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종교개혁 기념주일은 한국교회가 꼭 기억해야 할 날이 되었다. 베드로성당 건축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시작된 면죄부 마케팅을 보다 못한 마틴 루터가 말씀대로 살자며 이의를 제기한 지 493년 되는 날, 이틀 후인 지난 1일 서울에서 8000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기독교 은행설립 발기인대회를 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은행 설립을 꾀한다는 소식을 듣고 몸서리를 치고 슬퍼했는데 사정을 잘 모르는 분들은 그것이 왜 그토록 문제인지 느끼기 쉽지 않아 보였다. 기독교가 은행을 설립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갸우뚱하는 하는 이들을 위해 이 글을 적는다. - 기자 말
첫번째 이유, 국민이 법으로 금했기 때문삼성그룹과 현대그룹 같은 세계굴지의 대기업에 들고나는 자금의 규모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일반인들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경제학의 개념 중 하나가 부채도 자산의 일종이라는 것인데, 대기업들은 막대한 자본금과 부동산은 물론 이에 걸맞은 어마어마한 부채를 통해 기업영향력을 최대한 확대하여 이윤을 극대화한다. 물론 생산과 판매 과정에서 드나드는 현금과 어음과 해외자산도 그 몸집만큼이나 크다.
만약 이런 대기업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꽃인 은행업까지 겸업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그렇지 않아도 한국의 대기업들은 분식회계니 이중장부니 해서 정상적인 기업활동을 교묘한 방법으로 부풀려서 선량한 주주들에게 피해를 입혀왔다. 주주들에게 이익을 돌려야할 주식회사가 실제로는 기업총수들의 사금고 역할을 하고 선택된 이들의 개인기업처럼 운영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주식회사는 무엇이며 누구의 것인가?
주식회사는 분명히 소액주주를 포함한 전체 주주들의 것이며, 사장이나 회장은 주주들의 선임에 의해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부거래니 돈세탁이니 불법증여니 해서 기업총수 일가 등 대주주들의 사금고 역할을 해 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금융감독원이나 공정거래위원회나 국세청이나 시민단체가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한다고 해도 이미 커버린 대기업과는 싸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무소불위의 문어발식 대기업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은행업으로의 진출이다. 칫솔부터 자동차까지 다 관여하는 대기업이라도 은행업을 통해 자금을 직접 다루는 것을 우리는 법으로 금하고 있다. 만약 대기업이 은행을 소유한다면 그래서 삼성은행과 현대은행이 생긴다면 그렇지 않아도 커질대로 커진 대기업의 권한이 막강해져서 더 이상 견제할 방법이 없어질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주주들에게 빌린 돈을 자기 마음대로 꺼내 쓰는 대주주들이 마음 놓고 은행을 거쳐 돈세탁을 하고 비자금을 조성하여 주주들의 돈을 훔쳐갈 것이다. 상법에서 분명히 횡령으로 규정한 이 도둑질을 법적으로 하자없는 자금이동으로 조작해서 탈나지 않게 가져가고 걸리더라도 벌금 몇 푼만 내면 되도록 도와주는, 고도로 훈련된 금융 및 법률에 능통한 사원들은 충분히 많이 있으니까 말이다.
대기업 삼성의 오랜 숙원사업이 바로 삼성생명의 상장이었다는 것만 봐도 대기업에게 있어 금융업이 주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생명보험회사는 엄밀한 의미에서 은행업이 아닌데도 현금의 흐름을 손에 쥐고 이자놀이며 돈세탁이며 기업내부에서 마음 놓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얼마나 애지중지한 업종이었겠는가? 이것이 증권시장에 상장이 된다면 대주주인 총수 일가가 벌어들이는 수입은 얼마나 크겠는가? 이 노른자 기업이 상장이 되는 것을 국민은 법으로 막아왔다. 그것이 우리 국민의 정서였고, 무소불위한 대기업의 전횡을 시민사회가 견제할 몇 안 되는 제제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이 최후의 보루가 무너져 결국 삼성생명 증권이 상장된 것이 바로 2010년 5월의 일이다. 막강한 인력과 금력으로 상장기준을 바꾸고 끝내 숙원사업을 해결한 것이다. 이제 금융업 겸업을 향한 물꼬를 튼 셈이다. 이런 대기업이 더 나아가 은행까지 보유하게 될 경우 어떤 관청과 단체가 이를 감독하고 견제하여 주주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국가 전체의 자본흐름을 건전하게 유지하게 할 수 있겠는가? 대기업의 은행소유를 막아야 하는 이유이다.
한국 교회가 은행업을 하면 안 되는 이유도 이와 같다. 당회, 제직회, 교인총회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기는 대기업에서 주주총회가 갖는 의미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대기업은 주주총회라도 열지만 주일에 몇 차례씩 예배드리는 큰 교회는 교인 전체가 모이는 제대로 된 교인총회를 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교회가 모인 성도들의 집합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교회가 크면 클수록 헌금과 부동산 등 자금규모가 커지는데 비해 교회의 살림을 다루는 사람들은 목사와 소수의 사람들로 축소된다. 그 결과 재정사고가 나거나 용도가 명확하지 않은 지출이 잘 검토되지도 않고 목사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집행되어 문제가 생기곤 하지 않는가?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직접 은행을 운용하면, 교회은행이 건강하고 투명하게 재정을 운용하는지 누가 지켜볼 것인가?
한국교회는 진정 우리가 은행까지 소유해도 공정하고 깨끗하게, 공의롭고 정직하게 돈을 다룰 준비가 되어있다고 믿는가? 나는 대기업의 순수성을 믿지 않는 것처럼 아무 통제장치 없는 교회가 자동적으로 정직하게 돈을 잘 다룰 것을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도의 거룩함과 함께 죄의 유혹과 범죄의 가능성을 함께 믿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어쩔 수 없는 칼빈주의자이다. 지금 상황에서 교회가 직접 은행을 운영하면 머지않아 한국교회는 걷잡을 수 없는 부패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물론 사회법이라는 것은 돌에 새겨진 것이 아니므로 국민이 합의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그런데 우리 국민은 아직까지 한국교회가 은행을 제대로 다룰 것인지 그래서 은행업을 허가해도 좋을지 확신이 없는 것 같다. 국민은 왜 종교기관이 은행 업무를 겸해야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발기인 대회에 모인 당신, 그대는 확신이 있는가?
두번째 이유, 신용협동조합으로 충분하기 때문국민의 합의 하에 법률로써 대기업의 은행업 진출을 막았지만 모든 금융관련 분야를 막은 것이 아니다. 직원들의 복지차원에서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끼리 급할 때 돈을 융통하고 적절한 투자를 통해 금융수익을 도모하는 것은 허용해 왔다. 신용협동조합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를 통해 전세금도 융자받을 수 있고, 이자수익도 기대할 수 있다.
교회가 은행을 설립한다고 할 때 이를 좋게 여기는 사람들은 교회가 은행을 통해 많은 선한 일을 할 것을 기대한다. 돈이 필요한 교인들에게 돈을 융통해준다거나 저리로 장기융자를 해주는 경우 일반사회가 하지 못하는 복지기능을 일정부분 감당할 수 있다. 특히 빈민층에게 사업자금을 낮은 이자로 빌려주어 자립을 도와주는 무담보 소액대출 같은 사업은 멋진 일이다. 무담보 그것도 낮은 이자로 돈을 빌린 사람이 사업을 시작해서 마침내 빌린 돈을 다 갚고 자존감과 가정경제를 세우고 동시에 믿음까지 세운다면 그것처럼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가정이 살아나고 퇴락한 마을이 활력을 얻는다면 교회가 주는 전인구원의 좋은 모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 교회가 꼭 은행을 소유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교회는 새삼스럽게 은행을 설립하지 않고도 이런 좋은 일들을 진작할 수 있었다. 신용조합이 바로 그것이다. 교회나 선교단체도 이런 신용조합은 얼마든지 개설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성도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얼마든지 하도록 법으로 보장되어 있다.
이처럼 한국교회 섬김의 도구로 마음껏 쓸 수 있는 신용조합이라는 좋은 제도가 있는데도 실상은 천주교나 소수선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신용조합 외에 일반교회들에서 신용조합은 찾아보기 힘들다. 왜일까? 앞서 말한 교회내의 의사결정과 재정투명성이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교회에서 신용조합을 건실하게 운용할 수 없는 형편에 자금규모가 큰 은행을 시작한다면 누가 은행에 돈을 맡길까? 성도들의 헌금을 이용해 이익을 얻으려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를 반길 것이 틀림없다.
개교회에서 재정집사의 실수와 범죄로 일어난 재정사고는 교회를 말할 수 없는 곤경으로 몰고 간다. 그래서 재정집사야 말로 돈에 흔들리지 않고 신실하고 흠없고 믿을 만한 사람으로 세워야 하는 것이 목회의 상식이다. 우리는 한국교회가 세울 은행에서 그 막대한 돈을 다룰 흠없고 믿음직한 청지기를 찾기 쉽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인간의 나약함을 믿고, 또 한국교회가 아직 이 큰 돈을 다룰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우선 신용조합에서 먼저 그 돈 관리 능력과 열매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 열매를 확인한 뒤에 교회가 은행을 시작해도 늦지 않는다. 하필 이때 은행을 세우려는 당신, 기독교 정권이 끝나기 전에 한 몫 잡으려 하는가? 아니라면 왜 이리 서두르는가?
세번째 이유, 탐욕이 동기이기 때문거룩한 교회의 사역은 그 동기가 참되어야 한다. '장로 대통령 주신 하나님, 이번엔 은행도 주소서' 11월 2일자 한겨레 신문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기독교가 은행을 설립하면서 아무리 허울 좋은 명분으로 겹겹이 포장해도 세상 사람들은 우리 속내를 다 꿰뚫고 있다. 우리 솔직해지자. 결국 돈을 더 쉽게 주무르고 이자 수익을 얻어서 부자 되려고 은행업을 하려는 게 아닌가?
하나님 나라는 돈과 힘에 있지 않으며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는 말하면서 실상은 혈과 육으로, 돈과 힘으로 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아온 세상이 먼저 우리의 탐욕을 고발하고 있다.
교회는 종교기관이다. 교회가 기독교 학교나 유치원을 세우는 것을 말리는 사람이 없다. 비록 교육사업도 사업이고 게다가 교육열이 높은 우리나라에서는 잘 되는 사업중의 하나여서 필연적으로 괜찮은 이윤이 생기지만 교육기관 설립에는 명분이 있다. 교회가 사회복지 법인을 세우고 국가에서 지원금을 받더라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다.
종교기관의 주목적은 아니지만 관련해서 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사설 교도소를 운영한다고 해도 세상은 크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교화와 교정은 종교의 본질 중의 하나라는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바자회를 열고 교회 마당에서 만두를 팔아도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채찍으로 좌판을 뒤엎지 않는다. 선교비로 보낸다는데 누가 반대하며 손가락질 하겠는가?
그런데 대체 은행은 무슨 명분으로 설립하려는가? 신용조합도 제대로 운영 하지 못하는 교회가 세상을 설득할 만한 이유를 댈 수 있을지 궁금하다.
거룩한 교회의 사역은 그 과정도 진실 되어야 한다. 시기가 좋지 않다. 하필이면 어떤 학교를 나오고 특정 지역에 사는 어느 교회의 성도들이 요직을 다 차지한다고 비웃는 이때 은행설립을 추진한다니, 배나무 아래서 갓끈을 고쳐 매는 겪이다. 장로대통령과 아는 사람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을 때 그들의 권한을 이용해서 은행이라는 특권을 받자는 심산이 아니고 무엇인가? 생각대로 쉽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정도 계산은 세상이 이미 간파해 버렸다. 행정부를 통해 법안발의라도 하고 특혜성 허가라도 내주어서 은행설립을 추진할 계획인가?
대기업에게도 잘 내주지 않는 은행설립을 이 사람 저 사람 동원하고 이 방법 저 방법 다 동원해서 특혜성 허가를 받아내면 그렇게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서 은행을 세우면 거룩한 은행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시작부터 탐욕으로 시작하고, 방법도 권력과 결탁해서 탈법과 편법을 동원하거나 특혜를 받아 부정한 방법으로 세워질 은행이 앞으로는 경건하게 대쪽같이 법을 잘 지킬 것이라고 믿는 것은 자기최면에 불과하다.
온갖 편법과 특혜를 통해 은행을 세웠다면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있는' 세상에서 교회은행은 무엇을 줄 것인가? 은행설립을 위해 더러운 일을 마다 않고 나서준 사람이 나중에 특혜와 이권을 요구할 때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은행이므로 정직하지 않은 일은 할 수 없다고 뿌리칠 수 있단 말인가?
교회가 세울 은행이 다른 시중은행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 '주일은 쉽니다'는 표지판 외에 뭐 별다를 것이 있을까 싶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거룩을 요구하신다. 동기도 거룩해야 하고 과정도 거룩해야 한다. 이 시점에서 은행설립 운운은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그 동기를 의심받기에 충분하다. 기독교 은행이 필요하다는 당신, 숨은 동기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물어보시면 부끄럽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 2부에서 계속 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앤조이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