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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켜쥐면 은화지처럼 구겨질 듯한

도시의 달, 그 달을 한 여자,

달이 지고 뜨는 작은 몸속에 품고 산다.

그렇게 달의 가을, 달의 여름, 달의 봄,

가고, 또 달의 가을, 달의 여름이

흘러 흘러 그 여자의 영혼의 옷은

하얀 구름, 혹은 검은 구름,

그 구름을 벗어난 달을 품고

천개의 달 속으로 흘러가는 강물이어라.

저 회귀하는 연어의 꿈속에

달, 달, 달, 달뜨다 지고 뜨고

그대 영혼의 술잔에 살포시 내려와

춤추는 고향의 달, 벌교의 달,

그 달에 비추어 그대의 얼굴 보리라.

<벌교의 달-달의 가을> 중- 정귀인

 

가로수 은행나무들이 도열해 있는 거리의 풍경이, 한 잎 두 잎 잎을 떨구며 어느새 겨울의 스산한 회색 풍경으로 옮겨가는 중이다. 그래도 벼처럼 잘익은 가을 햇살들 뒤섞여 출렁이는 가을빛 속에는, 쌀쌀한 한기에 옷깃을 여미게도 한다.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길목에는 독서삼매에 빠져드는 것도 좋지만, 문득 길가의 공연 포스터를 쳐다보다가, 마음에 드는 가을색이 완연한 예술작품 하나 감상하는 것도 좋겠다. 이 렇게 가을 색 짙은 겨울로 가는 길목, 은은한 달빛 출렁이는 춤 공연이 있다. 

 

 정귀인 현대무용단 기획공연<벌교의 달>
정귀인 현대무용단 기획공연<벌교의 달> ⓒ 정귀인 현대무용단

정귀인 현대무용단의 <벌교의 달>은 다가오는 25(목)일 오후 7시 30분 국립 국악원 예악당(서울 서초구)에서 공연된다. <벌교의 달>은 정귀인 현대무용단의 86번째 작품이 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이수자 민혜성씨가 특별 출연한다. 이 작품은 30여 년 넘게 춤의 길을 걸어온 정귀인 예술감독의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벌교는 전남 보성군에 소재한다. 소설가 조정래 작품 <태백산맥>의 무대가 된 공간이라면 독자들에게는 낯익은 지명으로 다가오리라. 이곳은 질곡진 우리 역사의 현장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장소로서 역사의 향기가 물씬 나는 곳. 기자는 지난 13일 정귀인 교수 연구실(부산대학교)에서 정귀인 무용단 기획공연 <벌교의 달>의 안무로 바쁜 그의 시간을 쪼개어 만났다.

 

다음은 정귀인 춤꾼과의 인터뷰 전문이다. 

 

- 지난 9월에 <가슴에 흐르는 강>을 공연하셨는데, 한 달 만에 새 작품을 만드셨나요?

"아닙니다.<벌교의 달>은 벌써 4-5년 전부터 생각했던 작품입니다. 벌교는 제 고향이기도 하지만, 남도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으로 너무도 유명한 문학적인 장소가 되었지만, 벌교는 제 개인적으로 언제나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들고, 나를 늘 연어처럼 회귀케 하는 장소입니다. 해서 그동안 이 고향의 공간을 춤으로 형상화하고 싶었는데 영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심하게 병을 앓고 서울 병원에 오셔서 저가 간병을 하면서, 어머니가 자꾸 집으로 가고 싶다고 떼를 쓰시는데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고향이란 어쩜 이런 곳이 아닐까 싶어요. 죽음이 다가오면 그곳으로 강하게 돌아가고 싶다는 회귀의 원초적인 본능이 지향하는 곳이 아닌가 싶어요. 벌교는 아주 어릴적 떠나와서 구체적인 이야기가 떠오르는 공간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의 심상에 늘 원척적인 그리움을 샘 솟게 하는 공간이고,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고향의 상징을 달에서 느낀다고 생각해서요. 이번 <벌교의 달>은 이런 계기로 탄생된 작품입니다.

 

- 특별히 고향에 애정을 갖고 작품 하고자 한 동기가 있으신가요?

"(웃음) 고향에 대한 공간에 늘 다각도로 생각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고향은 어머니의 자궁과 같다고 생각해요. 푸근하고 따뜻하고 언제나 돌아갈 수 있다는 자비를 내게 느끼게 하는 공간에 대해 달을 상징으로 해서 표현해 보았습니다. 이제 고향은 옛날 고향은 아니지만,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고향은 잘 변하지 않잖아요. 벌교도 마찬가지예요. 자연의 일부로서, 풍경의 일부로서 보여지는 벌교를 이미지화했습니다. 꼭 벌교 자체로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고향의 일부로 받아주시면 해요."

 

 정귀인 현대무용단
정귀인 현대무용단 ⓒ 정귀인 현대무용단

- 대부분의 작품들이 참 한국적이다 생각했습니다. 현대무용으로 한국적인 정서를 표출하는데는 어려움은 없으신가요 ?

"비교적 젊은 시절 미국에서 유학을 하였지요. 그때 키가 큰 미국인들 속에 내 자신을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어떤 춤을 춰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장 한국적인 춤이 가장 현대적이라는 생각입니다. 이건 말 장난이 아니고요. 미국에서 살면서 우리 문화와 우리춤의 정체성을 많이 고민하고 생각하면서 깨달은 것입니다.

 

- 작품을 하시면서 뒷이야기가 많았을 것 같아요.

"남들은 춤을 한다고 하면 대부분 화려하다고 생각하시는데 그건 그렇지 않아요. 정말 백조가 물 속에서 피가 나도록 물갈퀴로 헤엄치는 과정과 같지요. 새 작품을 생산하는 과정이 산고와 같이 어렵고, 이런 아픔을 <벌교의 달>에서 잉태하는 여인의 아픔으로 이미지화시켜보았습니다. 객관화시킨 '잉태'를 통해 관객에서 '어머니'라는 존재를 새삼 새롭게 환기시키고 싶은 마음입니다.

 

 <벌교의 달>안무자 정귀인
<벌교의 달>안무자 정귀인 ⓒ 정귀인 현대무용단

- 요즘 현대무용 너무 어려워서요. 쉽게 볼 수 있는 비결이라도 있다면 뭘까요 ?

"그래요. 현대무용 어렵습니다. 그러나 관객의 입장에서는 선입견을 버린다면 어렵지 않을 겁입니다. 춤은 몸으로 관객에서 표현하는 시나 다름없습니다. 무슨 표현일까 의아심을 품기보다는 몸짓 하나 하나에 영혼을 느껴보는 마음 중요합니다. 현대무용의 매력은 또 그것이기에 자꾸 익숙하게 관람하다보면 쉽게 다가올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작품도 자꾸 반복해서 읽으면 어느날 익숙해 지듯이 말입니다." 

 

-평생 춤을 하셨는데 가끔 다른 길을 가보고 싶지는 않으셨는지요?

"전 항상 춤이 잠재되어 있는 인간의 욕망과 꿈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춤꾼으로 몸관리를 해야하고 극도의 절제된 생활에 가끔 힘들었습니다. 나의 내면을 표현하는데 춤은 나의 인생의 스승이 되어주었고, 항상 감사한 마음입니다."

 

- 가족들만을 위해 춤을 추시는지요?

"아직 그런 기회는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계획을 해봐야 겠습니다.(웃음)"

 

변화무쌍한 인간의 마음의 궁극적인 평화와 행복은, 구름을 벗어난 환한

보름달의 충일에 닿아 있겠다. 우리 선인들은 하나같이 달의 숭배자에 다름 아니요.

여성의 몸은 빈번한 썰물과 밀물의 충만함으로 차고 기우는 몸 속의

바다에 비견되겠다.(중략) <벌교의 달>은 모든 어머니의 잉태의 달이자,

한 여인이 평생 가슴에 품은 달의 몽환, 달의 은유, 달의 사유,

달의 그리움의 환유이다.(중략) <벌교의 달>를 통해 궁극적으로

고향에서 시작되고 고향으로 회귀하는 인생의 탐색, 그 길에의 성찰이다.

- 정귀인의 <벌교의 달> 중

덧붙이는 글 | '벌교의 달'은 오는 25(목)일, 오후 7시 30분 국립국악당(서울 서초구 소재) 예악당에서 열린다. 공연문의: 051-510-2951-1740, 010-5521-0603  


#벌교의 달#정귀인#국립국악원#예악당#우리 춤 우리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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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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