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0일(토) 오늘은 여수시 국동항에서 돌산대교를 건넌 다음, 돌산도를 한 바퀴 돌아서 나올 예정이다. 돌산도는 이름부터 상당히 거친 이미지를 풍긴다. 이름에 '산'자가 들어가는 섬들이 대체로 그렇지만, 돌산도는 특히 '산'으로서 이미지가 더 강한 섬이다.
섬 전역에 산이 꽉 들어차 있다. 평지가 드물다. 오늘 그 섬에 생애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는 내 마음이 착잡하다. 눈앞에 고생문이 열려 있는데, 피해 갈 방법이 없다. 내 손으로 직접 그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기구한 운명이다.
국동항에서 바라다보는 돌산도의 산세가 자못 웅장하다. 육지에 있는 산들에 비해 결코 높다고 할 수 없는 산이다. 하지만 바닷가 해발 0미터에서 올려다보는 산은 육지 속 산들보다 더 높아 보이기 마련이다. 잔뜩 긴장한 상태로 돌산대교를 넘는다.
그런데 돌산도에서 처음 만나는 도로는 애초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경사가 낮은 편이다. 도로가 해안 절벽 위를 위태롭게 지나가기는 하는데 이전에 지나쳐온 길들과 달리 높낮이가 심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의외로, 갓길도 넓은 편이다. 자전거 타기에 편안하고 안전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돌산대교를 넘어 무술목까지 가는 길가의 바다에 굴 양식장이 끝없이 이어진다. 길가에 늘어선 간판도 대부분 굴과 관계가 있는 것들이다. 굴 양식이 대규모로 이뤄지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길에서 굴 한 접시 차려 먹지 못하고 지나가는 내 신세도 참 처량하다.
무술목을 지나고 나서도, '돌산'이 무색한 길이 계속된다. 이대로만 가면, 애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돌산도를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오래간만에 만만한 코스를 만나 여유를 부려본다. 하지만 그런 여유도 신기마을을 지나면서부터는 허세가 되고 만다.
향일암으로 가는 길에 매우 길고 높은 고개가 나타난다. 죽을힘을 다해 페달을 밟는다. 이런 고개를 올라갈 때는 어떻게든 고개 정상까지만 올라가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일단 정상에 올라서면 이번엔 또 내려갈 일이 걱정이다. 내려가는 길이 급경사에 좌우로 심하게 굽어 도는 길이라 맘을 놓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180도 굽은 길을 돌아 내려가다 자칫 절벽 아래로 튕겨져 나갈까, 몸이 잔뜩 움츠러든다. 자연히 브레이크 레버에서 손을 떼지 못한다. 고개를 내려가는데 팔에 얼마나 힘을 줬던지 어깨가 다 뻐근하다. 그런데 이 고통과 괴로움이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고개를 내려온 뒤에는 다시 향일암으로 올라가는 절벽 길을 올라타야 한다. 그리고 절벽 길을 달려서 임포마을에 도착해서는 다시 향일암까지 급경사 길을 걸어서 오른다. 걸어서 오르는 게 자전거를 타는 것만큼이나 힘들다. 그 가파른 길에 갓김치를 파는 가게가 층층이 올라서 있다. 가게마다 시식용으로 내놓은 갓김치가 있어 맛을 보지 않고는 지나갈 수가 없다. 힘은 들고 배는 고프고, 밥 생각이 몹시 절실해진다.
향일암으로 오르는 길이 두 갈래다. 하나는 계단길이고, 하나는 계단이 없는 비탈길이다. 나는 내 다리만 믿고 계단 길을 택한다. 하지만 곧 후회한다. 몇 개인지 숫자를 헤아리다 포기한 수백 개 계단을 걸어서 오르는 데 다리가 후들거린다. 나이 드신 분들은 중간에 멈춰서 숨을 고르기 일쑤다. 고행이 따로 없다.
향일암에 거의 다 올라섰지만 이번엔 길 아닌 '구멍'을 통과해야 한다. 바위 사이 틈새를 지나가야 하는데, 몸집이 큰 사람은 이 길을 통과하는 게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것 같다. 속세를 벗어나는 일이 이렇게 힘들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향일암을 오르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관음전에서 스님 한 분이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있다. 너무 조용해서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곳에 스님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다. 향일암은 절집에 가면 항상 듣기 마련인 목탁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적요한 분위기가 감돈다. 관광객들도 자못 숙연한 모습이다. 아마도 그 사람들 역시 바늘귀를 통과하면서 이미 속세를 떠나온 까닭일 것이다.
향일암은 바다 끝 수평선을 바라다보며 마음을 어지럽히는 갖가지 상념을 떨쳐버리기 좋은 곳이다.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향일암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두말할 것도 없이 절경이다. 힘이 들더라도 꼭 한 번 찾아가봐야 할 곳 중에 하나다.
향일암을 내려오고 나서는 다시 절벽 길을 오르내린다. 서쪽 해안 길의 경사도가 비교적 완만했던 것에 반해, 동쪽 해안 길은 경사가 다소 심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갓길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 길에서 비로소 돌산도가 말만 '돌산'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일부러 무시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서쪽 해안을 달리면서 돌산이 돌산답지 않다고 했다가 뒤늦게 동쪽 해안에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아주 정신이 바짝 든다.
그 길 중간에 방죽포해수욕장이 나온다. 방죽포해수욕장을 떠나 무술목까지 또 열심히 페달을 밟는다. 무술목은 양쪽으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폭이 매우 좁은 땅이다. 그런데 그 좁은 땅에도 있을 건 다 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농사를 짓고 있고, 또 다른 쪽에는 해양수산과학관과 음식점 같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거기에다 해양수산과학관 뒤로는 몽돌 해변까지 있다. 크고 작은 몽돌들이 널찍한 해변을 꽉 채웠다.
무술목을 지나서는 곧바로 여수 시내 방향으로 직행한다. 마지막으로 돌산대교를 넘기 전에 바다 건너로 산비탈에 주택과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차 있는 광경을 올려다본다. 내겐 매우 익숙한 정경이다. 서울을 가든 부산을 가든, 그곳이 북쪽이든 남쪽이든 사람 사는 풍경은 어디나 다 비슷하다.
돌산대교를 넘어 산비탈 주택가 아래 여수수산시장이 있는 곳까지 천천히 걸어간다. 시장이 가까워지면서 차량의 소음이 점점 더 요란해진다. 마침 주말이어서 차들이 시장을 향해 몰려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차들이 뒤엉켜 좀처럼 앞으로 나가질 못하고 있는 걸 보고 있으려니 여기가 어딘지 잘 구분이 가질 않는다.
같은 바닷가 마을이라고 하더라도, 도시는 확실히 더 세속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속세가 어떤 곳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골목 사이사이 불빛이 번쩍인다. 유리알같이 차가운 불빛이다. 겉을 아무리 고상하고 세련되게 치장했다고 하더라도, 마음까지 따뜻해지지는 않는다. 오늘 달린 거리는 78km, 총 누적거리는 3092km다.