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갈수록 가을이라는 아름다운 계절이 점점 짧아지는 것 같다. 흔히들 말하는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상 이변으로 그런 건지, 아니면 가을을 깊이 있게 느끼지 못하는 내 메마른 감성 때문인지 모르겠다. 나이와 세월의 속도는 비례한다던데 정말로 나이를 먹을수록 잠시만 방심하면 어느새 계절이 바뀌어 버린다. 이러다 계절의 변화에 아예 무심해져 버리는게 아닌가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한다.
우물쭈물하다 가을이 속절없이 떠날까봐, 떠나버린 가을을 아쉬워하며 후회할까바 애마 잔차에 올라타고 서울 한강의 동생들 중 하나인 양재천을 향했다. 매년 이맘때면 잊지않고 달리곤 하는 양재천 길은 떠나려는 가을을 배웅하는데 좋은 곳이다. 정겨운 징검다리들이 놓인 개천가를 달리다보면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갈대들이 정말 이별을 아쉬워 하는듯 손을 흔들고 있다.
중간 휴식처인 양재 시민의 숲과 코스의 맨 끝인 과천 서울 대공원에서도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천고마비의 계절에 어울리는 멋진 말들이 많은 경마공원도 지나간다. 양재천길을 달리는 내내 얼굴과 손등을 비추는 햇살의 따사로운 느낌도 기억에 오래 남는다. 수도권 전철 3호선 도곡역에 내리면 바로 앞에 양재천길이 보인다.
아침 저녁으로는 쌀쌀한 초겨울 날씨지만 다행히 한낮에는 가을 햇살 덕에 따스하고 눈부시다. 양재천길에 들어서니 햇살의 후광을 얻어 반짝거리는 갈대들이 손을 흔들며 반겨준다. 떠나려는 가을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 귀여운 강아지와 걷는 사람, 식구들과 산책하는 사람등 가지각색이다.
개천에 놓인 정겨운 징검다리도 건너보며 천천히 달리다보면 좋은 휴식처가 나오는데 바로 양재 시민의 숲이다. 수목이 울창해서 이런 계절에 찾아 가면 더욱 풍성한 가을을 느낄 수 있다. 땅에 떨어진 낙엽이 하도 수북하게 쌓여 있어서 그 위를 걸어보면 푹신한 이불같다. 잠시나마 아름답고 화려하게 피었던 단풍들이 어느 새 저렇게 땅속으로 사라지는 걸 보니 사람의 삶과 별다를 게 없구나 싶다.
아이들은 쌓인 낙엽을 쓸고 밟고 손으로 뿌리기도 하며 놀고 있고, 어떤 청년은 단풍나무를 배경으로 열심히 여자친구 사진을 찍어주고 있다. 예쁜 핑크색 자전거를 타고온 아가씨 둘은 정자에 앉아 가을 풍경을 감상하며 김밥을 먹고 있다. 더없이 평화로운 가을의 정경들이다.
떠나기가 아쉬울 정도로 늦가을 풍경이 한창인 양재 시민의 숲을 나와 다시 양재천길을 달린다. 이제 길은 달리는 자전거족들로 만원이다. 양재천에 사는 백로는 이런 풍경에 익숙한지 가까이가서 보아도 날아가지 않고 자기 볼일을 보고 있다. "너는 세제도 없으면서 늘 깨끗한 순백의 옷을 입고 있는 비결이 뭐니?" 하고 묻고 싶을 정도로 백로의 하얀 깃털이 눈부시다.
갑자기 양재천 주변에 사람들과 차량들이 많이 보이고 어디에선가 희미하게 말똥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경마장 안쪽의 경마공원에 들어가 훈련중인 멋진 말들을 구경한다. 어쩌다가 인간을 만나 경마장에서 고생하게 된 말들이 불쌍하기도 하다. 오늘은 종마 외에 귀여운 망아지도 볼 수 있었다.
드디어 양재천길의 최종 목적지 과천 대공원에 도착했다. 이곳엔 곤돌라를 타고 구경할 수 있는 넓은 호수도 있고, 저렴한 입장료로 예술을 즐감할 수 있는 현대미술관도 있어서 좋다.그리고 무엇보다 내게는 4.5km 길이의 외곽순환도로가 있어서 마음에 든다. 이런 늦가을의 계절에 가면 도로가에 길고 아름답게 드리운 단풍들이 참 멋스럽기 때문이다.
오르막길도 아닌데 애마 잔차에서 내려와 끌바 (자전거 용어로 자전거를 타지 않고 손으로 끌고감)를 하고 간다. 자전거 타고 지나가기에도 아깝게 느껴지는 길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갔다. 떠나는 가을을 오래오래 기억해두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