을 홍문록에 수찬으로 올린 건 그에 대한 각별한 믿음 때문이다. 홍문관 관원이 되는 것은 문장은 물론 국왕을 지도하는 학문과 인격이 있어야 한다.

홍문록에 올리면 후보자 이름에 대해 홍문관·이조·의정부 관원이 마음에 드는 자의 이름에 둥근 점을 치고 그게 많은 자를 뽑았는데 정약용은 이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관리의 성격을 나타내는 말에 청직(淸職)이란 게 있다. 여기엔 나랏님에게 간하는 사간원과 사헌부의 벼슬아치로 언관(言官) 또는 간관(諫官)이라 불렀다.

일을 제대로 하려면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판단을 내려야 하고 행동이 똑바라야 한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개진할 수 있는 기개가 필요하다보니 청렴과 기개가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하여 청직(淸職)이라 했다.

그런가 하면 요직(要職)이란 것도 있다. 말 그대로 중요한 관직으로 관리의 인사권을 쥔 이조, 군사권을 쥔 병조, 재정을 담당한 호조를 가리켰다.

최판관이 사헌부에 들어와 정약용에게 청요직을 강조한 것은 비록 자신보다 품계가 낮아도 그의 학문이 높다는 것과 전하의 총애가 남다른 것을 가리켰다.

최정오는 자신의 말이 새어나갈 틈이 없자 한껏 상체를 숙인 채 이번에 발견된 주검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전하께선 영우원에 묻히신 사도세자의 묘역을 지금의 자리인 수원의 천장지(遷葬地)에 옮기시기 전 이름난 감여들을 명산·비처에 파견한 건 정수찬도 아리라 보오."
"그렇습니다."

"특별한 일을 명하실 땐 전하와 명을 수행하는 자만이 알 수 있는 '신부(身符)'란 걸 내리셨는데 그것은 하는 직종에 따라 천차만별이라 보오. 그 당시 사내들은 관상감의 알아주는 풍수사들로 사암이 죽은 자에게서 발견한 용 모양의 지남쇠를 지니고 있었소."

그것은 상감의 각별한 뜻이 담겨 있기에 일반 사람들은 무슨 용도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지남쇠가 풍수쟁이들이 방위를 보는 물건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대수롭게 생각지를 않았다.

네 명의 풍수사를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까지 데려온 인도자는 그제야 지남쇠를 그들에게 건넸는데 그는 판관 최정오였다.

"안에 든 건 방위를 보는 지남쇠로 용 모양을 한 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 직접 천장지에 가면 그 이율 알게 될 것이네. 지남쇠 중앙엔 소유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와겸유돌'이란 글자가 한 자씩 새겨 있으니 각자 자신의 이름자 하나임을 확인해주기 바라네."

그날 풍수사들은 지남쇠에서 자신의 이름자 하나를 확인하고 길을 떠났다. 최판관이 덧붙였다.

"그 간룡척은 내가 전하께 주청을 드려 만든 것이오. 장헌세자가 묻힐 천장지는 명당임엔 분명하나 관상감에 적을 둔 감여들 얘기론 좋은 곳은 반드시 흉한 기운이 서려 있으니 그걸 없애는 방도를 먼저 마련하란 말이 있어 그리 한 것이오."

"나 역시 황당한 얘길 듣고 망설이던 참이었습니다."
"뭐입니까?"

"간룡척은 땅을 살피는 게 아니라 여인의 몸을 살핀 거라는 말이 있어···."
"그렇소. 오래 전에 관상감에 몸 담은 송하(松下)라는 이가 그런 말을 했소. 풍수(風水)는 바람을 잠재우고 물을 얻는 것이니 그런 곳이라야 천장지에 숨은 용이 좋아할 것이라 했소."

장헌세자가 묻힐 장소는 '누운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곳'으로 송하란 이는 예언의 말을 흘렸었는데 그것은 일종의 주문(呪文)이었다.

<···조종산(祖宗山)에서 주춤거리고 내려온 줄기는 두 개의 봉우리로 정기를 모으고 다시 아래로 내려와 평평한 땅과 우물을 만든다. 여기에서 기운이 뭉치니 좌청룡 우백호로 따르게 하고 슬쩍 팔마형(八馬型)의 태를 이룬다. 입수(入首) 끝을 살짝 들어 잉(孕)을 만들고 월훈(月暈)을 양편으로 가르고 그 난간에 육(育)을 그어 물을 떨궈 내리고 좌우로 상수(相水)를 내어 혈토(血土)를 맺으니 자손이 꿇어앉을 전대(前臺)를 널찍하게 마련한 것이다. 인목(印木)으로 혈자리를 감싸게 하였으니 이 모습이 바로 명당이다.>

상당히 미묘해 보인 말들은 내용을 들춰보면 그리 복잡한 게 아니고 여인네의 모습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조종산이라 부르는 땅의 머린 여인네의 머리부분으로 아래로 내려오면 작은 줄기가 두 개의 봉우리를 만들어놓는다. 그 밑에 평야와 우물이 있고 다시 뭉치면 주봉에 해당하는 불두덩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송하의 <명당>이론은 풍수법으로 보면 사상(四象)이다.

그 사상이 와겸유돌(窩鉗乳突)인데 이러한 네 가지를 음양의 발전설에 접목시키면 여인의 은밀한 곳(陰貝)을 나타내는 게 국(局)이었다. 최정오가 낯을 굳히며 덧붙인다.

"관상감을 오랫동안 벽파 쪽에서 좌지우지 했다지만 술사들 중에 시파쪽 인물이 없는 건 아니오. 전하께선 장헌세자의 묘역에 불충한 일이 생길 걸 염려하여 시생에게 모든 일을 맡기셨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듣게 된 것이오."

"그게 뭡니까?"
"헌화와 타탭니다. 헌화(獻花)는 장지로 잡은 자리가 여인의 두 다리 같은데 자세히 보면 중간에 구덩이를 연 것과 같소. 이곳에 묘를 쓰면 여인이 음란해진다고 경계하는 자리고, 타태(墮胎)는 산의 다리가 양쪽으로 열려있는 형상이오. 이를 자세히 보면 흔부(掀埠) 치마를 걷어올린 모습으로 부귀가 있어도 자라지 못한 모습으로 알려져 있소. 은밀히 전해온 소식에 의하면 이러한 비방을 쓰고자 풍수사들이 수원으로 떠난 지 오래됐다는 것인데 이제야 소식 끊긴 풍수사들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간룡척(看龍尺)까지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오."

"그렇다면 관상감의 누군가가 헌화와 타태란 비방을 사용했다는 것입니까?"
정약용의 되물음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만큼 왕실을 위협하는 크나큰 일이었다.

[주]
∎원소(園所) ; 왕세자나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 등의 산소
∎헌화(獻花) ; 산의 형태가 여인의 두 다리처럼 생기고 중앙에 구덩이가 패인 상태
∎타태(墮胎) ; 산의 형상이 흔부 치마를 걷어올린 모습


#추리#명탐정#정약용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